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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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촌4리 무안읍 중사지 작성
  • 중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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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브 정보

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총 30세대, 인구 73명(남40, 여33) / 2025.12.기준.
자연마을 구성
「중사지」마을은 교촌리의 중앙 부분에 있는 비봉산을 주산으로 형성되어 있는 「깡골」과 「횟골」 그리고 「분토골」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졌다. 여기에서 ‘횟골’이나 ‘분토골’은 질 좋은 질흙이 나온 데서 비롯된 지명이며, 이 마을은 예전에 망운, 현경, 해제에서 무안읍으로 들어오는 길목이었기 때문에 많은 일들이 있었다. 또한, 비봉산 자락에는 작은 산들이 많이 흩어져 있어서 6.25 한국전쟁 당시에는 무안읍 사람들의 상당수가 학살을 당했던 지역이기도 하다.
지명유래
「중사지(中沙池)」란 마을 이름은 「상사지(上沙池)」란 이름과 함께 못샘(沙池)에서 비롯된 것이다. 마을 앞에 수량이 많고 물맛이 좋기로 이름난 샘이 있는데, 이 마을 주변의 토양이 사질토(沙質土)로 모래가 많고 물이 잘 흘러나와 모래사(沙)자와 못지(池)자를 써서 사지(沙池) 또는 못샘이라 불렀다. 이 못샘의 중간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중사지(中沙池)라 하고, 못샘의 위쪽에 있다 해서 상사지(上沙池)라고 한다. 하지만 이와 달리 《마을유래지》에서는 ‘고승이 마을을 지나가다 못샘에서 솟아오르는 물구멍을 지팡이로 찔러 물을 막았다고 하여 그렇게 부른다는 얘기가 전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마을형성(입향조)
정확한 마을 형성 시기나 세부적인 입향조 등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무안군에서 발행한 《마을유래지》에는 ‘여양진씨가 처음 터를 닦았으나 후손이 없자 그 후 광산김씨와 김해김씨가 입향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주민들은 잘못 알려진 사실이라고 한다. 사실은 이천서씨가 먼저 들어오고 그 뒤에 광산김씨가 들어왔다는 것이다. 현재 광산김씨 문중에서 14대조까지 제사를 모시고 있다 하니 400여년 보다 훨씬 전에 마을이 형성되었음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입향조로 추정되는 이천서씨는 당시 얼마나 세도가였던지 집을 둘러싸고 있는 방위를 인위적으로 만들기도 하였다고 한다. 또한 이 마을에는 ‘안 진사’라는 사람이 살기도 했는데, ‘안 진사’는 인근 사람들에게 워낙 세도를 부려 마을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못살게 굴기도 하였다고 한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마을 이름의 유래가 된 못샘은 병산과 비봉산 그리고 해남윤씨, 나주임씨 문중산 등의 맥(脈)이 모여서 이루어진 샘으로 무안의 대표적인 샘 중에 하나이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못샘의 물줄기가 너무 세어 한번 분출이 되면 마을 앞 안산을 넘어서기도 하고, 초당대 뒤의 동학골로 연결되면서 무지개를 형성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해서 물줄기를 그대로 놔두면 무안이 물바다가 되어 마을이 형성될 수 없다는 말이 전해져 주민들은 이 물의 피해를 막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강구했다. 그 중에서 지나가는 고승(高僧)이 지팡이로 또는 나무못을 만들어 물구멍을 막았다는 이야기도 있고, 주민들이 구리를 녹여서 물구멍에 부어 물줄기를 줄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는 물론 비보풍수의 한 사례라고 하겠다.
마을성씨
복합성씨 마을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미기재
행정구역 변경
현재 무안읍에 속한 교촌리는 원래 무안군의 외읍면 지역으로 1910년에 잠시 목포부로 편입되었다가, 1914년에 「중사지」마을을 포함한 7개 마을을 합하여 교촌리라 하여 무안읍에 편입되어 현재에 이른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중사지」마을은 다양한 교육 및 문화시설이 많은 「향교」마을과 상호 연관되어 있어 오랜 동안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음은 물론, 이러한 교육적이고 문화적인 분위기 속에서 주민들의 삶이 영위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주민들은 전통적인 농업을 주업으로 쌀, 보리, 양파 등의 전통적인 농작물을 재배하였으며, 특히 마을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풍부한 물과 질 좋은 황토로 하여 무안의 특산물인 양파와 고구마 등을 활발하게 경작하여 풍요로운 농촌마을을 이루어 왔다.
주요시설
카페띠아모
마을변화
원래 전통적인 농촌마을이었으나 최근 편리해진 교통 여건과 기술 발달 덕분에 농업 방식이 현대화되면서 기존 작물 외에 딸기와 같은 시설 원예 작물 재배가 활발해졌다. 또한, 교촌리 일부를 포함하여 최근 이전한 무안전통시장은 물론 무안읍 도심부 그리고 전남도청 신도심 등과 가까워지면서 농산물 유통 및 판매에 유리한 지리적 이점이 확충되었다. 이를 통해서 주민들의 주요 소득원이 확충됨은 물론 주민들의 삶이 전통을 유지하면서도 현대적 변화를 수용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부녀회, 노인회
공동이용시설
마을회관, 경로당, 동각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어렸을 때 못샘과 함께 시절을 보냈던 주민들은 ‘못샘의 물은 여름에는 발이 시릴 정도로 차가워 땀띠를 제거하기도 하고 겨울엔 뭉게뭉게 김이 어릴 정도로 따뜻한 물이 나왔다’고 한다. 또한 물이 나오는 입구에는 모래가 둥그렇게 포말을 그리면서 끊임없이 콸콸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여름이 되면 위에는 여자, 아래는 남자들이 목욕하는 주민들의 야외 목욕탕이 되기도 하였다. 물이 얼마나 잘 나왔든지 가물 때에는 주민들이 물을 길어다가 읍내에서 팔기도 하였다고 한다. 현재 이 물은 인근 목욕탕의 용수로 쓰이고 있다.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남아있는 지명으로 ‘갯등치’가 있다. 이곳은 항상 물이 나오는 곳으로 앞에 있는 해남윤씨 산이 남성이고 이곳은 여성을 가리키는 곳이라고 한다. ‘치가리’는 마을 앞들을 말하는데 칡넝쿨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리고 뒷매, 대청동, 대청골, 단보랭이(안산의 모퉁이)이가 있다. 그 외에 마을을 둘러싸고 횟골, 관골, 쇠골, 창골, 봉골, 오얏골, 밤나무골 등이 있고 상봉, 중봉, 시루봉, 주치봉 등 12봉이 있다. ‘앞공동뫼’는 마을 앞에 있는 등성이를 말하며 ‘뒷공동뫼’는 「상사지」마을 뒤에 있는 등성이를 말한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마을에서는 매년 정월 열 나흗날에 당산나무에 제를 모신다. 도제 또는 당제라고도 부르는 당산제는 마을의 안녕과 한해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는 의식이다. 제를 모실 사람은 반드시 못샘 물로 목욕재계를 해야 하며 제일(祭日)이 정해졌는데 마을에서 아이를 낳거나 상을 당한 경우에는 제일(祭日)을 변경하여 치른다. 제를 지내고 나서 소지(燒紙- 不淨을 없애고 신에게 소원을 빌기 위하여 흰 종이를 태워 공중으로 올리는 일)를 하는데 그때 마을 주민들의 이름을 쓴 종이를 태우며 각자 1년의 행운을 기원하는데, 태운 종이 상태를 보고 그 집안의 길흉을 점치는 풍습이 남아 있다. 즉 종이가 잘 타서 하늘로 올라가면 그 집은 평안하고 종이가 꺼멓게 타고 올라가지 못하면 안 좋은 일이 생긴다는 것 등이다.
유물, 유적
마을 앞 잔등을 「국실」이라고 한다. 국실 너머에는 절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그 주위에 공동묘지가 형성되어 있다. 상여가 공동묘지를 가려면 마을 앞을 지나 국실 잔등을 넘어가지 못하고 반드시 돌아서 가야한다고 한다. 「상사지」마을과 경계가 되는 나주임씨 문중산이 끝나는 곳을 ‘평산등’이라 한다. 그곳은 사두혈(蛇頭穴)이어서 명당으로 불렸는데 마을 앞 들판에 있던 ‘두꺼비바위’가 경지정리 하면서 묻혀지는 바람에 명당의 기운이 사라졌다고 한다. 그런 이유인지는 몰라도 그때부터 나주임씨들이 제를 지내려 찾아오는 횟수가 점차 줄어들었다고 한다. 그곳에 나주임씨 제각이 있는데 지금은 거의 형체를 찾아볼 수가 없다.
설화
못샘 옆에 수형이 잘 잡힌 할멈 당산나무가 있다. 몇 년 전까지는 영감 당산나무까지 있었으나 말라 죽은 후로는 한그루만 자라고 있다. 이 나무에는 새가 잘 깃들이지 않는데 주민들은 나무가 영험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해마다 잎이 무성하게 자라는데 어쩌다가 북쪽에서만 먼저 잎이 자라는 때가 있다. 그러면 그때는 마을에 풍년이 깃든다고 한다. 반대로 남쪽에서 먼저 잎이 나면 그해에는 흉년이 든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특히 아기를 낳지 못하는 가정에서는 이곳에서 기원을 하면 반드시 대답이 있었다고 한다.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미기재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이 마을은 망운, 현경, 해제에서 무안읍으로 들어오는 길목으로 때문에 예전에는 많은 일이 있었다. 동학 봉기 때는 주민 중 ‘김진미’란 사람이 활동할 정도로 동학군의 이동로가 되었고, 6.25 한국전쟁 때는 망운 사람들이 100여 명이 넘게 피난 와서 마을에서 숨어있기도 한 피난처이자 피난길이기도 하였다.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미기재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마을을 가로지르고 있는 가운데 골짜기를 ‘횟(灰)골’이라고 한다. 석회의 맥이 「상사지」마을 앞 국실까지 연결되었는데, 한때는 도자기업자가 이 회를 이용하기 위하여 채취하기도 했으나 성분이 달라서 포기했다고 한다.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미기재
기타사항
미기재

출처

각주
미기재
참고문헌
1. 《마을역사자료조사》(무안문화원, 2017) 2. 《마을유래지》(무안군,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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