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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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매곡2리 무안읍 도산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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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브 정보

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총 38세대, 인구 51명(남33, 여18) / 2025.12.기준.
자연마을 구성
이 마을은 무안읍 소재지에서 북쪽으로 약 3km 떨어진 매곡리에 속하며 「도산」을 포함하여 물이 좋은 「이팝골」, 마을사람들은 신기촌으로 알고 있는 「승기촌」, 용이 살았다는 「용당골」 등의 자연마을이 모여 이루어졌다.
지명유래
《마을유래지》에 의하면 ‘마을이 도(道)를 수양하는 곳이라 「도산(道山)」이라 부른다. 마을에는 예전 배가 닿았는데 배의 닻줄을 매었다는 소나무가 있고 용이 승천하면서 꼬리가 산봉우리를 헐므로서[허물어서] 용굴과 금굴이 생겼다는 얘기가 전한다’라고 쓰여 있다. 또한 「도산」이란 선비들이 모인 마을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마을형성(입향조)
「도산」마을에 처음 들어 온 사람은 무안박씨 무안파조(祖) 애한정 박익경의 5대손 항길의 자손인 박승문(1688 출생)이다. 하지만 《마을유래지》에는 무안박씨 박면(1728~1792)이 탐진최씨 부인을 맞아 분가하여 정착한 마을로써 이때부터 마을이 번성하였다고 하며, 한편 박면의 중형인 박염(1720~1777)도 비슷한 시기에 이 마을에서 살았다고 한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마을 앞을 지나 함평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돗재’라 하는데, 지명에 대한 유래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이 고개의 풍수적 형국이 돼지(豚)의 형상이어서 사람들이 ‘돈재’라고 부르다가 현재의 이름이 되었다 한다. 두 번째는 산이 험준하여 도둑들이 많이 있었다고 한다. 특히 함평의 우시장에서 소를 팔고 돌아오는 농부들의 호주머니를 노리는 도둑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대부분 칼(刀)을 들고 있었다고 해서 돗재라 했다. 또한 이 고개는 해제, 운남, 지도의 사람들이 한양으로 가는 길목이어서 많은 사람이 왕래하였는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도둑들이 지키고 있어 재를 넘을 때는 상당한 준비를 해서 넘을 수 있었다고 한다.
마을성씨
한 가구만 제외하고는 무안박씨 집성촌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문헌으로 지명의 유래를 보면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매곡리에서 유일하게 이 마을 이름만 나오지 않고 「영화정(詠花亭)」이란 지명이 나온다. 영화정(詠花亭)은 이 마을 입향조의 둘째 아들인 박면의 호이다. 이후 1912년이 되어서야 외읍면 「도산」으로 나타나며 이후에는 전부 같은 이름으로 쓰여 지고 있다.
행정구역 변경
본래 외읍면의 지역으로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양림리, 수반리, 발산리, 영화정, 신촌 등으로 나온다.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도산리, 발산리, 수반리, 양림리, 신촌리 등을 합하여 매곡리라 해서 무안읍에 속하게 되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마을 앞에 도산 저수지와 뒤에 감방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전체적 분위기가 조용하고, 평화스러운 마을이다. 주민들의 주업은 쌀, 양파, 마늘, 콩, 참깨를 재배하고 있다.
주요시설
미기재
마을변화
한때는 녹두밭 웃머리라 칭할 정도로 가난하게 살았지만 1955년 마을 앞 저수지가 완공되면서 인근 마을에 비해 부촌이란 말을 들을 정도가 되었다. 골짜기 골짜기마다 농작물을 심을 수 있었고 발산 마을 앞까지 농지를 확대해 주변 마을에 폐를 끼치지는 않았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동계, 부녀회, 노인회
공동이용시설
마을회관, 재활용 동네 마당(재활용 쓰레기 모집 장소)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마을의 주산인 감방산(坎防山)은 영광의 불갑산을 거쳐 함평의 군유산을 지나 뻗어온 노령산맥의 줄기로써 승달산으로 이어진다. 예로부터 너무 높아 깜박산(깜짝산)으로도 불려졌던 이 산에는 용굴, 금굴, 호랑이굴 등 세 개의 굴이 있는데 그중의 하나인 ‘용굴’이 팔부 능선쯤에 있다. 또한 도산 저수지와 큰샘이 있다.
동/식물
마을회관 앞에는 20~30년 전에 식재한 느티나무 두 그루가 크게 자라고 있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골짜기도 많다. 돗재고랑을 비롯하여 토끼안고랑, 쑥대고랑, 안고랑, 호랑이고랑, 성주고랑, 용굴, 무재샘, 금굴, 밑산재, 여시굴, 선바위재, 버버리굴(메아리가 들리지 않는다) 작은돗재, 당너머 등이 있다. 마을에서 현경 해운리로 넘어가는 재를 밀산재라 한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마을 뒤에는 원형이 잘 보존된 2기의 고인돌을 포함한 6기의 지석묘가 있다하나 숲이 우거져 들어갈 수 없어 확인하지 못했다. 마을 사람들의 설명에 의하면 이 고인돌의 배열이 현경면 평산리 ‘팔바우등’을 거쳐 외반리의 화산 운남면의 양곡까지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새마을사업 등을 통해서 사람들이 가져가거나 밭을 개간하기 위하여 땅을 파고 묻어버려 현재 남아있는 것은 몇 기뿐이라고 한다. 이는 1986년 목포대학교 박물관 팀이 조사한 무안군 문화 유적 조사에도 빠진 새로운 발견으로 사료적 가치가 있는 유물들이다. 이현석 전 함평군 문화원장은 “도산마을 지나 돗재를 넘어 함평 지역에는 100여 개의 지석묘가 있었다”고 말했다. 마을의 유적으로는 <경신재>와 <영화정> 두 개의 정자가 있고 마을 입구에 <나주김씨 열녀비>와 <염재박기삼시혜비>가 있다. 또한 무안박씨 재각인 <매곡재>가 있다. <나주김씨 열녀비>는 마을주민 박선화의 처 김귀임의 열행을 기념한 비다. <경신재(敬愼齋)>는 마을 입향조의 아들인 박염의 정자이고 <영화정(詠花亭)>은 그의 동생인 박면의 정자이다. 두 사람 다 도암 이재 선생에게서 수학을 하였는데, 경신재와 영화정이라는 호도 도암 선생에게서 받은 것이다. 두 형제는 1721~1722년의 신임지화(신축 임인년의 화)를 보고 느낀 것이 있어, 관계(官界)의 뜻을 버리고 이곳에 경신재와 영화정을 짓고 도학을 닦으며 후생 교화에 평생 진력하였다. <영화정>은 원래 발산마을 서당골에 있었으나, 보평산 아래로 옮기는 등 네 차례의 이건(移建)을 거쳐 현재는 도산저수지 위에 <경신재>와 함께 있다. 두 정자의 내부에는 다수의 편액이 걸려있는데 최익현 선생이 직접 쓴 편액도 있었다.
설화
용굴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어느 날 이 굴에 사는 용이 오랜 기다림 끝에 때를 만나 승천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하늘로 올라가던 중에 사람들의 눈에 띄어 부정을 타 하늘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다. 결국 용은 하늘로 오르지 못하고 내려오면서 꼬리로 감방산의 꼭대기를 내리쳐 화풀이를 하였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뒤로 흙이 무너져 내리면서 산의 높이가 낮아졌으며, 용은 이무기가 되어 굴로 들어가 칠산바다로 사라졌다는 사연을 안고 있다. 또한 이 산에는 99개의 골짜기가 있었는데, 한 개의 골짜기가 모자라 서울이 될 수 없었다는 전설을 안고 있으며, 그 골짜기 중 하나인 승지골에는 「극락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터만 남아있을 뿐이다.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박염(1720~1777), 박봉기(전 도의원), 박준기(예편 육군대령), 박선희(현 검사), 박석봉(현 육군대령)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일제강점기까지만 해도 감방산은 숲이 울창하고 산이 깊어 6.25 한국전쟁 때에는 빨치산 활동의 근거지가 되기도 하였다. 실제로 도산마을은 낮에는 국군들이 들어오기 때문에 태극기를 달아야 했고, 저녁에는 빨치산이 들어오기 때문에 인공기를 달아야 했던 동족상잔의 아픈 기억이 있는 마을이다. 이러한 경우는 당시에 산중에 있는 마을들에는 흔한 현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극심한 이념의 갈등 속에서도 주민들이 슬기롭게 대처해 다른 마을에 비해 희생자가 적었다고 한다.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마을에서 시작되는 무안천이 매곡리를 가르며 지나는데 주변 마을의 이름을 빗대어 전해 오는 노래가 있다. “도산에서 돈 벌어서 발산에서 밥 사먹고 신촌에서 신발사고 수반에서 술 사먹고 고절에서 곯아 버렸다”라는 내용이다. 마을에 있는 군부대에서는 매년 1차례 이상씩 대민 지원 형식으로 주민들에게 음식을 대접한다.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무안드론방제, 도산식품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예전에는 마을 위에 있는 작은 돗재를 지나는 한양길이 나 있었다. 사람들이 많이 오가다 보니 고개에는 돌무더기를 쌓아놓은 서낭당이 있었다. 주민들은 지금도 당 너머라고 부르는데 한때는 그곳에 나환자들이 살기도 했다.
기타사항
미기재

출처

각주
미기재
참고문헌
1. 《마을역사자료조사》(무안문화원, 2017) 2. 《마을유래지》(무안군, 1987) 3. 《무안군사》(무안군,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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