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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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절3리 무안읍 오리정 작성
  • 오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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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총 51세대, 인구 97명(남54, 여43) / 2025.12.기준.
자연마을 구성
「오리정」은 무안읍 북쪽 약 3km 지점에 위치하며 보평산 아래 자리한 마을이다. 「오리정」 뒤쪽의 「개설피(酉洞)」, 용월로 가는 오른쪽의 「새망몰래(새용동)」 등 세 개의 자연 마을이 함께 고절3리를 이루고 있다. 보평산을 등지고 자리 잡은 마을 앞으로는 「송씨천」이라 부르는 하천을 따라 군도(郡道)가 지나고 있으며 마을 뒤로는 무안읍 외곽도로가 지나고 있다. 「오리정」과 「새망몰래」 사이에 오리정 방죽이 있다.
지명유래
마을지형이 고양이 형국이어서 「괴설피」라 불렀으나 무안 현감이 이곳에 정각을 짓고 소일하므로 무안현과 오리(五里) 떨어졌다고 「오리정(五理程)」이라 하였다. 또한 「오리정」이란 마을 이름은 무안현에서 오고가는 손님을 접대하기 위해 오리(五里) 정도 떨어진 곳에 정자를 지었는데, 이 정자 주변에 마을이 형성되면서 붙여진 지명으로도 보인다. 그렇듯이 「오리정」이란 명칭은 조선조 때 관아가 있던 곳에서 한양 쪽으로 오리 정도의 거리가 떨어진 곳에 세운 정자(亭子)가 있는 곳을 가리킨다. 관아에는 중앙에서 오는 손님들도 많고, 중앙으로 가는 사람들도 많다. 그런데 관아에서 직접 이를 전부 접대할 수가 없어서 일정 정도 떨어진 곳에 정자를 지어 손님을 맞이하고 배웅하게 했다. 이런 필요에 의해서 지은 것이 오리정이다. 즉 오리정은 조선시대 양반문화의 한 유형을 볼 수 있는 시설이며 전국에 걸쳐 널리 있는 지명이기도 하다. 또한 예절을 숭상했던 우리 선조들의 삶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된 지명으로 「새망몰래」 마을에 사밑머리(삼현머리의 와전인 듯)라는 이름이 있다.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이곳에서 삼현육각을 곁들여서 잔치를 했던 곳이라 한다. 이러한 이유의 오리정이라면 오리정(五里亭)으로 써야 하는데, 이 마을은 오리정(五里程)으로 쓰고 있다. 주민들도 그 이유를 모르고 있다고 하면서 지금은 오리정(五里亭)으로 쓰면 좋겠다고 한다. 「개설피」란 지명은 풍수적으로 부르는 이름인데 마을이 고양이(괭이) 형국이어서 「괘설피」- 「개설피」- 「계설피」로 부르다가 계설피의 계(鷄)의 훈(訓)을 따서 「유동(酉洞)」이라 했다. 「새망몰래」란 이름은 「새터」에서 「새용동」으로 그리고 「삼현몰」(삼현육각을 치는 마을)로 변했다고 한다. 이 마을의 형국은 소 형국이어서 아늑한 분위기를 준다. 소가 복룡마을을 바라보고 있는데 오리정 방죽은 소오줌통에 해당한다고 한다.
마을형성(입향조)
《마을유래지》에 의하면 장흥고씨가 처음 이 마을에 들어 왔으며 고사준(高士準)이라는 사람이 1700년경 장흥에서 왔다고도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 보다 일찍 고응후(高凝厚), 선조 때 인물로 호는 지봉(芝峯))라는 사람이 광주에서 살다가 왜란 때에 의병으로 군량을 조달하며 참전한 뒤 고절리로 왔다고도 한다. 장흥고씨 고사종이라 하지만 주민들은 이를 알지 못하고 마을의 입향조가 인동장씨와 금령김씨였다고 한다. 입향 연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원래 이 마을은 마을 위쪽 개댕잇고랑(용월2리와의 사이에 5가옥 정도 있었던 곳)에서 시작되었는데, 그곳에 긴 짐승(뱀을 말함)들이 많아서 현재의 마을로 내려왔다고 한다.
풍수지리(마을형국)
풍수지리로 봤을 때 이 마을의 위쪽이 고양이 형국이어서 개설피라 칭한다. 그런데 마을에서 마주 보이는 무안읍은 쥐 형국이어서 쥐가 마음껏 활동하게 하려면 고양이를 보이지 않게 해야 했다. 해서 예전에는 풍수상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현재 용산 마을 앞에서 중들을 지나 닭삯골(산단산)과 차밭머리(현재 금광 아파트) 즉 한전 건물 있는 곳까지 울창한 숲을 조성하였다. 이른바 비보진압 풍수이다. 지금은 개발로 예전의 숲은 찾아볼 수 없으나 주민들의 의식 속에는 생생히 남아 있다.
마을성씨
혼합성씨 마을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마을 이름이 문헌에 나온 것은 1789년의 자료인 《호구총수》가 아닌 일제강점기 때 만든 자료에서 나온다. 즉 1912년에 나온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 오리정(五里程)으로 처음 나온 이후 현재까지 계속 오리정(五里程)으로 쓰고 있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추측컨대 우리 민족의 문화를 말살하기 위한 일본의 지명 조작이 아닌가 여겨진다. 왜냐하면 일본에는 이러한 접대 문화가 없으며, 1905년부터 자행된 일본인들의 우리 민족문화를 없애기 위한 문화침탈이 곳곳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행정구역 변경
본래 무안군 외읍면의 지역으로서 1910년에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상고절리」, 「오리정리」, 「병암리」, 「평촌리」, 「유동」을 병합하여 「고절리」라 해서 다시 무안군에 편입되었다. 현재는 무안군 무안읍 산하의 고절3리이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6.25 한국전쟁 때 마을 안팎에서 많은 피해가 있었으나 마을 사람들의 피해는 일체 없었던 이 마을은 60년대, 70년대까지만 해도 무안 신안에서 가장 앞서가는 마을 중 하나로 알려졌다. 마을에 있는 〈조합장 성재원 공적비〉의 내용을 보면 ‘주민들이 쉴 수있는 정자를 세우고 양어장을 설치했으며 마을 공동재산을 형성하여 마을 가꾸기에서 다른 마을의 모범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1970년 3월에 세운 비석이다. 유동(개설피) 마을에도 근래에 세운 〈전주최씨최재명공로비〉가 있다. 현재 주민들은 쌀, 양파, 마늘, 참깨 등의 농사를 주업으로 하고 있다.
주요시설
미기재
마을변화
현재의 「오리정」마을은 외지인이 많고, 「유동」과 「새용동」은 선주민이 많이 살고 있다. 최근 마을 내 공적비와 정려비 등 전통 유산을 관리, 보존함은 물론 「너나들이 마을학교」를 운영하여, 아이들과 주민들이 함께 배우고 교류하는 공동체 활성화 활동을 통해 마을에서 교육, 문화적인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동계, 부녀회, 노인회, 청년회
공동이용시설
마을회관, 마을창고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옛날 바닷물이 마을 앞까지 들어 왔을 때는 학다리 사거리까지 가서 게를 잡았다고 한다. 당시에는 마을 앞을 지나 매곡리 도산마을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현재도 마을 앞 논을 조금만 깊이 파면 뻘과 하얀 모래가 나올 뿐만 아니라 뻘 속에서는 두툼한 판자 조각 등도 많이 나온다. 산당산 앞에는 직경 15~20m, 높이 2m 정도의 커다란 무덤처럼 보이는 동산이 있는데 목포대학교 박물관에서는 고분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주민들은 풍수지리에 맞게 나주정씨들이 인위적으로 조성한 동산이라고 한다. 즉 산당산이 학의 형상이기 때문에 학의 먹이에 해당하는 우렁을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다른 주민들은 원래 마을 앞에는 이러한 동산이 세 개 있었는데 모두 큰물(홍수)이 지면서 형성된 모래톱들이라고 한다. 그러나 두 개는 없애버리고 나머지 한 개는 치우려 해도 나주정씨들이 치우지 못하게 해 그대로 놔두고 있다고 한다. 마을 뒤는 일명 새앙산이라고 부르는 거대한 무덤 군락지였다. 무안읍 외곽도로 공사를 할 때만 해도 수많은 고총들이 있어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동/식물
마을 앞에는 학의 모양을 하고 있는 나주정씨의 선산인 산당산(화표산이라 부르기도 한다)이 있다. 실제로 6.25 한국전쟁 전까지만 해도 이 산에 수많은 학들이 몰려와 살았으나, 한국전쟁으로 이 지역이 치열한 접전 지역이 되면서 현재의 상동마을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미기재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마을 뒤에 전주최씨 제각이 있다. 이곳에 최씨들이 묘를 쓰게 된 이유는 무안현감 유시남이 부임해 최씨들이 주민들로부터 하대와 홀대를 받고 있어 명당인 이곳 개설피(유동)에 묘를 잡아주었다. 그곳에 조상의 묘를 쓰고 난 후 최씨들의 신분이 바뀌었다는 그럴듯한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무안읍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길에 두 개의 비석이 있다. 하나는 한다리 건립에 관련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현감의 영세불망비이다. 한다리의 의미를 주민들은 ‘무안읍의 각 골짜기에서 모인 물이 한데 모여 흐른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알고 있으나 비문에 의하면 큰 다리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한다리(恨다리)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왜냐하면 임진란 때 왜구들이 보평산에서 진을 치고 있었는데, 무안지역의 사람들이 기습을 하려고 저녁에 보평산을 향해 가다가, 당시 목재다리였던 이 다리가 물에 떠내려가서 기습이 실패로 끝났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기 때문이라 한다. 비석은 마을로 들어가는 다리를 놓았다는 기념비이다. 비문에는 ‘대교서문외교동치원년(大橋西門外橋同治元年(1862) 시주 배봉인(施主 裵鳳仁)’이라 써 있으며, 길이는 1m 40cm, 넓이는 60cm 두께는 45cm이다. 또 하나는 현감 이홍원의 영세불망비로 길이는 1m 60cm, 폭 55cm, 두께 45cm이다. 언제 세웠는지 어떤 내용이 있는지는 비의 아래 부분이 묻혀져 있어 확인할 수가 없다. 또한 현감인 이홍원을 《무안군사》의 기록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설화
산당산에는 〈화표정〉이라는 나주정씨 재각이 있다. 4칸의 팔짝 지붕 형태인데 내부에는 14개의 현판이 걸려 있어 오랜 전통의 역사성과 가문이 번성했음을 과시하고 있다. 화표정을 지키는 사람들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이 재각에 사는 사람들은 떠날 때는 모았던 재물들을 모두 놔두고 떠난다고 한다. 왜냐하면 학이 공중으로 날아갈 때 뒷발을 흔들면서 가는 모습이 마치 모든 것을 털어버리고 가는 것 같아, 설령 재산을 모았다 하더라도 다 놓고 간다는 것이다.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김종철(전 무안읍장), 서삼석(현 국회의원), 정양수(전 전남도노인회장, 전 읍장)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미기재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미기재
기타사항
미기재

출처

각주
미기재
참고문헌
1. 《마을역사자료조사》(무안문화원, 2017) 2. 《마을유래지》(무안군, 1987) 3. 《무안군사》(무안군,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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