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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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촌1리 무안읍 경신동 작성
  • 경신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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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브 정보

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총 39세대, 인구 63명(남37, 여26) / 2025.12.기준.
자연마을 구성
미기재
지명유래
「경신동(京申洞)」은 교촌1리에 속하는 마을로 그 지리적 중요성으로 인하여 고려시대부터 역참이 있었던 마을이다. 역참(驛站)은 역과 참의 기능을 함께 하는 복합어로서, 중세시대의 교통통신 기관이다. 즉 역마(驛馬)를 갖추어 관리나 사신 왕래에 따라 마중 나가고 배웅하는 일과 접대를 돕고, 국가의 명령과 공문서의 릴레이식 전달을 담당하는 것이 역이고, 변경의 중요한 군사정보의 릴레이식 전달을 위해서 설치된 것이 참인데, 대개 같은 곳에서 일을 보았다. 이러한 역참제의 운영은 국가의 명령이나 공문서의 전달 등 행정적인 측면에서 중앙 집권 국가를 유지해 나가는 기능뿐 아니라, 군사 외교적인 측면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때로는 관방(關防)의 구실도 하였다. 이 마을은 고려시대에는 승나주도(昇羅州道)에 속하는 경신(慶新)역이었고, 조선시대에는 청암도에 속하는 경신(景申)역이었다. 무안에는 경신역 하나만 있었으며, 이 역에 딸린 원(院)이 망운면 성내리의 명탄원(鳴灘院), 청계면 구암 마을의 청계원, 그리고 조선 시대에는 함평 관할이었던 현경면 용정리의 옹산원이 있다. 하지만 경신동이란 마을 이름의 유래를 잘 아는 주민은 없었다. 그리하여 부분적으로 나오는 주민들의 의견을 정리해 보면 마을이 경신일(庚申日)에 이루어졌다고 하여 ‘경신동’이라 했다는 설과 경성을 가려면 이곳을 지나야 하므로 ‘경신동’이라 하였다는 설 등이 있다. 그렇지만 문헌을 보면 이미 오래 전부터 한자 표기는 다르지만 ‘경신’이라 쓰여 졌음을 알 수 있다.
마을형성(입향조)
오래전부터 교통의 요지로 사람이 모여 살기에 적합하였던 이 마을에 처음 입향한 이는 《마을유래지》에 의하면, ‘약 300여 년 전에 김해김씨 김광택(金光澤)이 영암 화수에서 옮겨와 정착하였고, 지세가 정승이 배출될 곳이라 하여 정승골로 불렸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풍수지리(마을형국)
이 마을은 역마산을 주산으로 하고 있다. 대체로 역마산은 역참이 있었던 마을에 있는 산인데 마을 주민들이 대단히 신성시 하는 산이다. 원래는 장애인 복지관이 있는 도산골에 마을이 위치하려 했다고 한다. 하지만 풍수적인 이유로 현재의 정승골에 안착하였다. 이는 마을의 뒷산인 역마산이 감방산의 줄기를 이어받아서 사람이 살기에 좋은 주위 환경이었기 때문이라고 추정된다. 고절리 방향에서 성내리와 경계점에 나주정씨들의 정자인 <화표정>이 있다. 주민들은 이 정자를 산당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닭 형국의 자리에 있다고 한다. 해서 앞에는 알(계란)이라고 부르는 동산이 있으며 이곳에서 용산마을까지 숲 둑이 조성되어 있었다. 닭삯골이라 부르는 이 둑은 고절리 유동 개설피의 고양이로부터 쥐 형국의 무안읍을 보호하는 풍수림이었다. 그런데 경지정리를 하면서 이 풍수림은 사라졌다. 주민들은 그때부터 무안 본토 사람들은 성공하지 못하고 외지에서 들어온 사람들이 성공한다고 믿고 있다.
마을성씨
복합성씨 마을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고려시대에는 「경신(慶新)」, 조선시대 초기에는 「경신(景申)」, 《호구총수》에서는 「역촌(驛村)」으로 바뀌어졌다가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외읍면 「경신동(京申洞)」으로, 1917년 《조선면리동일람》에는 외읍면 교촌리 「경신동」으로 쓰여지다 현재의 무안읍 교촌리 「경신동」으로 굳어진 것이다. 또한, 예전에 이곳은 정승이 많이 배출된다고 하여 「정승골」이라고도 불렀다.
행정구역 변경
현재 무안읍에 속한 교촌리는 원래 무안군의 외읍면 지역으로 1910년에 잠시 목포부로 편입되었다가, 1914년에 경신동을 포함한 7개 마을을 합하여 교촌리라 하여 무안읍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른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이 마을은 지리적으로 무안읍 1번지가 시작되는 곳이며 무안읍에서 제일 먼저 전기가 들어왔던 곳이다. 한때는 ‘무안의 서울’이라고도 불릴 정도로 발전이 기대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마을 앞에 군부대가 있었으나 지금은 매곡리 감방산 밑으로 이전해 가고 현재는 그 자리에 무안소방서가 들어서 있다. 소방서 뒤 잔등은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6.25 한국전쟁 때 옆 마을의 많은 사람들이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이곳에서 총살을 당한 현장이기 때문이다. 현재 주민들은 농업과 상업 등을 주업으로 살아가는데 주요 농산물은 양파, 마늘 같은 밭 작물이다. 수년 전에 마을 아래로 전통시장이 들어서면서 토지 가격의 상승은 물론 마을 발전이 한참 이뤄지고 있다.
주요시설
무안소방서, 장애인복지관, 폐차장, S오일 주유소
마을변화
조선시대 이전부터 역참인 경신역이 있었던 이 마을에는 근대에 들어서면서 역참이 폐지되고 쌀, 보리와 같은 농작물과 무안의 특산품인 마늘과 양파를 주 소득원으로 삼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인근에 무안전통시장이 들어오고 무안국제공항, 김대중대교 등이 생기면서 교통의 요지이자 확장하는 무안읍내의 도심으로 발전하고 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노인회, 부녀회, 동계
공동이용시설
마을회관, 경로당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미기재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남아있는 지명으로는 마을 건너 상사지 마을과 경계에 있는 ‘가장골’, ‘정승골’(‘장성골’로도 알려졌음), 현재 장애인복지관이 들어서 있는 도래산 줄기의 ‘도산골’, 그리고 ‘역마등’과 ‘닭삯골’ 등이 있다. 또한 예전 검문소가 있었던 자리의 뒤를 ‘싯돌묏가루’라 했으며 이곳은 인적이 없을 땐 혼자 다니기가 무서웠다고 한다. 상봉마을에서 넘어오는 고개를 ‘정승재’라 부르기도 했다. 도산골에 가마터가 있었으며 마을 앞들을 ‘삼밖들’이라고 한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지난 1999년 무안읍 우회도로 사업 시 마을 옆(무안읍 교촌리 471번지)에서 고분이 발견되었다. 이 고분은 너비 5~9m의 도량을 가진 저변길이 33-37, 높이 4m의 방형계 고분이었다. 도랑에서는 고사리 모양을 한 기대편, 삼족토기편과 백제토기편 등이 출토되어 영산강 유역 고대사회와 백제의 관계를 파악하는 중요한 자료들이 발굴되었다. 또한 주변 유구로는 도랑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석곽묘가 확인되었고 석곽 내부에서 발형 토기가 출토되었다. 또한 주변을 정리하면서 회청색경질의 호형토기편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2001년 9월에 ‘무안 고절리 고분’으로 문화재자료 225호로 등록되었다. 이러한 유물 등으로 추정컨대 백제시대 이전부터 커다란 세력이 이곳에 살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와 관련해서 영산강 유역 고대사회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를 발견한 것으로 판단된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임행규(전 면장), 김봉근(전 면장), 문종현(전 면장), 김덕천(전 면장), 김영주(군의원) ,김대현(군의장)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미기재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미기재
기타사항
미기재

출처

각주
미기재
참고문헌
1. 《마을역사자료조사》(무안문화원, 2017) 2. 《마을유래지》(무안군,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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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