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 축조된 「무안읍성」의 남쪽에 자리한 마을로 성남리라 하며 1988년 성남리 「후청」마을에서 성남1리 「일신동」과 성남2리 「후청」마을로 분리되었다. 「후청」마을은 성남2길을 따라 형성된 마을로 무안읍 중심지와 가까우면서도 조용하고 정갈한 주거환경을 갖춘 마을이다.
지명유래
「후청」마을은 예전에는 「휘청」(帿廳)으로 불렸으나, 1789년의 자료인 《호구총수》에는 읍내면 후청리(候廳里)로 1912년의 자료부터는 외읍면 후청리(帿廳里)로 나온다. 마을 이름에 대한 유래는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지만 ‘후청(候廳)이란 한자의 풀이를 본다면 성(城) 밖에서 손님들을 접대했던 관청이 있었던 마을’이라고 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때의 한자인 후청(帿廳)을 통해서 보면 예전에 ‘병기고가 있었던 곳’이어서 붙인 지명으로도 추정된다.
마을형성(입향조)
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 성하촌(城下村)이지만 실제 마을을 이루게 된 연유에 대해서는 자세하지 않다. 이 마을 촌로(村老)들도 성이 축조되면서 한두 호씩 모여 살았다고 말하고 있다. 「무안읍성」 내에 처음 들어온 성(姓)씨는 읍성이 완성되고 주변이 안정된 1500년대 전후로 순흥안씨(順興安氏)와 나주정씨(羅州鄭氏)가 들어왔다고 한다. 동시대에 「남문밖」이라 불렀고 1741년 조직된 <동계책>이 전해 오는 걸로 봐서 같은 시기로 추정된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미기재
마을성씨
혼합성씨 마을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성남리는 무안읍 소재지에 조선 초 「무안읍성」이 축조되면서 「남문밖/남밖에」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이정표 역할을 하는 장승이 있던 마을이라서 「장승백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행정구역 변경
1789년에 나온 《호구총수》에는 읍내면 후청리로 기록되어 있다. 1895년에는 읍내면, 외읍면으로 부르다가, 고종 광무 원년 1897년에 목포진이 개항되어 감리서 설치로 무안부(府)로 승격되면서 청사를 목포로 이전하고 무안읍 지역은 외읍(外邑)이 되었다. 1910년 10월 1일 무안부가 목포부로 개칭되었다.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외읍면 후청리로 나온다. 1917년의 자료에서 외읍면 성남리로 속한 이후 1987년의 자료에서 무안읍 성남리로 나오며 1988년 분리 후 성남2리 「후청」마을이 되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무안군청 이전으로 기관 유입 및 인구 유입으로 상업지구로 변화되고, 현재도 병원 및 편의시설이 많아 가장 번잡한 마을중 하나이다. 무안읍 소재지 마을 중 역사적인 유물과 유적이 많은 곳이며, 공동자산으로 많은 땅과 복지회관 등이 있다. 또한 주민들을 위한 상여(喪輿)가 백제고등학교 진입로 좌측 범산골의 한 창고에 보존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각각 2층과 3층으로 이루어진 상여인데 3층 상여는 당제를 지내는 곳에 세워진 불망비의 주인인 정준회 씨가 기증한 것으로 마을기금 조성에 유익하게 쓰였다고 한다. 마을공동 창고는 예전엔 벼 수확 후 벼 가마니 등을 보관하는 장소로 이용하였고 임대도 해준다. 「후청동」은 전통적인 농촌마을에서 도시형 주거지로 변화 중인 지역으로 주택과 상가, 연립주택 등이 혼재된 구조를 띄고 있다. 현지 주민들은 농업, 상업, 교육 분야 등 다양한 직종에 종사하며 마을공동체 중심의 생활문화를 유지하고 있다. 농사를 짓는 주민은 약 30명이고 직장, 자영업 등을 한다. 점심 나눔을 하고 매월 정기모임도 한다. 농민들의 주업은 쌀, 양파, 마늘을 재배하고 있다.
주요시설
무안 뻘낙지 골목, 주차타워 및 지상 주차장, 매일 시장, 병원, 약국, 편의시설, 증산도 무안교당, 무상사, 새마을금고
마을변화
「후청동」마을은 도로망과 접근성이 좋아서 무안읍 내외는 물론 무안공항이나 남악신도시와도 가까운 지리적 이점이 있다. 현대에 들어 도시로 확장하는 무안읍의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지역으로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생활공간으로 자리잡고 있다. 새마을금고와 사찰인 무상사가 있다. 또한 각종 편의시설과 모텔, 식당, 한의원, 내과, 학원등이 있어 무안읍에서 가장 번화한 마을이기도 하다. 일부 낙지골목도 후청동 영역에 속한다. 무안읍 소재지 마을 중에서 오랜 역사만큼이나 다양한 문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던 마을이다. 당제, 장승백이, 방직공장, 한약방 등 여유롭고 기부문화가 정착된 곳이며 마을공동 자산도 튼실한 마을이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동계, 부녀회, 노인회
공동이용시설
후청마을 창고, 종탑, 마을회관, 후청공원, 마을정자
전통식품/특산품
양파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도회지마을로서 터미널 뒤 매일시장-장미모텔-무안연합의원 뒷 도로-이치과 뒤-청년치과-파리바게트–양내과-다솜의원 사거리-올리브영-삼성스토어-뻘낙지거리 서쪽 도로-주차타워-버스터미널로 이어지는 도시형 생태환경으로 구성되어 있다.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하는 석장승과 목장승이 있어 「장승백이」, 「장승거리」라고 한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이 마을에는 오랜 역사적 전통을 가지고 있는 당산제가 있다. 마을의 수호신인 당산신에게 마을의 풍요와 평안 등을 기원하는 지역공동체 의례로 당산굿, 동제(洞祭), 당제(堂祭)라고도 한다. 제일(祭日)은 매년 음력 2월 ‘중정일(中丁日)’에 이루어지는데 제관은 생기복덕(生氣福德)을 가려 부정이 없는 깨끗한 사람으로 선정한다. 제관으로 선정된 사람은 산가(産家) 상가(喪家) 등의 출입을 금하고, 궂은 음식을 피하며, 목욕재계를 하는 등 근신한다. 또한 제장(祭場) 주변은 청결히 하고 금줄을 두르고 황토를 놓아 부정을 막는다. 제사에 사용되었던 각종 제구(祭具)들은 창고를 마련하여 보존하였다. 당제를 모시는 곳은 예전 재향군인회 사무실이 있었던 곳의 뒤에 있는 공터이다. 당산나무 세 그루가 서 있는데 뒤에 있는 두 그루의 당목 아래에서 지낸다.
제를 모시는 당묘 자리에는 두 군데의 제단이 있는데, 큰 제단에서는 당제의 원래 목적인 마을의 평안과 화합을 위해서이고, 다른 작은 무덤의 제단은 후손이 없는 할머니를 위한 제사이다. 이 할머니의 무덤은 특별한 사연을 안고 있다. 할머니는 평생을 홀로 살았는데, 죽으면서 유언으로 자신의 전 재산이었던 밭 세 마지기를 마을에 기증하면서 뒷일을 부탁하여, 그 유지를 받들어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는 것이다. 할머니의 밭과 묘터가 무안고등학교 부지로 편입돼 보상금으로 현재는 중사지 앞의 산에 모셔졌다. 1972년 2월까지는 꾸준히 당제가 지속되었는데 이후 지내지 못했었다. 그러자 마을의 젊은이들이 이유 없이 변을 당하여, 마을 어른들 사이에서 당제를 지내지 않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라 여기고 다시 지내기 시작했다고 한다.
장승제도 지냈었다. 장승제는 당산제를 지낸 후 마을 입구 「장승백이」의 돌장승에게 간소한 제물을 차려 놓고, 부녀자들은 합장하거나 양손을 비비며 소원을 빌었다. 무녀나 당골애비도 축원을 하고 마을 사람들은 수시로 액맥이와 질병퇴치를 위해서 밤에 무녀를 불러다가 떡시루, 참기름, 물, 밥, 국 한 그릇, 사과, 배, 명태, 폐백천을 차리고, 북과 꽹과리로 거릿제를 겸해 소지(燒紙)를 올리며 동서남북 사방에 제물을 던지면서 축원을 했다 한다.
유물, 유적
1931년에 세워진 <정준회시혜불망비>가 당산제를 지내는 곳에 있다. 월두회집과 삼성전자 판매점 자리에 석장승 4기와 대추나무로 만들어진 목장승 2기 그리고 5~6기의 선정비가 길가에 세워져 있어서 「장승백이」라고도 불렀다. 두 쌍의 석장승 중 1쌍인 <동방대장군>과 <서방대장군>은 현재 남산 충혼탑 입구에 있으며, 또 1쌍은 서울 정동 전 미대사관 정원에 있다고 한다. 목장승은 썩어 묻혔다고 한다. 선정비 일부도 남산공원 비석군에 옮겨져 있다. 「후청마을」에는 오래전부터 당산제가 있었고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진 마을종(鐘)이 수십 년 역사를 묵묵히 바라보며 세워져 있다. 구리로 만들어진 종은 요즘같은 마이크 시설이 있기 전 마을의 대소사를 알리는 일종의 통신시설이었다. 종을 보호하는 양철 덮개가 있었으나 없어졌다가 도시재생공모사업에 선정된 후 하마거리, 읍성, 석장승 등을 벽화로 그리면서 함께 예쁜 모양의 종탑을 지는 노을과 함께 표현했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마을의 행사를 위하여 주민들의 계미(契米)를 모아 만든 향약계인 <후청계>가 조선 영조 17년(1741)에 조직되었다. 280여 년 전의 동계책으로 원래 이 계에서 발행된 계첩에는 당제(堂祭) 지낼 때 읽는 규약만이 아니라 축문과 진설도 등이 그려져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현재 남아 있는 계책은 겉표지가 ‘목포부 외읍면 후청동 계안’으로 대정 원년(1912)에 만들어진 것으로 원본과는 많이 다르다. 여기에는 제1장 총칙, 제2장 계원이 준수할 사항, 제3장 임원 직무, 제4장 출자, 저금, 식비 및 지출 방법, 제5장 총회와 임시회까지만 나와 있고 뒷장은 없다.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후청」마을의 역사에는 세 명의 걸출한 인물이 나타난다. 한 사람은 정일영 씨로 마을에서 가장 큰 집을 소유했던 사람으로 부친이 정준회 씨다. 이 집은 나중에 김두천 씨에게로 넘어가 방직(베 짜는)공장으로 운영되었다. 서울에서 시계방 운영으로 큰돈을 벌었던 김두천 씨는 국회의원 출마를 위해 무안으로 내려와서 공장을 운영하며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하였다. 1970년대 중반까지 운영되던 공장이 자금 부족으로 문을 닫고 주택도 다른 사람에게 매도되었다. 이후 이 집은 몽탄 사람 최병영 씨에게로 넘어갔다. 두 번째 사람은 양길영이다. 현재 시민약국이 있는 자리에서부터 서울시계방이 자리한 곳까지 땅을 소유했는데, 그곳에서 제재소를 운영하였던 사람이었다. 부자였고 씀씀이가 좋아 주변에 많은 도움을 줬다고 한다. 세 번째는 조약방을 운영했던 조규종 씨다. 정일영 씨 집 옆에서 조그맣게 한약방을 운영했으나 매일 들어오는 현금은 500만원이 훨씬 넘었다고 한다. 조규종 씨는 원래 경찰이었다. 경찰로 근무하면서 한약방을 운영하였는데 한약방이 잘되자 사직하고 한약방에 전념했다. 할아버지가 한의원을 운영했던 적이 있어서 한약 조제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특히 산부인과 전문으로 불임 환자들이 전국에서 찾아와 며칠씩 기다려야 진찰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조규종 씨는 초기에는 무척 가난하여 끼니를 걱정할 정도였다고 한다. 경제적 여유가 생기면서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는 등 지역에 좋은 일을 많이 했다. 박일상 씨는 무안시외버스터미널을 운영 중이며 마을 발전에 기여했다. 이 외에 최명학 현경면장, 정용남 무안읍장, 국순보 5.18 민주화운동 유공자, 이향만 청년회장 및 마을추진위원회장, 임현수 군의원 등이 있다.
거처/생가/묘소
정일영, 정준회 생가, 양길영 자택, 조규종 자택, 김두천 방직공장 운영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당제를 모시는 곳에 느티나무 세 그루가 있고 정자(동각)가 있다. 마을회관이 있기 전에는 마을공원, 마을쉼터였으며, 지금도 주민들이 많이 이용하는 장소다. 자발적 모임인 <무안정원사랑회>에서 「후청」마을 공터에 미니정원을 조성하여 꽃을 심고 잡초를 제거하며 지속적인 관리를 하고 있다.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무안읍성」을 찾아오는 관리나 방문객이 성남6리 「하마동」에서 내려 「후청」마을 장승거리를 지나며 남문으로 입성하였다. 그 길이 처음에 만들어진 <국도 1호선>이 되어 마을 가운데로 지나가며 초창기 시외버스도 <국도 1호선>으로 운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