이 마을은 「윗고절」과 「평촌」으로 이루어졌으며 무안읍에서 북쪽으로 감방산을 향해 2km쯤 가면 나오는 마을로 보평산 자락에 아늑하게 자리 잡은 마을이다. 우리 지역 마을 이름 중에서 조선시대 통치 이념인 충효가 나타난 마을이 하나 있는데, 바로 무안읍 고절2리 「상고절」 마을이다.
지명유래
《마을유래지》에 의하면 「상고절」 마을은 절개와 지조가 높은 고절리의 윗동네라고 하여 「상고절(上高節)」이라고 부르며, 「평촌(平村)」마을은 상고절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보평산 아래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의 형성 시 각 성씨의 입향조를 보면 처음에 무안박씨 박익경(1438~1520)이 세조 원년(1455) 단종 복위 운동에 가담하였다가 실패하자, 고향인 한양에서 낙향하여 이곳 보평산의 수려한 산세를 보고 터를 잡아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후에 광산김씨 김언황(1506~미상)이 들어왔고, 마지막으로 장흥고씨 고응후(1564~미상)가 영광에서 이 마을로 이거하였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보평산과 주변의 산새가 마을을 둥그렇게 둘러싸고 있는 소쿠리형이다. 이처럼 산이 마을을 소쿠리 곧 바구니처럼 감싸안은 형국을 풍수에서는 포용과 보호의 형상으로 해석하며, 외부의 바람과 기운을 막아주고 내부의 기운을 막아주는 길지(吉地)로 본다. 이는 마을이 산에 둘러싸여 있어 안정과 평온, 공동체적 결속을 강화하는 지형으로 주민들의 삶이 온화하고 협력적인 경향을 띤다고 한다.
마을성씨
현재는 여러 성씨의 이주로 인해 복합성씨 마을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마을 이름의 변화를 보면 1789년의 자료에는 「고절리」로만 불렸으나, 1912년의 자료에는 「고절리」와 「상고절」로 분리되었고, 다시 「상고절」, 「하고절」로 나뉘었다가, 현재는 「하고절」을 「본고절」로 고쳐 「본고절」, 「상고절」로 부르고 있다.
행정구역 변경
본래 무안군 외읍면의 지역으로서 1910년에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상고절리」, 「오리정리」, 「병암리」, 「평촌리」, 「유동」을 병합하여 「고절리」라 해서 다시 무안군에 편입되었다. 현재는 「상고절/평촌」 마을로 부르고 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이 마을에는 무안박씨, 장흥고씨, 광산김씨 등 세 성씨가 주된 씨족을 이루면 살고 있는데 아름다운 전통이 있다. 즉 한 성씨의 후예가 결혼하여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면 반드시 다른 성씨를 먼저 찾아가 인사를 하고 시댁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주민들이 한결같이 자랑하는 것 중의 하나가 일제강점기나 6.25 한국전쟁 등 격변기에도 이 마을 주민들은 피해가 없었다는 것이다. 특히 6.25 한국전쟁 때 이 마을에는 12명의 경찰이 있었으나 주민들은 전혀 피해가 없었다고 한다. 주산업은 쌀, 양파, 마늘, 고추, 참깨, 콩을 재배하고 있으며, 축산업도 10가구가 운영하고 있다.
주요시설
무안북부교회
무안북초(1999.9) 폐교로 인해 현재 무안교육지원청에서 「글로벌 교육센터」로 활용하고 있다.
마을변화
이 마을은 처음 「동녘께」에서 시작되어 「고려물」로 그리고 현재의 마을로 이어진 역사가 깊은 마을로 최근 마을의 배수구 정비 등 기반시설이 개선되고 자연, 역사, 문화 등을 보존하려는 노력과 함께 정수환경이 안정되고 있다. 인구 고령화 속에서도 전통과 경관을 지키려는 움직임이 두드러지며 마을의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동계, 부녀회, 노인회 등
공동이용시설
상고절마을회관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마을의 주산인 보평산은 이 지역의 유구한 역사를 보여주고 있으며 감방산의 지맥으로 유산팔경 중 하나인 ‘보평제월(寶平霽月)’로 노래되기도 하였다. 보평산성에 관하여 나타나는 최초의 기록은 1759년(영조 35년) 영조의 명에 의해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인데, ‘원래 산성으로서 현의 북쪽 5리에 있으며 물량고지(物良故址)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1864년 김정호가 편찬한 《대동지지(大東地志)》에 토축고지(土築古址)로써 물량시 고지(勿良時 古址)라 기록하고 있는 바 물량(勿良)은 944년(고려 혜종 1년)에 변경된 무안(務安)의 구지명으로, 보평산성(普平山城)은 고려시대의 토성 흔적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역사성을 갖고 있기 때문인지 이 산 아래에 ‘고려물’이란 지명이 남아 있다. 주민들의 대부분이 ‘고려물’을 알고 있으며, 예전에는 ‘고려물댁’이라고 불렀던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지금도 이곳에는 오래된 기와 조각들이 많이 나온다. 또한 이 산성은 왜구를 방어하기 위한 연해산성(沿海山城)으로 복병산(伏兵山)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현재 보평산 능선을 따라 곳곳에 무너진 석축의 흔적이 보인다. 1925년 발간된 《면성지(綿城誌)》에는 이곳 능선에 폐사된 사찰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확인할 수 없다. 폐사된 사찰이 있었다고 여겨진 곳에 장흥고씨 족보에서 대사동(大寺洞)이란 지명을 발견했다. 보평산 바로 아래에 무재샘이 있다. 비올 때 이 샘에서 무지개가 피어오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약효가 뛰어났다고 알려진 샘이다. 지금도 목포 등지에서 이 물을 먹으러 온다고 한다.
동/식물
예전에 마을 앞에는 당산나무들이 줄줄이 있어 방풍림 역할을 하였으나 길을 넓히면서 많이 베어 버려 지금은 몇 그루만 남아있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원모재 앞에는 ‘서당들’ 또는 ‘서당 앞’이라 하고 노산재 앞은 ‘동녘들’이라 한다. 마을에는 윗샘, 아랫샘 등 두 개의 샘이 있었다. 또한 마을의 동쪽에 길게 누워있는 산을 ‘태매’라 하는데 좌청룡에 해당된다. 입향조의 동생인 영광 군수를 지냈던 분의 묘가 자리하고 있는 산이다. 그 아래에 있는 골짜기를 ‘개댕잇골’이라고 한다. 그 외의 지명으로 서당등, 독다리길, 새경골, 앞골바지, 성그매, 서너골, 학교앞, 돗도밧등, 한삼 귀뚝자리, 양사들, 싯돌뫼, 개밋들, 잔등너머, 엄다암, 가재골, 살보배미, 나무다리, 포뜰 등이 있다. 이중에서 나무다리나 포뜰에서 조금만 깊게 파면 하얀 모래나 아름드리의 나무 조각이 나온다고 한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정월 보름이면 당산굿을 지내면서 마을의 안녕과 한 해 농사의 풍년을 기원했던 대상인 당산독도 있었으나 지내지 않으면서 묻어 버렸다고 한다.
유물, 유적
보평산에는 「보평산성」이 있었다. 말총[馬塚]이라 부르는 ‘말무덤’도 있다. 영성정씨 기행비 뒤에 자리하고 있는데 주민들의 이야기로는 원래의 크기가 지금의 것보다 훨씬 큰 규모였다고 한다. 무덤에는 커다란 돌 세 개가 함께 얹혀 있었다.
마을 한 가운데는 이 마을 입향조의 호를 딴 「애한정」이란 정자가 있다. 1996년에 세운 정자로 서거정이 찬한 ‘애한정기(愛閒停記)’와 ‘애한정 중건기’가 석판에 새겨져 걸려있다. 정자 앞에는 1997년에 세운 〈애한정박선생유허비〉가 서있다.
마을에는 여산송씨를 모신 ‘경모문’과 〈영성정씨열부기행비〉가 있다. 경모문은 마을에서 발산 쪽으로 가는 길 오른편에 자리하고 있다. 입구에는 2000년에 세운 〈충렬부인여산송씨절행비〉란 비석이 있고 안에는 정려이건기와 〈정부인여산송씨기적비〉 등 두 개의 비가 서 있으며 재각에는 5개의 현판이 붙어 있다. 1979년에 개축한 것이다. 또한 이 마을 박연종의 처 영성정씨의 열행을 기념한 〈영성정씨효열비〉 안에 〈영성정씨열부기행비〉(1982)가 자리하고 있다. 그 외의 비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박석윤공적비〉, 〈후산박영채경모비〉(1976), 〈경헌김상철유덕비〉(1978)가 있다. 마을의 오른쪽에는 광산김씨의 재실 두 개가 있다. 위에 있는 ‘원모재(遠慕齋)’는 광산김씨 김란서를 모시는 재각으로 1968년에 건축하고 1998년에 중건하였다. 옆에는 〈유인수성최씨효열비〉(1963)가 서있다. 또한 아래 쪽에는 노산재(鷺山齋)가 있는데 광산김씨 김언황을 모신 재각으로 1992년에 세웠다.
지금도 보평산에는 용바위, 장군바위, 엉친바위 등이 있다. 마을에는 5개의 고인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현재 작은 고인돌들은 땅에 묻혀서 보이지 않으며, 그중에서 노산재 아래쪽에 있는 큰 고인돌은 길이가 5m, 폭이 2m 70cm이나 되는 것도 있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서거정 선생이 지은 「애한정기」에는 공의 지조를 높이 평가하며 애한정공이 지은 유응부 선생의 만사를 소개하였다. 즉 〈공생사직중(公生社稷重) 당신이 살았을 때는 사직이 무겁더니, 공사사직경(公死社稷輕) 당신이 죽고 나니 사직이 가볍도다. 퇴파대주거(頹波大柱去) 나라의 대들보가 무너져 가니, 뇨뇨아심정(我心旌) 흔들리는 내 마음을 어떻게 가누리.〉 이를 통해 얼마나 애틋한 선비의 마음이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박익경은 자가 필보(弼甫)이며, 호는 애한정(愛閑亭)이다. 장인인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등과 도의로 사귀어오다 1456년 그들이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처형되자, 그들을 포함한 사육신의 시신을 노량진에 묻어 주고 무안으로 내려와 이곳 보평산의 수려한 산세를 보고 터를 잡아 은거한 것이다. 그는 단종이 죽은 12월 24일이면 북향하고 제를 지내며 슬피 울었다고 한다. 세조가 누차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후 83세로 생을 마치니 이조참판에 증직되고 「병산사」에 배향되었다. 효행이 출증하고 문장과 경학이 뛰어났으며 단종 조에는 효행으로 정릉 참봉을 제수받기도 하였다. 이러한 박익경의 높은 충절을 기리기 위해 마을 이름을 고절(高節)이라 했다고 한다. 또 하나는 여산송씨의 열부(烈夫)행(行)이다. 여산송씨는 본고절 입향조인 송천종의 동생으로서 이 고을 출신인 진위장군(振威將軍) 박제(朴悌)의 부인이다. 박제는 박익경의 손자로서 임진왜란을 당하자, 수백의 의병을 모아 부사(府使)인 최경회 장군의 막하에서 남원과 무주 등에서 적을 소탕하고 군량미를 조달하는 등 큰 공을 세웠다. 정유재란 때에는 이곳 보평산에서 왜병을 맞아 싸우다가 위기에 몰리게 되었는데, 그때 부인 송씨의 도움으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송씨부인은 왜군에게 붙잡혀 추행을 당하자 분함을 못 이겨 자결하였다. 이러한 송씨부인의 순절은 의병의 분노를 자극하였으며, 영산강을 통해 내륙으로 진출하려는 왜구를 막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의 보평산전투는 왜구로부터 전남지방을 방어하는 큰 격전장이 되었다. 이듬해 왜병이 물러나고 박제의 처 송씨의 절의가 널리 알려져 나라에서는 1598년(선조 31년)에 정려를 내렸다. 아울러 마을 이름도 송씨의 높은 절개와 지조가 높은 고절리의 위 동네라 하여 잊지 않도록 ‘상고절’이라 하였다. 이 외에 현대의 인물로 박석민(전 역장), 김성훈(이학박사) 등이 있다.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보평산 정상은 만남의 광장이었다. 80년대까지만 해도 현경면을 비롯한 망운, 운남, 해제 심지어는 함평에서까지 많은 아낙네들이 추석을 전후해 음식을 가지고 이 산에 올라 송씨부인의 충절과 굳은 절개를 기리며 놀다 가곤 하였다. 주민들의 이야기로는 그때만 되면 이 산 일대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미기재
기타사항
외읍면 사무소가 있었으나 현재는 없다. 보평산 등산로에는 현재의 이장이 중심이 되어 20년 전 식재한 벚나무들이 있으며 봉우리에는 정자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