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반」마을은 무안읍 소재지에서 북쪽으로 약 3km 떨어진 곳에 있으며, 감방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무안천을 이루며 영산강으로 흐르는 지점에 자리하고 있다. 원래 무안박씨 집성촌으로 유서 깊은 마을이며 전통 유적과 문화재가 많이 남아 있다.
지명유래
《마을유래지》에나 ‘마을 입구의 표지’에도 마을 이름을 「수반(水盤)」으로 하고 있는데, 그 이유를 묻자 주민들은 이구동성으로 잘못 쓴 표기로 「수반(壽盤)」으로 써야 맞다는 것이다. 실지로 마을 곳곳에 있는 노인정이나 마을유래 표지석에도 「수반(壽盤)」으로 쓰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수반(水盤)으로 부르는 것이 좋다는 의견이 우세하다. 《마을유래지》에 의하면 이 마을은 신촌 서쪽에 있고 감방산을 중심으로 옥녀봉과 임자봉이 소반을 받은 형국이라 하여 「반곡(盤谷)」으로 부르다가 후에 「수반(水盤)」으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마을형성(입향조)
입향조 박익경의 중손 박염(朴恬, 1526~1603)이 을사사화(1545) 이후 이 마을로 내려와 정착하였다고 전해지며, 현재 그가 시와 글을 읊조리며 문인 제자들과 강학했다는 〈죽헌정〉이 남아 있다. 이장(박태갑)은 어렸을 때 마을 주민으로부터 처음 정착민은 구씨였다고 들었으며, 오래전 이 마을에는 능성구씨와 당악(棠岳)김씨가 살았다고 한다. 또한 온양정씨도 거쳐 갔다고 하나 정확한 기록은 없다.
풍수지리(마을형국)
수반(壽盤)마을은 지리적인 형국이 감방산을 주산으로 하고 병풍봉, 옥녀봉, 입자봉과 보평산의 다섯개 연봉을 바라보며 노인이 밥상을 받는 지리적인 형국임과 아울러 마을을 감싸고 있는 산과 봉우리들이 소쿠리 모양을 하고 있다. 이를 풍수적으로 해석하면 주산인 감방산을 부모산으로 청룡백호, 안산의 연봉들이 노인에게 밥을 차려주는 풍요와 안정의 길지라고 여겨진다. 이에 더하여 소쿠리 모양의 지세는 보국형의 재물을 담는 그릇으로 재물과 인재의 기운을 모으는 풍수적 명당이라고 하겠다. 이처럼 노인이 밥상을 받는 마을 형국도 마을 주변을 감싸고 있는 산과 봉우리들이 마을을 중심으로 소쿠리처럼 둥그렇게 싸여 있어 소쿠리 모양이라고 한다.
마을성씨
무안박씨가 거의 대부분이나 현재는 혼합성씨 마을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조선시대 문헌인 《호구총수》에는 외읍면 수반리(壽盤里)로 나오나 1912년과 1917년의 자료에는 수반리(水反里)로 나온다. 이런 현상이 나온 것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자기들 입맛에 맞게끔 지명을 바꾼데서 비롯된 것이라 추정된다.
행정구역 변경
본래 외읍면의 지역으로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양림(楊林)리, 수반(壽盤)리, 발산(鉢山)리, 영화정(詠花亭), 신촌(新村) 등으로 나온다.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도산리, 발산리, 수반리, 양림리, 신촌리 등을 합하여 매곡리라 해서 무안읍에 속하게 되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이 마을에는 조선시대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에도 ‘나가는 곡물 대신 들어오는 곡식이 많았다’ 또는 ‘마을 곳곳에 김이 폭폭 날 정도’로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고장이었다. 이 마을에 처음 들어서면 분지형으로 아늑한 느낌을 준다. 마을 안내를 하고 있는 박원호 노인회장은, 새마을사업이 시작되기 전까지만 하여도 울창한 송림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어서 현재보다는 훨씬 좋은 마을이었다고 한다. 특히 예전에는 마을 인구도 많고 마을의 규모도 컸다고 자랑한다. 주산업으로 쌀, 보리, 고구마, 양파, 참깨, 고추, 콩을 재배하고 있다.
주요시설
미기재
마을변화
무안박씨 자작일촌으로 서로 돕고 양보하는 풍습이 있어 마을회관도 관(官)의 도움 없이 주민들의 도움으로 군(郡)에서 제일 먼저 1991년에 지었다. 회관명이 <수양경로당>이다. 「수반」과 「양림」의 머릿 글자를 따서 지은 것인데 옆 마을인 양림에 그때는 경로당이 없었기 때문에 함께 사용하자는 의미에서 지은 것이다. 또한 매년 봄철이면 경로잔치를 하는데 마을의 출향인사들 협조로 풍족하게 지낸다고 한다. 또한 이 마을은 선주민들의 이동은 없으며 이주민 세대가 10년 사이에 15가구 정도 되고 있으나 선주민과 협조가 잘 되고 있다고한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동계, 노인회, 부녀회가 운영 중이며 청년회는 조직은 있으나 형식적이다.
공동이용시설
마을회관(2층 구조), 마을창고, 성산교회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마을 앞을 지나는 수로인 무안천과 마을 교회 뒤로 청용산이 있다.
동/식물
팽나무 세 그루가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전해지는 지명으로 동산(마을 앞 죽헌정 있는 곳), 고부랑쟁이(동산으로 올라 가는 언덕), 교회 뒤의 산인 청용산(마을 왼쪽), 우산, 아간, 정신들(마을 앞 들), 개미들(고절과 수반사이 들), 닭너머(평산으로 가는길), 건너뜸(마을 앞) 등이 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마을 앞에는 1992년에 매립된 샘(현재는 <마을유래기>가 세워져 있다)이 있는데, 마을의 선조 되는 이가 ‘이 샘이면 우리 마을 사람만이 아니라 주변 마을에서도 먹을 수 있을 것이다’고 예언했던 것으로 주민들이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이 우물 주변은 주민들의 공동체 놀이터였는데 명절 때면 강강술래를 하는 등 마을 주민이 모두 모여 잔치)를 벌이는 터였다. 하지만 1970년 이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유물, 유적
이 마을에는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 먼저 입향조의 호를 따서 지은 <죽헌정>이 있다. 〈죽헌정〉은 양림사 위에 있는데 수반마을에 속한 것으로, 이 마을 입향조의 아버지인 박염(자-중정, 호-죽헌, 1526~1603)이 세운 정자이다. 여러 차례 중수해서 예전의 당당한 모습은 많이 없어졌지만, 정자 안에 걸린 현판과 주련을 통해서 과거의 화려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죽헌정의 구조는 팔작지붕의 형태로 시멘트 기와를 얹었다. 처음에는 내부에 서책을 보관할 수 있는 방이 있고 바닥은 마루로 있었다고 하나, 1994년 중수한 현재의 모습은 바닥이 전부 시멘트로 마감되었다. 8개의 내주(內柱)에는 최영조(최익현의 子)가 글씨를 쓴 주련이 있고 17개의 활주(活柱)로 받쳐져 있다. 내부에 상량문과 모재 김안국, 하서 김인후, 미암 유희춘 등의 차운(次韻), 제영문(題咏文) 등 19개의 편액이 걸려 있다. 정자 주변에는 마지막 중수 때 세운 것으로 보이는 <죽헌정 유래비>와 오래된 소나무 한 그루가 과거의 화려했던 조상들의 모습을 반추해 주고 있다. 하지만 확인한 결과 현재 오래된 소나무는 누군가가 수피에 손상을 입혀 고사되고 있다. 하지만 죽헌정은 공의 사후에 정자를 돌보지 않아 터만 전해오다가 1919년에 다시 중건하였다. 죽헌정 아래에는 <세한정박공기적비>, <박학재공적비>, <나주정씨효열비>, <석헌박공기적비>, <성재박공유적비> 등이 있다.
마을 중앙에 숭안문을 세워 조상들을 모시고 있다. 숭안문 앞에는 <박봉기공적비>, <박병석공적비>, <심영례효행비>가 있다. 박봉기 가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박용화(1869~1951, 자-명일(明一), 호-효우당(孝友堂)) <효자문>이 있다. 주민들에 의해서 ‘박용화효손문’으로도 불리는 이 문은 현재 증손인 박원호 노인회장이 거주하고 있다. 종손의 집 앞에 있는데 정면 삼 칸으로 2층 구조의 솟을 문만 있을 뿐 뒤쪽에는 아무것도 없다. 앞에는 네 개의 기둥이 받치고 있으며 단청이 퇴색되기는 했으나 당당했던 위용이 남아 있다. 2층 다락에는 1894년에 포상받은 <정려>와 1899년에 지은 <효우당박공정려기>가 걸려 있다. 이 효자문의 주인공인 박용화는 조실부모하고 조부모 슬하에서 자랐다. 조부모의 지극한 사랑을 받고 자란 그는 조부모의 상을 당해서 슬픔을 가누지 못해 쓰러지기까지 했다. 양림마을 뒤 월산에 시신을 안장하고 그 옆에 묘막을 짓고 3년을 시묘하면서 조석으로 애통해하니, 겨울인데도 산에 과일이 열리고 호랑이가 나타나서 눈을 녹여주었다고 한다. 이를 보고 주위에서 하늘이 내린 효자로 칭송이 자자하였다. 효자문은 아들인 박병인이 1960년에 세운 문이다.
또한 마을 앞에는 얼마 전에 지은 <반곡정>이 있으며 <반곡정준공기념비>와 <박형호공적비>가 있다. 맞은편에는 후손이 없어 향교에서 1993년에 세운 여문(旌門) 안에 <나주김씨정절비>가 있다. 나주김씨는 시집을 오자마자 남편이 병환을 얻어 자리에 눕자 어쩔 줄 몰라 했다. 갖은 방법을 다해 남편의 병구완을 했으나, 끝내 회생하지 못하고 눈을 감자 같이 따라 죽으려 했으나 주변의 만류로 죽지도 못했다. 부인은 자식이 없어 양자를 얻어 집안의 대를 잇게 하고 끝까지 수절하여 남편에 대한 의리를 지켰다.
이 외에도 유물, 유적으로는 선사유적지(土器圓低壺와 마제석촉, 석부가 발견되어 광주박물관에서 보관 중)가 있었다고 하나 주민들은 모르고 있었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참고로 하서 김인후 선생이 〈죽헌정〉을 찾아 선생과 담론하는 자리에서 아래와 같은 시를 지어 현판으로 보존하고 있다. <유헌고출세인간(幽軒高出世人間) 그윽한 난간은 높이 세속에 뛰어났는데,/ 전수곤봉후감악(前秀壺峰後坎岳) 앞에는 호봉이 빼어나고 뒤에는 감방산이 돋았네/ 낙도응무염지벽(樂道應無嫌地僻) 도를 즐기니 어찌 벽지를 싫어하랴/ 안빈하유감천한(安貧何有憾天寒) 가난을 예사로 여기니 추운 날도 걱정이 없소/ 운상주수진연방(雲常住藪眞緣訪) 구름은 항상 숲에 머무니 참 인연을 찾았고/ 조혹투림숙약간(鳥或投林宿約看) 새는 어쩌다가 숲에 나니 미리 약속함인가/ 백좌청담상대석(白座淸談相對夕) 저녁에 마주 앉아 맑은 시를 주고받는데/ 양명추월괘동산(楊明秋月掛東山) 어느새 양명한 가을 달이 동산 위에 솟았네/>라는 내용이다.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죽헌 박염 공은 시를 쓰고 글을 읊으며 김안국, 유희춘, 김인후 등 쟁쟁한 당대의 문인들과 교류한 대학자이다. 〈죽헌정〉의 주인공으로 학행이 높아 1544년 천문습독과 군자감판관에 제수되었다가, 1545년 을사사화가 일어나 어진 선비들이 화를 당하는 광경을 보고 스스로 벼슬자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와 이 정자를 짓고 유유자적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아우인 박제(진위장군)로 하여금 국가사직을 위해 나아가 싸우라고 독려하고, 장남인 경록에게는 백미 수백 석을 의주행재소(임금이 대궐이 아닌 다른 곳에서 잠시 머무는 곳)에 헌상케 하고, 또 본인은 의병장 조헌 선생의 막하로 찾아가 군사들의 사기를 올려주기도 하였다. 또한, 현대 인물로 박병석(전 면성면장), 박계화(무안향교 전교)도 있다.
거처/생가/묘소
도지정문화재로 지정받았던 <박봉기가옥>은 1927년에 세워진 것인데, 그 당시 천석꾼이었던 지방 부호의 전형적인 가옥으로 안채와 사랑채가 건립 당시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아들이 가옥을 관리하면서 도지정문화재 지정을 취소(2007)했다. 가족이 스스로 원해서 문화재 지정 취소 신청을 한 것이다. 도지정문화재 지정 취소 이유를 묻자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고 있다. 문화재로 지정되면 주변 500m 안팎에는 많은 재제가 따르고 다른 사람이 주위에 다른 작업(농사, 집짓기 등)을 할 수 없다.”라고 말한다. 안채는 박봉기의 호를 따서 <매곡재>라 하고 사랑채는 할아버지 호를 따서 <농은재>라 이름 하였다. 또한 아버지의 호를 따서는 정자를 지어 <면산정>이라 하였다. 가옥의 뒤켠에는 전라남도의 보호수로 지정 받은 세 그루의 팽나무가 있다. 그리고 마당 가운데 1999년에 세운 <효부각>이 있으며 안에는 <효부나주임씨사행비>가 있다. 2009년부터 가옥에는 박영후(박봉기의 아들)씨가 거주하고 있다.
조선시대인 1506년에 박익경의 조카인 정간 공이 당시 전라 관찰사로 재직시 기와집을 지어 고절리 박익경에게 준 것을 이곳으로 이건한 것으로, 안채와 사랑채만 남은 박익경의 고택이 있었다고 하나 확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번 조사에서 현재 박익경의 16대손인 박상수(74세, 남, 인터뷰 참석함)가 4~5년 전부터 거주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현재 안채와 사랑채가 보존되고 있으며 박상수 씨는 서울에 거주 중이나 집을 지키기 위해 4~5년 전부터 1주일에 2~3차례 내려와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박익경 고택 주소: 수양길 102-1)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주민 박영후(박봉기의 자)에 의하면 박봉기 가옥은 6.25 한국전쟁 당시 한때는 북의 군인들이 머물렀다고 한다.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미기재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영산강의 물이 ‘수반들’까지 들어오는 경로는 몽탄면 몽강리에서 산정리 산꼭대기를 거쳐 평산저수지에 모여 매곡리는 물론 현경, 해제, 지도까지 흐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