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촌2리에는 두 개의 마을이 있는데 「평치」마을과 「송림」마을로 잔등을 사이에 두고 형성된 마을이다. 「평치」마을은 「송암」마을이라고도 하며 광명아파트 뒤에 있고, 「송림」마을은 「서운내」마을이라고 하며 한전 사무실 앞에 있다.
지명유래
「송림」이란 마을 이름은 울창한 소나무 숲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조선 중기 이곳에 <송림서원(松林書院)>이 들어섰다. 무안군에서 발행한 《마을유래지》에도 마을 주위에 소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졌다하여 ‘송림(松林)’이라 칭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다른 이름인 「서운내」는 서원이 있었다 해서 당초에는 「서훈(書訓)」이라고 불러 왔으나 일제강점기 때 지금의 「서운내(西雲內)」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 이름은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이름인데 일본인들이 서원을 발음하지 못해 ‘서우내 서우내’ 하던 것이 지명으로 변한 것으로 추정된다.
마을형성(입향조)
무안군에서 발행한 《마을유래지》에서는 이 마을에 처음 들어온 성씨로 탐진최씨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주민들은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현지에서 최씨들의 흔적을 찾아볼 수는 없었으며, 현재 살고 있는 성씨로는 지씨, 안씨, 노씨, 양씨 등이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마을의 풍수적 지형이 와우형(臥牛形)으로 소의 배에 해당되고 오른편의 한전 주변은 소의 밥통에 해당되는데 원래 그곳에 ‘불무저수지’의 수문이 있었다. 이처럼 와우형 지형에 소의 배와 밥통이 명확하게 형성되어 있고, 특히 밥통 자리에 물을 관리하는 수문까지 있는 마을의 풍수지리적 의미는, 안정적인 부의 축적과 자손 대대로 이어지는 번창이 이루어지는 귀한 터라고 하겠다.
마을성씨
복합성씨 마을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유시남 현감이 이 마을의 이웃인 「송림」마을에 서원을 설치하면서 수문을 현재의 불무다리로 옮기고 이곳에 길을 내었다. 그러면서 「송암」이란 지명을 쓰지 않고 현재의 「평치」마을로 쓰게 하였다. 1789년의 자료인 《호구총수》에는 「송림」마을이나 「서운내」마을 그리고 「평치」마을은 나오지 않고 「송암」마을이란 지명만 나온다.
행정구역 변경
원래 무안군의 외읍면 지역이었던 무안읍 교촌리는 1910년에 잠시 목포부로 편입되었다가 1914년에 ‘서운내/송림’을 포함한 7개 마을을 합하여 교촌리라 하여 무안읍에 편입되어 현재에 이른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무안읍 외곽에 위치한 「송림/서운내」마을은 조선시대 사액(賜額)을 받은 송림서원을 중심으로 한 유교적 학문 및 교육의 중심지이자, 농업에 기반한 전통적인 농촌공동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서원과 함께 하는 서원촌(書院村)을 중심으로 주민들이 학문과 농업을 조화롭게 이어가던 역사적, 문화적으로 의미 깊은 성격의 마을이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 이르러 송림서원이 철폐되면서 농업을 주로 하는 농촌마을로 되었다가 이후 무안읍내가 확장하고 발전하면서 도심 근교의 전원마을로 형성되었다. 따라서 농업과 상업을 중심으로 정주형 교외마을로 기능하다가, 지금은 텃밭 중심의 소규모 농사를 짓는 주민들 이외에는 대부분 무안 읍내 쪽으로 형성된 상가를 중심으로 상업활동을 주로 하고 있다.
주요시설
명진아파트, 무안어린이집, 농협, 지인조경
마을변화
현재 이 마을 주민들은 마을이 개발된다는 소식은 물론 실제로 개발되는 상황에 들떠 있다. 평치 잔등에 260여 세대의 아파트가 들어설 예정이라는 오래된 개발 소식과 더불어, 최근 들어선 무안농협 본부와 대형 하나로마트 등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처럼 마을이 개발되는 것은 좋지만, 아쉬운 것은 개발 전후로 주민들과의 협의와 연대를 통하여 진행된다면 훨씬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까 여겨진다. 현재 무안읍내와 가까운 교외의 전원마을로서의 여건이 충분한데다가 주민들이 노령화되어 농촌마을로서의 기능은 거의 상실한 상황이어서, 주민들이 거주할 수 있는 공동체 주거 기능을 가진 전원마을로 발전하면 좋겠다는 바람을 주민들이 가지고 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동계, 노인회, 부녀회
공동이용시설
마을회관 겸 경로당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내고장 전통가꾸기》에서는 ‘시남제(市南堤)’가 있었다고 하나 확인할 수 없었다. 기록에는 ‘이 저수지는 무안읍성의 북쪽에 있는 제방인데 1646년에 무안현감이었던 시남 유계(市南 兪棨, 1607~1664)가 무안읍 터의 북방이 낮아 허(虛)하다 하여 제방을 쌓았다 하는데 지금은 전답으로 되어 그 흔적은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추정컨대 닭삯골의 풍수림이 아닌가 여겨진다. 이는 즉 개설피의 형국과 무안읍의 형국이 서로 상극이어서 이를 보하기 위해 나주정씨의 제각인 <화표정>에서 「용산」마을까지 있었던 제방을 말한다.
동/식물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일제강점기까지는 마을 주위에 아름드리의 소나무가 많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일본인들이 상봉마을 뒤 병산에 방공호를 짓기 위해서 많이 베어가 버렸다고 한다. 또한, 1970년대까지만 해도 「송림」마을 앞 한전 사무실이 있는 곳에서 금광아파트까지 소나무 숲과 함께 차밭이 형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주민들은 이곳을 ‘차밭머리’라고 불렀는데, 이는 일본인들이 일제강점기에 차(茶)나무를 많이 심은 데서 비롯된 말이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미기재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평치」마을엔 마을 입구에 있었던 우물 주위에 두 그루의 당산나무가 있었으나 현재는 한그루만 남아 있으며, 현재 우물도 메워 버렸다. 또한 「송림」마을에도 한 그루의 당산나무가 남아 있다. 두 마을의 당산나무 모두 마을의 형성과 함께 심어진 것으로 보이나 관리 소홀로 죽어가고 있다. 이를 통해 두 마을 공히 당산나무를 중심으로 당산제를 지냈을 것이며 또한 송림서원에서 각종 제향 등이 진행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유물, 유적
<송림서원>은 현재 교촌리 2구 339-4번지에 위치했었다. 지목은 대지로 되어 있으나 현재는 대밭 사이에서 잡초만 우거져 있다. 지금도 주변의 밭을 파 보면 구운 기와들이 많이 나온다고 한다. 마을 이장은 그곳에 <송림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하나 <송림서원(松林書院, 1647~1868)>을 ‘사찰’로 잘못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마을은 송림서원에 부속된 원촌으로 형성되어 왔을 것으로 보인다.
이 서원은 1646년에 무안현감이자 평치마을에 거주했다고 이야기되는 유계(호-市南, 1607~1664)가 김권(金權, 조선 중기 문신, 유학자. 자-이중(而中), 호-졸탄(拙灘), 시호-충간(忠簡), (1549~1622))을 제향하기 위하여 창건하였으며 1682년(숙종 5년)에 왕으로부터 사액을 받았다. 이후 1706년(숙종 32년)에 지역 유림들의 의견을 따라 유계를 서원에 추배했다. 그리고 1868년(고종 5년)에 훼철된 이후 지금까지 잊혀졌다. 무안지역에는 이 서원을 포함하여 주자와 송시열을 배향한 <창주서원>이 있었다.
또한 이 마을에는 선사시대 유물인 고인돌이 있다. 현재 정차실 씨 댁 뒷밭에 두 개의 고인돌(각각 320×210cm, 높이 90cm, 260×180cm, 높이 60cm)이 있는데, 그 돌 주위에 소나무가 우거져 있어서 「송암」이라는 지명이 붙었다고 전한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졸탄 김권은 성혼의 문인으로 1617년 광해군의 폐모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무안으로 유배되어 왔으며 이곳에서 죽었다. 후에 시호를 충간, 영의정에 추증되었던 인물이다. 또한 시남 유계는 당대의 명사(名士)로 무안에 재임하는 동안 주민들의 사기를 진작시켰고 몽탄의 식영정, 청계의 화설당 등 곳곳에 그의 흔적이 남아 있다. 또한 그와 교유했던 이 지방 인물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다. 이조판서를 역임하고 문충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여사제강』 등의 저술이 있다.(무안군 문화유적이나, 마을유래지, 무안군사 등은 송림서원의 건립연도를 1626년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이는 잘못된 기록이다. 1626년이면 시남 유계가 관직에 나가지도 않은 시점이다. 이러한 사실은 국사편찬위원회 자료실이나 《연려실기술》 별집 4 – 서원(書院) 조에서 확인할 수 있다)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동학농민혁명 때 무안지역의 동학군들을 불살라서 죽인 역사적인 곳이기도 하다.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관군들이 동학당 들을 마치 떡 시루처럼 포개어 쌓아 놓고 태워 죽였다’고 한다. 또한 그 불은 사흘 동안이나 타고 있을 정도로 오랫동안 탔으며 냄새가 너무 심하게 나 주변 사람들이 나 다니기가 힘들었었다고 증언한다. 특히 6.25 한국전쟁 때도 많은 사람들이 죽었던 현장이기도 하다. 마을 이장의 증언에도 ‘자신이 어렸을 적 마을 뒤, 예전 군부대가 있었던 곳의 뒷산에서 사람 뼈가 많이 나왔었다’고 말하고 있다.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미기재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이 마을에 있었던 <송림서원>은 우리 지역에서 유일한 사액서원(賜額書院-임금이 지어주고 서적(書籍), 노비(奴婢), 토지(土地)등이 하사(下賜)된 서원)이었으나, 조선시대 후기인 대원군 시절에 훼철되어 지금껏 복원되지 못하고 있다. 아직 서원 터와 구체적인 기록 등이 남아있는 만큼 시급한 복원이 이루어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