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안읍에서 고절리를 지나 감방산 방면으로 3km쯤 가면 만나는 마을이 「신촌」마을이고 조금 더 가면 「발산」마을을 볼 수 있다. 두 마을 다 행정구역명은 무안읍 매곡1리에 속하며, 한 마을로 이루어진 것은 30~40년 된다. 「신촌」마을은 큰몰, 작은몰로 이루어졌으며, 같은 행정구역인 「발산」은 매봉, 뒷골, 솟도골, 건너말로 이루어졌다.
지명유래
「신촌」은 발산마을과 합쳐서 형성되었으나 분리되어 새롭게 형성하면서 신촌(新村)이라 부른다. 지명의 유래를 보면 ‘고절리에서 떨어져나와 새로 마을을 이루었다’해서 붙여진 이름이지만, 심정적으로 주민들은 고절리의 「평촌」과 더 가깝게 지내고 있다. 지금도 신촌과 평촌 사람들이 모여 만든 ‘신평회’라는 모임이 운영되고 있다. 「발산」이란 독특한 이름의 지명유래는 《마을유래지》의 기록으로 본다면 「발산(鉢山)」은 ‘신촌 북쪽에 있는 마을로 보평산의 오연봉이 마치 비둘기가 날아가는 형태라 하여 이름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마을형성(입향조)
신촌과 발산 마을은 무안박씨 무안파조(祖) 애한정 박익경(1438~1520)의 5대손인 항길의 자손들이 터를 잡았다. 신촌마을은 1668년에 태어난 서문(瑞文)이, 발산마을은 1671년에 태어난 진문이, 각각 터를 잡아 입향조가 되었다. 하지만 《마을유래지》에서는 발산마을이 ‘이웃 신촌마을과 한 마을이었으며 지금으로부터 약 350여 년 전에 청계 도림에 거주하던 박경(朴涇)이 남편 문씨와 결혼한 뒤 이 마을에 터를 잡아 정착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풍수지리(마을형국)
주민들은 지금도 ‘성재’라는 이름으로 보평산의 능선을 부르고 있다. 실지로 능선의 등산길을 따라 성의 흔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 이러한 점을 두고 봤을 때 뒷산에 성이 있어서 ‘발산’이라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또한 마을의 형국이 조리형이라 발(鉢)의 어의(語義)를 살려 바루처럼 생긴 마을이라 해서 발산이라 했을 것이라 추정된다. 이러한 조리형국은 혼탁한 기운을 걸러내고 좋은 기운만 취하는 정제(精製)의 터로서, 곡식이 풍요롭고 사람과 재물이 모여듬은 물론 마을공동체가 평탄하게 이어지는 길지라고 한다.
마을성씨
최, 윤, 김, 주씨(2, 3세대)가 있으나 거의 무안박씨 집성촌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마을의 위치가 감방산을 포함한 삿갓봉[笠峰], 옥녀봉, 병풍봉 임자봉 등 다섯 개의 봉우리가 이 마을을 향하고 있어 풍수지리로 보면 마치 다섯 명의 노인이 밥상을 받는 형국이라 해서 「반곡리」라 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그들 식으로 한자 이름을 「매곡리」로 바꾸어 버린 것이다. 행정구역 이름에 ‘곡(谷)’이 들어간 것은 마을 앞에 펼쳐진 들판이 영산강 둑을 막기 전까지는 바닷물이 들어오는 수로(水路)로 마치 계곡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행정구역 변경
본래 외읍면의 지역으로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양림리, 수반리, 발산리, 영화정, 신촌 등으로 나온다.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도산리, 발산리, 수반리, 양림리, 신촌리 등을 합하여 매곡리라 해서 무안읍에 속하게 되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현재 주민들의 주업은 쌀, 보리, 고구마, 양파, 마늘, 콩, 참깨, 고추 농사이다. 또한, 마을 이장은 이 마을이 양파의 시발지라고 한다. 이장의 당숙되는 분이 최초로 일본에서 양파의 씨앗을 가져와 무안 최초 양파의 시조라고 주장하지만 확인할 수 없었다.
주요시설
미기재
마을변화
현재의 발산 마을은 주민들의 푸념대로 3개의 악재를 만났다. 우측에는 군부대가 주둔하고, 좌측으로는 고속도로(망운–광주)가 지나고 있으며 마을 위로는 고압선인 철탑이 지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는 이 마을만 일본군이 주둔하지 않았다. 보평산에 포진지를 구축하기 위해 신촌, 도산 등에 일본 공병대가 주둔했지만 유독 이 마을만 피해나가 주민들은 마을의 지형 때문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마을에는 인근 주민들에게 널리 알려진 ‘무재샘’이 있었다. 무지개샘(무지개 시작자리)이라고도 하며 이슬비나 안개가 피어오를 때면 샘을 중심으로 해서 무재개가 피어올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물이 시원하고 약수로 소문이 나서 멀리 목포에서도 물을 받으러 오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고속도로가 나면서 없어지고 옆 자리에다 군(郡)에서 새롭게 ‘무재샘(무지개 끝자리)’을 만들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동계, 부녀회, 노인회, 신평회(신촌+평촌)
공동이용시설
마을회관(신촌, 발산)
전통식품/특산품
마늘, 양파를 농협과 계약재배를 체결하여 짓고 있다.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매곡리는 무안읍 소재지에서 북쪽으로 3km 떨어진 곳에 있다. 감방산에서 내린물이 무안천을 이루고 영산강으로 흐르는데 그 천을 사이에 두고 양림, 수반과 도산, 신촌/발산 등 두 마을씩 매곡리를 이루며 자리하고 있다. 마을 뒤에는 ‘각시봉’ 또는 ‘옥녀봉’이라 부르는 자그마한 봉우리가 있다. 이 산은 병풍산의 병풍을 뒤로 하고 단아하게 앉아 있는 각시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 앞의 논은 ‘배논’이라 불렀다. 예전에는 마을 앞을 지나 도산마을 아래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고 한다. 해서 배가 들어온 논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실지로 마을 입구에 있었던 당산나무는 배를 맸다는 말이 있었다. 현재 당산나무는 고사당하고 없다.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신촌마을에 남아있는 지명으로 자주물, 잉깟밭, 경변 뒷매, 영화정, 서당골, 수밑에 등이 있다. 발산마을에 남아있는 지명으로 거무동, 사락가운데, 해망굴, 용당굴 등이 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신촌마을은 흥이 있었다. 마을 굿패가 활발하였기 때문이다. 울력을 할 때나 모내기를 할 때 그리고 당산제를 지낼 때는 모든 주민들이 나와 신명을 펼쳤다. 예전에는 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진 그림 같은 마을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길가에 우람하게 서있던 두 그루의 당산나무가 고사되고 젊은 사람들이 객지로 떠나면서 예전의 신명은 없어졌다. 현재 당산제는 지내지 않고 있다.
유물, 유적
마을에는 당산나무를 포함하여 세 개의 입석(도로옆 논머리 대밭속)이 마을을 지켜주고 있었다. 정자나무 옆에는 2ⅿ가 넘는 입석이 지금도 마을의 안녕을 지키고 있으며 얼마 전까지 연자방아(신촌마을)도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없다. 이 마을 뒤 보평산 자락에는 매곡리 수반 출신인 박정암이라는 비구니가 1986년에 세운 법화종 사찰인 「보평사」가 있다. 현재는 박정암 스님이 타계하고 딸이 지키고 있다. 또한 보평사 옆에는 성암 박경래 선생의 <신시가비>와 만해 박영술의 <효자각>이 함께 자리하고 있다. 고절리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입구에는 <함평이씨열부각>이 자리하고 있다. 마을의 뒷산은 보평산(普平山, 寶平山으로 쓰기도 한다)이 있다. 자료에 의하면 이 산에는 시대별로 이름을 달리하는 성이 있었다. 신라시대에는 면주성(綿州城)으로 부르는 성이 있었으며, 고려시대에는 ‘물량고지(勿良古址)’라 부르는 토성이 있었다. 현재 용월리 약곡마을 주변 문안재로 부르는 곳에 토성의 흔적이 남아있다. 조선시대에는 세종에서 문종까지 이어지는 관방시설 정비에 따라 그때까지 토성이었던 성을 돌로 쌓아 만든 「보평산성」이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발산마을에는 <영화정(詠和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영화정은 도산마을 입향조의 아들인 박면(1728~1792)의 호인데 그는 과거의 뜻을 버리고 이곳에 은거하면서 후손과 문하생들을 모아 놓고 시례(詩禮)와 풍류를 강론하기 위해 지은 정자이다. 원래는 발산마을에 있었으나 보평산 아래로 옮기는 등 네 차례의 이건을 거쳐 현재는 박염의 <경신재>와 함께 도산마을에 있다. 또한 마을에는 1944년에 박병도가 건축한 <삼해재>와 <면강정사>라는 편액이 걸려있는 정자가 마을에 남아있다. 하지만 관리 소홀로 잡초가 우거지고 문짝은 떨어져 나가 있으며(현재는 밖에는 울타리에 둘러싸여 있으며 마당에 약간의 풀이 돋아 있을 뿐 문짝들은 잘 보존되어 있었다) 방안에 보관하였던 족보를 비롯한 문중의 각종 문서들은 이미 없어져 버렸다. 외얏골에 <연모재>와 마을 앞 방죽너머에는 <관남재>가 있으며 <열부김해김씨기행비>가 있다. 마을회관 옆에는 1999년에 세운 표제석이 있으며, 마을 앞에는 1987년 지역의 유림들이 뜻을 모아 세운 <병소 박기룡선생 숭모비>가 있다.
또한 <관남재> 뒤에는 옛날 고려장의 터가 있다고 하며, 도굴꾼들에 의해 도굴되고 지금은 하나의 관만 남아있다고 한다.(이장 박성철 증언)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박용화(한진상사 대표), 박남옥(전 무안읍장)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미기재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미기재
기타사항
신촌마을을 포함한 발산, 도산 주민들은 후손들의 교육에 관심을 가져 마을별로 교육자금을 거출하여 1850년 서당골에 <영화정 서당>을 건립하였다. 이어 1935년에는 <면성자립진명학원>을 설립하였으며, 1941년 면성공립학원인 <매곡간이학교> 2년제를, 그리고 1946년 <면성북초등학교>(현 글로벌 무안 지원센터) 6년제를 설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