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촌6리에 포함된 「상사지」마을은 병산(柄山)의 맥을 이어받은 곳에 자리 잡았으며 뒤로는 무안읍 외곽도로가 지나고 있다. 또한 마을 앞으로는 현경면 양학리로 넘어가는 길이 나 있으며, 잿등이라는 뒷산을 배경으로 하고 앞으로는 파평윤씨 문중산인 재짓등이 있다.
지명유래
「상사지」란 마을 이름은 못샘(沙池)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랫마을인 「중사지」 앞에 수량이 많고 물맛이 좋기로 이름난 샘이 있는데, 이 마을 주변의 토양이 사질토(沙質土)로 모래가 많고 물이 잘 흘러나와 모래사(沙)자와 못지(池)자를 써서 사지(沙池) 또는 못샘이라 불렀다. 이 못샘의 중간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중사지(中沙池)」라 하고 못샘의 위쪽에 있다고 해서 「상사지(上沙池)」라고 한다. 1789년 조선시대에 펴낸 《호구총수》에도 「중사지(中沙池)」, 「상사지(上沙池)」로 나온다. 하지만 《마을유래지》에서는 ‘옛날 고승이 마을을 지나가다 못샘에서 솟는 물구멍을 지팡이로 찔러 물을 막았다고 하여 「상사지(上沙池)」라 불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마을형성(입향조)
정확한 마을 형성 시기나 입향조는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마을 뒤 평사등에 나주임씨 문산(門山)이 있고 1978년에 지은 임씨 제각이 있는 것으로 보아, 마을이 형성될 당시에는 나주임씨가 들어와 살지 않았는가 여겨진다. 그리하여 나주임씨 족보를 살펴보면 나주임씨 무안 입향조는 조선시대 임경(林憬, 자-중인, 1529~1611) 공으로, 인조 때에 무과로 등과하여 첨지중추부사를 역임하고 1570년경에 이곳 상사지에 터를 정하였다. 가세가 넉넉하여 흉년이 들면 원근의 어려운 사람들에게 구휼하고 공의 뛰어난 효행이 널리 알려져 암행어사의 주청으로 공조참의로 추증되었다.
하지만 주민들에 의하면 그렇게 오래전부터 마을에 나주임씨가 살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듯이 《마을유래지》에서도 ‘정확한 마을 형성 시기나 입향조를 밝히고 있지 않으며, 다만 남평문(南平文)씨, 나주오(羅州吳)씨, 김해김(金海金)씨 등이 마을형세를 보고 사자형이라고 하면서 정착하였다는 구전이 전해온다.(제보: 김용균(金用均))’라고 기록하고 있다.
풍수지리(마을형국)
「상사지」마을은 산맥의 생기와 샘물의 풍요를 품은 길지이면서도, 맞은편 남산의 호랑이 바위 지형의 살기를 사자형(獅子形)의 마을 지형임은 물론 사자가 사는 윗마을이라는 뜻의 「상사지(上獅地)」라는 마을 지명으로 풀어내고 있다. 이는 상징적 명칭이나 비보(裨補, 보완 행위)를 통해 마을로 끼쳐오는 살기와 재액을 제압하는 풍수적인 전통을 잘 보여주고 있다. 풍수지리가 단순히 지형을 해석하는 학문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의 상호작용 속에서 공동체가 삶의 의미와 안전을 모색하는 문화적 실천임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하겠다.
마을성씨
복합성씨 마을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마을 이름에 대한 다른 의견도 있다. 마을에서 마주 보이는 남산의 중턱에 호랑이 모습을 한 바위가 있다. 그 호랑이가 마을을 향해 입을 벌리고 포효하는 형상이어서, 마을에서는 호랑이의 피해를 막기 위해 마을의 이름을 사자가 사는 윗마을이란 의미의 「상사지(上獅地)」라고 하였다고도 한다. 이는 풍수적으로 그럴듯하게 전해오는 지명이면서 동시에 《마을유래지》에도 기록된 지리적 전통을 보여주는 마을 명칭이라고 하겠다.
행정구역 변경
현재 무안읍에 속한 교촌리는 원래 무안군의 외읍면 지역으로 1910년에 잠시 목포부로 편입되었다가, 1914년에 「상사지」마을을 포함한 7개 마을을 합하여 교촌리라 하여 무안읍에 편입되어 현재에 이른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상사지」마을은 농업을 기반으로 한 생산공동체로서 주민들이 <상사지마을 영농조합법인>을 설립하여 이를 중심으로 협력하며 살아가는 마을이다. 전통적인 농업 생활과 현대적 협동체 운영이 결합된 구조를 통해 농업 중심의 경제와 공동체적 삶을 이어가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주요시설
유산각
마을변화
2006년도에 친환경 마을로 선정되어 받은 상금으로 마을 앞에 화단을 조성하고 주민들의 주택 담벼락에 벽화를 그려 넣어 마을에 문화적인 역동성을 충족하였다. 그렇듯이 무안 읍내와 인접한 마을에는 현재 외지에서 이주한 주민이 약 50% 거주 중으로 도시 외곽의 친환경 마을로 발전하고 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노인회, 부녀회, 동계
공동이용시설
마을회관, 경로당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마을 이름의 유래가 된 못샘은 병산과 비봉산 등 5개의 맥(脈)이 모여서 이루어진 샘으로 무안의 대표적인 샘 중에 하나이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못샘의 물줄기가 너무 세어 한번 분출이 되면 안산을 넘어서기도 하고, 초당대 뒤의 동학골로 연결되면서 무지개를 형성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해서 물줄기를 그대로 놔두면 무안이 물바다가 되어 마을이 형성될 수 없다는 말이 전해져 왔다. 주민들은 이 물의 피해를 막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강구했다. 그중에서 지나가는 고승(高僧)이 지팡이로 또는 나무못을 만들어 물구멍을 막았다는 이야기도 있고, 주민들이 구리를 녹여서 물구멍에 부 어 물줄기를 줄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렸을 때 못샘과 함께 시절을 보냈던 주민들은 ‘못샘의 물은 여름에는 발이 시릴 정도로 차갑고 겨울엔 뭉게뭉게 김이 어릴 정도로 따뜻한 물이 나왔다’고 한다. 또한, 물이 나오는 입구에는 모래가 둥그렇게 포말을 그리면서 끊임없이 콸콸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현재 이 물은 인근 목욕탕의 용수로 쓰이고 있다. 오래전 한해(旱害)가 들었을 때 윗당산 아래에서 샘을 팠는데, 그때 샘을 파던 기술자가 ‘마을 앞으로 거대한 수맥이 흐르고 있어 이 마을은 물이 흔한 곳이지만 자칫하면 마을이 가라앉을 수도 있다’라는 말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남아있는 지명으로 마을 앞의 산을 ‘안산’이라 하고 안산 너머를 ‘국실’이라 했다. 또한 오얏골, 창골, 쇠골, 중선골, 짓등(잿등), 평삿등, 재지미 등이 있다. 또한 이 마을과 중사지 사이에 골짜기가 있는데 주민들은 깡골(공동묘지가 있어서 관골(棺谷)로 부른 것이 강하게 발음)로 부르고 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현재는 지내지 않지만, 오래전부터 마을에 당산제를 지냈다. 예전에 마을 뒤 잿등(짓등)에는 당산 할아버지라 부르는 아름드리가 육송이 있었고, 현재 마을회관 자리에는 당산할머니라 부르는 홰나무 두 그루가 있었다. 매년 정월 열나흗날이 되면 온 마을 주민이 나서 당목(堂木) 주위에 황토를 뿌리고 금줄을 치며 당산제 준비를 했다.
먼저 잿등의 당산할아버지에게 제사를 지내고 내려와 당산할머니에게 지내는 순서로 제를 모셨다. 현재는 이 당목들이 모두 태풍의 피해를 받아 고사되어 없다. 대신 마을 앞, 길 가운데에는 윗당산이라 부르는 둘레가 3m가 넘는 홰나무가 주민들에 의해서 보호되고 있다.
유물, 유적
잿등 아래서 석실묘의 흔적으로 보이는 일정한 규모의 돌판 네 개를 발견했다. 돌은 길이가 각각 다르나 대체로 1m 50cm에 두께는 15cm 정도이다. 석실을 발견한 농부는 밭을 갈다가 걸리는 것이 있어서 파 본 즉 석실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농부는 석실 안에 유물이 있을까 하고 찾아보았으나 아무것도 발견하지는 못했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나주임씨 입향조인 임경 공의 후손들은 대대로 무안에 거주하면서, 1935년에는 ‘나주임씨장수공파참의공휘경계문중’을 구성하여 모든 재산을 문중 명의로 등기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문중 부동산에 대한 분쟁이 전혀 없이 청계면 도림리의 선산과 전답, 대지 등을 관리하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1850년경 「상사지」 마을에 있던 참의공 종가의 화재로 인하여, 집안에 소장하고 있던 전적(典籍)이 전부 소실되어 정확히 고증하기가 어렵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목포대 후문에 참의공 제각인 <화산재>가 있다.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미기재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마을에 동학의 흔적이 있었다. 마을에서 양학리로 넘어가는 길목에 ‘방죽안’이라는 곳이 있다. 그곳은 ‘스랑골’로 불릴 정도로 늘 물이 많아서 질척거렸는데 이곳에서 동학군들이 빠졌다는 것이다. 동학의 봉기가 실패로 끝나고 농민군들이 관군에게 몰려 피해 다닐 때, 현경 쪽에서 무안읍으로 들어오던 한 농민군이 이 스랑에 빠져 달아나지 못하고 관군에게 잡혀 불무제 아래에서 처형당했다고 한다.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이 농민군은 옆 마을인 「중사지」의 ‘광산김씨’였다고 한다. 또한 주민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동학농민혁명을 거치고 나서 ‘광산김씨’가 ‘광주김씨’로 족보에 표기되는 일이 있었는데, 이는 관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