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봉」마을은 무안읍에서 상사지를 지나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가면 나오는 아늑한 마을로 병산을 주산으로 한 소쿠리형의 지세를 갖고 있다. 마을 입구에 지금은 폐사가 되어버린 ‘곰농장’이 있었고 그 옆에 상수도 가압장이 있다. 또한 마을 앞으로는 무안읍 외곽도로가, 마을 왼쪽으로는 무안-해제 간 지방도로가 지나고 있어서 어디서나 접근 가능한 지리적으로 좋은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지명유래
무안군에서 펴낸 《마을유래지》에 의하면 ‘상봉산 밑에 있는 마을로 서쪽에는 영산이 있는데 산의 형상이 미치 봉이 날아가는 형국이라 하여 「상봉(上鳳)」이라 하다가 일제강점기에 「상봉(上峰)」으로 바뀌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의 입향조는 진주정씨이다. 진주정씨의 입향조는 치암 정현우(恥菴 鄭賢宇, 1589~1659)이다. 공의 아버지 정돈수(鄭敦秀, 호-雲菴)는 고창 동촌에서 세거하였는데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떨쳐 일어나 왜적에 대항하였다. 당시 진주성 싸움에 참가하여 끝까지 왜적에 맞서 싸웠으나 끝내 성(城)이 무너지자 함께 했던 삼장사(三壯士)와 같이 강에 투신하여 의로운 생을 마감하였다. 이를 알고 있는 공은 항상 아버지의 원수를 갚지 못함을 부끄럽게 여겨 호(號)도 치암(恥菴)으로 하였다. 임란이 끝나자 부친의 시신을 찾아 청계면 태봉리 운수봉에 안장한 후 이 마을로 들어와 평생을 죄인으로 자처하며 살았다.
그 후에 이 마을에 들어 온 성씨는 김령김씨다. 김령김씨의 자료를 보면 청심헌 김여필(金麗弼, 1713~1804) 공이 이 마을에 처음으로 들어왔다. 공은 순창 추동제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고 학문을 배움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다. 주변에서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하길 권하였으나 부질없는 일이라며 거절하였다. 만년에 순창에서 이곳 「상봉」마을로 이거하여 <청심헌(淸心軒)>이라는 정자를 짓고, 벗과 더불어 의(義)를 강(講)하며 갈건을 쓰고 지팡이로 생활하며 자연 속에 묻혀 여생을 보냈다. 그러나 주민들에게 청심헌이란 정자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아는 사람이 없었다.
또한 원래 이 마을에는 나주임씨도 살았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현재는 살지 않고 있다. 그러나 마을에는 나주임씨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었다. 마을 뒷산이 나주임씨 문중의 산이고 임씨 문중의 묘가 있는 곳에는 거대한 문인석 4기가 자리하고 있었다. 주변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크기의 석상인데 관리가 되지 않고 석상 주위에는 잡목과 풀이 우거져 있어서 더 이상 확인할 수가 없었다. 주민들의 이야기로는 ‘몇 해 전까지 나주임씨들이 제사를 지내고 산을 관리했다가 현재는 파묘를 해갔다’고 한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병산(柄山-131m)은 자루뫼라고도 하며 비응산(飛鷹山), 상봉산(上鳳山)으로도 불린다. 실지로 멀리서 이 산을 바라보면 마치 커다란 학이 날개를 펼치고 날아가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 또한 그 경치가 아름다워 유산8경 중의 하나에 해당되는 산이기도 하다. 유산8경은 무안읍에 있는 <유산정>에서 바라본 8군데의 뛰어난 경치를 말하는데, 그 중에서 제 5경인 ‘병산청송(柄山靑松)’이 이곳 병산의 푸른 솔을 말하는 것이다. 이 산은 무안읍에서 보았을 때 풍수적으로 읍의 서쪽을 방위하고 나쁜 액이 넘어오는 것을 방어하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또한 비가 오지 않을 때는 인근 주민들이 모여서 기우제를 지냈을 뿐 아니라 산 기운이 좋아 무당들의 기도처로도 널리 알려졌다. 50여 년 전만 해도 추석이 되면 인근 마을 아녀자들이 올라와 서로 안부를 묻는 등 만남의 장소이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이 산 주변에 일본군들이 주둔해서 굴파기 공사에 들어가기도 했다. 현재 병산 주변에 있는 굴은 9개로 추정되나 확인하면 더 많이 나올 것으로 여겨진다.
마을성씨
복합성씨 마을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상봉」마을은 1789년 《호구총수》의 자료에는 나오지 않는다. 일제강점기인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외읍면 「상곡리(上谷里)」로 1917년 《조선면리동일람》에는 외읍면 교촌리 「상곡(上谷)」으로 나온다. 이후 마을의 주산인 상봉산(上鳳山)의 이름을 따서 「상봉(上鳳)」이라 했다가 현재의 「상봉(上峰)」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행정구역 변경
현재 무안읍에 속한 교촌리는 원래 무안군의 외읍면 지역으로 1910년에 잠시 목포부로 편입되었다가, 1914년에 「상봉」마을을 포함한 7개 마을을 합하여 교촌리라 하여 무안읍에 편입되어 현재에 이른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상봉」마을은 상봉산(병산)을 주산으로 둔 아늑한 농촌 마을로 주민들의 주업은 무안 지역 특산물인 양파, 고구마, 채소류 재배 등에 기반을 둔 농업을 경작하고 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진주정씨 입향조가 정착한 이후 공동체적 삶을 이어왔다. 이처럼 마을은 전통과 역사적 흔적을 간직하면서도 농업을 기반으로 한 생활과 지역 공동체 문화가 어우러진 성격을 지니고 있다.
주요시설
병산사, 경기묘
마을변화
예전에는 이 마을이 부촌이어서 읍내에 있는 사람들이 이곳으로 품팔이를 하러 왔던 곳인데, 시대가 변하고 산업화 되어 가는 과정에서 마을의 형세가 점차 위축이 되어 현재는 읍내 사람들과 처지가 바뀌어졌다. 한때는 마을 앞의 전답에 물이 없어 하늘만 바라보아야 하는 천수답이었으나, ‘이무기샘’으로 불리는 곳 위에 관정을 뚫어 물길을 끌어옴으로써 물길을 확보하여 현재의 전천후 농지로 만들었다. 이후 안정적인 농사를 지으면서 주민들의 생활이 비교적 풍족해졌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노인회, 부녀회, 동계
공동이용시설
마을회관, 경로당, 창고, 유산각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이 마을에는 여러 개의 샘이 있다. 병산 뒤 진주정씨 27세손 사제(思齊)공의 묘 아래에 있는 자라샘, 마을 앞에 있으며 제를 지낼 때 쓰는 샘이라 하는 젯샘, 마을에서 경신동으로 넘어가는 재를 정승재라 하는데 그 밑에 구수샘이 있으며, 만 명의 병사들이 지나가면서 먹을 수 있다는 만수샘, 그리고 이무기샘 등이 있다. 또한, 이 마을은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어 6.25 한국전쟁 때 망운지역 등의 사람들이 피난을 많이 오기도 했다.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마을의 오른쪽으로 상사지에서 현경면 양학리로 넘어가는 ‘뼛바위재’라는 이름의 고개가 있다. 이 이름의 유래는 병산에 닭벼슬의 형상을 한 바위가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볏바위재’라고 하였는데, 언제부터인가 강하게 발음하면서 현재의 지명으로 굳어진 것이다(다른 주장도 있다. 즉 병산이 논을 갈 때 쓰는 버섭 위에 끼우는 볏모양으로 생겼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는 이도 있다). 닭 벼슬의 모양을 한 바위는 찾을 수 없으나 병산 아래 현경 쪽에 있는 광산김씨 문중 묘지 옆에는 벼락으로 두 쪽이 난 큰 바위가 있는데 그것을 보고 붙이지 않았는가 추정해본다. 또한 ‘바윗등’이라는 지명이 있다. 60년대까지만 해도 그곳에 깃발을 꽂아놓고 사격연습을 했던 곳이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마을의 왼쪽 자루뫼라 불리는 곳에는 무안박씨의 사당인 <병산사>와 <경기묘>가 있다. 병산사는 정조 2년(1778)에 풍정 박의룡을 제향하기 위하여 세워졌고 1829년에 애한정 박익경, 암천 박증 ,초정 박응선을 추배하였다. 1868년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된 후 1946년에 공론으로 현 위치에 부설하였다. 1961년에 죽포 박기종을 추배하였고 1976년에 중수하여 오늘날에 이른다. 병산사는 정면 3칸, 옆면 1칸의 맞배지붕이며, 삼문 오른쪽에는 1891년에 세운 <병산사유허비>가 있다. 경기묘는 무안박씨 중시조인 진승(進昇:고려시대 국학전주)을 주벽으로 1965년에 창건하고 1979년에 중건하여 12세까지 15위를 모시고 있으며 매년 음력 3월1일에 자손들이 모여 제사를 받들고 있다.
<병산사>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잔등 입구의 밭에 눈여겨 볼만한 흔적이 있었다. 밭을 소유한 주민의 말에 따르면 밭을 경작하기 위하여 조금만 파면 주춧돌로 보이는 큰 돌들이 많이 나오고 석축의 흔적이 있으며, 밭 주변에서는 옛날 토기와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고 한다. 이런 것들을 봤을 때 그 주민은 ‘이곳에 큰 부자가 살고 있었거나 또는 큰 건물이 있었지 않았는가 생각 된다.’라고 하였다. 실제로 지금도 오래된 토기와를 많이 볼 수 있었으며 자기 파편 등도 볼 수 있었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이 마을에서 서남부 지역 최초의 동학 첩지가 발견되었다. 동학 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이 박치상을 무안의 동학접주로 갑오년에 임명한 임명장이 후손인 무안농협 조합장을 지냈던 김광용 가 보관하던 고서류 뭉치에서 2025년 10월에 발견되었다. 이외에 갑오년(1894년)에 북접의 지도자였던 최시형이 김광용 씨의 조부인 김길권(족보에는 김택권으로 나옴)을 ‘중정’과 ‘교수’에 임명한다는 임명장도 발견되었다. 이 발견으로 인해 그동안 구전(口傳)으로만 전해오던 무안의 동학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음을 입증하였다. 또한 마을 노인회장의 말에 따르면 ‘이 마을에 살았던 진주정씨 후손이 동학운동에 가담하여 활발하게 활동했다는 말은 자주 들었으나 자료나 흔적이 없어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라고 했다. 그 후손은 장성의 동화로 이사했다가 현재는 서울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