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교(鄕校)가 있는 마을로 교촌3리에 속하며 원래 유산동, 백동, 향교마을이 합쳐져서 「향교」마을이라고 했다. 이 마을에는 조선시대 교육기관인 향교를 포함하여 전 무안고등학교, 무안북중학교, 공공도서관, 무안교육청 등 교육과 관련된 시설이 많이 있다.
이 마을은 뒤로는 비봉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비봉산의 맥을 타고 향교가 들어섰으며, 근대에 와서는 무안고등학교와 무안북중학교 그리고 교육청을 포함한 교육청 산하의 무안공공도서관이 자리하고 있다. 그 맥의 끝자락인 난산(卵山)에는 무안박씨의 정자인 ‘유산정’과 ‘면남정사’가 있으며, 또한 무안지역 단위의 마을에서는 가장 많은 4개의 교회가 있다.
지명유래
《마을유래지》에는 ‘노승이 마을지세를 보고 수목이 울창하고 양지바르니 향교(鄕校)를 세우면 대성할 것이라고 예언하자 향교가 건립되었고 마을이름도 「향교」라 불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무안향교가 있는 마을이여서 「향교」로 불린 이 마을을 구성하는 자연마을인 「백동」은 동백나무가 많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며 「서모실」, 「웃골」 등의 지명도 있다. 또한 향교를 중심으로 서쪽은 「성동지」 동쪽은 「동동지」라고 부르기도 하며, 마을회관의 표지석에는 이 세 마을의 이름 한자씩을 따서 「향유동」마을이라고 기록하고 있기도 하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이 언제 형성되었고 입향조가 누구인지 자세하지는 않다. 하지만 무안군에서 발행한 《마을유래지》의 기록에는 ‘김해김씨, 경주김씨, 탐진최씨 등이 마을을 형성했다’라고 하나 이하 세부내용은 근거부족으로 확인할 수 없었다.
풍수지리(마을형국)
이 마을에는 두 개의 풍수 지형이 존재한다. 삼태기(조리 혹은 키)형국과 배(行舟形)형국이다. 키 형국의 지형은 향교 안쪽의 마을로 마치 키처럼 오목하게 들어가 있는 모습이다. 예전에는 바람이 불면 그 안의 곡식(재물)이 날아간다고 하여 뒷산인 비봉산이나 날개의 역할을 하고 있는 둔덕의 주변에 나무를 베지 못하게 하였으나, 일제강점기 이후 이러한 지킴이 지켜지지 않고 개발이 이루어져 과거의 울창했던 송림은 찾아볼 수가 없다.
마을성씨
복합성씨 마을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향교」마을 이전에는 유산동, 백동 등의 지명으로 불리었다. 우리나라 마을 이름들은 대체로 성(城)이 있으면, 성내리, 성동리 등으로 불리며, 향교가 있으면 교촌리, 향교리 등으로, 새로 만들어진 마을이면 신촌, 신기, 신흥 등으로 불리는 특성을 가진다.
행정구역 변경
원래 교촌리가 속한 무안읍은 백제시대에 물아혜군, 신라시대에 면주, 고려시대에 무안군, 물량군, 면성군이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외읍면의 일부인 읍내면에 속했다. 1931년에 면성면으로 그리고 1957년에 무안면, 1979년에 무안읍으로 승격하여 이에 속한 교촌3리 「향교」마을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마을에는 공동행사가 많이 있다. 어버이날이나 백중날은 물론이고 명절 때에도 주민들을 위한 위안 행사가 자주 있다. 백중날에는 샘의 물을 퍼내고 청소하기도 한다. 특히 마을에 상사(喪事)가 났을 때에는 출향인들까지 모두 찾아와서 일을 거들고 아픔을 같이 나누기도 한다. 정월 보름에 마을의 평안을 위한 당제가 지금도 열리고 있다. 주민들의 주업은 농업과 상업 등이다.
주요시설
무안향교, 무안북중학교, 공공도서관, 전 무안고등학교(다목적 체육관 예정), 목화성교회, 비전광림교회, 샘물교회, 무안교육청 등
마을변화
「향교」마을은 최근 이전한 무안고등학교와 함께 이후 무안공공도서관 등의 이전을 앞두고 있어서 여기에 각종 주민 친화형 문화기반시설이 들어설 예정이다. 따라서 기존의 도심 인근의 전통적인 농촌마을에서 무안향교라는 역사적 자원 등을 활용한 문화적인 마을로의 전환을 요구받고 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동계, 부녀회
공동이용시설
마을회관, 경로당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비봉산(飛鳳山)은 면성지의 기록에 따르면 무안에서 제일 아름다운 산으로 병산의 한 자락이라고 했다. 비봉산 머리에 <성묘(聖廟, 곧 文廟>-공자를 모신 사당)가 있고, 산의 남쪽 한돈대미가 있어서 계란 모형과 방불함으로 사람들이 말하기를 난산(卵山)으로도 불렀다고 한다. 이른바 <유산정(遊山亭)>을 말한다.
그리고 배 형국의 지형은 현재 비봉산에서 무안북중을 거쳐 유산정으로 흐르는 맥(脈)을 말하는데 노르매 또는 놀으매(遊山)로 불리는 곳으로 이곳이 마치 물위에 떠있는 배의 모습이라 우물을 파지 못하게 하였다. 만약 이런 금기 사항을 어기고 우물을 팠다하면 마치 배의 밑창을 뚫는 것과 같다하여 마을이 망하게 된다는 속설이 있어 파지 못하고 향교 마을의 우물에서 물을 길러 생활했다고 한다. 예전에는 배 형국의 이곳이 「유산동」이라는 마을이었다.
주민들의 이야기로는 일제강점기까지만 해도 비봉산에 초분(草墳 - 시신을 땅에 바로 묻지 않고 관을 땅 위에 올려놓은 뒤 이엉 등으로 덮어 두었다가 2~3년 후 뼈를 골라 땅에 묻는 장례 풍습)이 있어서 어린아이들은 저녁이 되면 무서워서 밖으로 나다니지 못했다고 한다. 또한 마을 뒤에서는 주춧돌로 여겨지는 큰 돌이나 기와조각 등이 발견되고 있어 옛날에 이곳에 큰 절이 있었지 않은가 하고 추정하고 있다. 또한 일봉아파트나 광명아파트 등의 기초공사를 할 때 조금만 깊이 파들어 가면 뻘땅이 나오고, 가끔은 배(船)의 잔해로 여겨지는 판자조각 등이 발견되어 예전에 이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던 지역임을 보여주고 있다.
동/식물
「송림」마을에서 향교까지 숲이 우거져 있어 ‘숲밖에’라고 불리는 지명도 있다. 예전에는 소나무를 비롯한 나무들이 우거져서 아름다웠을 줄 모르나, 현재는 개발로 나무들이 없어져 예전의 흔적은 찾아 볼 수가 없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향교 뒤를 잔솔만 남아 있다 해서 ‘잔솔이재’라 부르며 구세군교회 주변을 ‘대통치’라고 부르기도 했다. 마을 가운데 ‘자급장’이라는 지명이 있으나 그 유래는 알 수 없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향교석전제(鄕校釋奠祭)’는 매년 봄ㆍ가을에 유림, 지역주민, 학생들이 참여한 가운데 공자를 비롯한 성현에 대한 추모제례를 거행함으로써, 옛 조상들의 생활풍습과 점차 퇴색해가는 충효정신을 재현해 주민들의 애향심과 자긍심을 고취하고 있다. ‘석전제’란 음력 2월과 8월의 상정일(上丁日; 다달이 첫째 드는 정(丁)의 날)에 공자를 모시는 사당에서 지내는 제사를 말하는데, 대성전 내에는 5성과 4현 그리고 우리나라 18현의 위패를 봉안하고 춘추로 제사를 지내고 있다.
또한, 이 마을의 당산제는 널리 알려져 있다. 매년 정월 보름이 되면 마을 뒤 천룡이라 부르는 곳에 있던 동동지의 당산하네에서 시작하여 샘 옆의 당산할멈까지 이어지는 제의는 마을의 역사를 자랑하는 행사였다. 그러다 동동지가 없어지면서 현재는 당산할멈만 있는 마을 가운데 샘에서만 지낸다.
그리고 기록에 따르면 국토의 신과 오곡의 신, 두 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제단인 <사직단(社稷壇)>이 향교의 동쪽에 있었으나 현재는 찾아볼 수 없다. ‘사직제’는 매년 맹춘(정월) 상신일에 ‘기고제’(그해 풍년을 비는 제), ‘중춘’(음력 6월), ‘중추’(음력 8월) 상무일, ‘납일’(음력 12월 8일)에 걸쳐 네 차례 거행되었으며, 가뭄에는 ‘기우제’, 비가 많이 오면 ‘기정제’, 눈이 오지 않으면 ‘기설제’를 지냈다. 또한 ‘사직제’는 ‘혈제(血祭)’라 하여 제수에 돼지머리나 양머리를 날것으로 봉헌했다. 이 사직단은 개화사상의 대두와 함께 없어졌다.
유물, 유적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역사를 가지고 있는 <무안향교>는 1394년 공수산(현재 남산)의 속칭 범바위골(범산골이라고도 함)에 창건하였다. 그러다가 향교에 출입하는 유생들이 매년 호랑이에게 죽임을 당하자 1470년에 지금 자리로 이전하여 재 창건하였으며, 당시 예전에 있었던 <홍전문>, <양사재>, <사마재>, <무학당> 등은 이전에 제외되면서 사라졌다. 전남유형문화재 제114호(1985. 2. 25)로 지정되었으며,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 노비, 책 등을 지급받아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1894) 이후에는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 · 가을에 향교석전제만 지낸다.
향교 입구 외삼문 옆에는 <무안삼강문>이 있다. 이곳에는 이 지역 출신으로 역대 충신, 절의, 효자, 효부, 열부의 명단이 새겨진 세 개의 판각문과 삼강비가 있다. 1927년 김순형, 박기신, 정병인, 박민화 등이 주민을 교화하여 아름다운 풍속을 이루기(化民成俗) 위하여 현재의 무안북중 앞에 건립하였는데, 1968년 당시 전교이던 박석환이 이곳으로 옮겨 와 중수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맞배지붕으로 시멘트 구조물이다. 삼강문에 들어서면 <박석환 기적비>, <중건비>, <삼강비> 등 세 개의 비석이 있으며 안에는 세 개의 판각문이 있다.
삼강문 옆에는 <하마비>가 서 있는데 이 비석도 삼강문이 옮겨질 때 같이 옮긴 것이다. 이 비에는 ‘대소관원하마(大小官員下馬)’란 글귀가 쓰여 있다. 하마비 주변에 있었던 <하마석>은 현재 무안북중학교의 교정에 있는 ‘성실한 하루’란 표지석이 되어 있다. 원래 향교 입구에 있었던 무안현감, 무안군수의 <선정비> 및 <공덕비>는 1945년에 성남리 남산공원의 입구로 이전하였다.
또한, 이 마을에는 빼놓을 수 없는 유적이 또 하나 있다. <유산정(遊山亭)>이다. 유산정은 고려시대 문신으로 홍건적을 토벌한 면남 박문오(朴文晤)공이 말년을 보내기 위하여 지은 정자로 유산8경을 노래할 정도로 주변 풍광이 수려했다. 지금은 정자 앞의 방죽도 메워지고 아파트가 들어서 시야를 가렸지만 정자 안에 걸려있는 11개 현판의 글귀를 보면, 그 빼어난 절경을 가지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정자 앞에는 면남공이 유산정을 건립하게 된 내력과 그의 생애, 유산정의 연혁을 기록한 <무안유산정 유적비>가 있으며 얼마 전에 무안박씨 문중에서 세운 <중수비>도 함께 있다. <유적비>는 1896년에 건립하였으며, 글은 면암 최익현 선생이 지은 비문으로 역사성과 향토문화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인정받아 2004년 문화재 자료로 지정 받았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무안향교에 수많은 한문 서적과 문헌 등이 보관되고 있으며 이를 인문학 활용 및 보존 차원에서 국역, 온라인 아카이브 등이 시급한 현실이다.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백창석(전 문화원장), 문만식(현 조합장)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무안에서 제일 아름다운 비봉산 자락인 난산에 유산정과 향교를 품고 있는 이 마을의 자연경관은 자연과 인문학이 조화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유산정 등이 만들어내는 인문 경관은 유산정 8경(遊山亭 八景)의 ‘행단시우(杏壇時雨)와 송오반학(松塢返鶴)’ 같은 시구에 그대로 담겨있다.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옆 마을인 교촌2리 「송림」마을은 우리 지역에서 유일하게 사액서원(賜額書院-임금이 지어주고 서적(書籍), 노비(奴婢), 토지(土地)등이 하사(下賜)된 서원)인 송림서원이 있었는데 대원군 시절 훼철되어 지금껏 복원되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