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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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남3리 무안읍 만창 작성
  • 만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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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총 557세대, 인구 1,139명(남601, 여538) / 2025.12.기준.
자연마을 구성
「만창」마을은 만창, 동학골, 서낭골(성황당), 물맞이골, 치가리 등으로 형성된 마을로 무안읍 소재 마을 중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가지고 있다. 교육기관과 주거지가 밀집된 ‘학사촌’으로 마을경계는 전신전화국 앞길에서 범산골, 아뜨리움아파트까지 이어지며 무안고등학교, 초당대학교, 백제고등학교, 무안교회, 초당요양병원 등을 포함하고 있다.
지명유래
「만창」(萬昌)은 《마을유래지》에는 ‘남문 밖 남쪽에 있는 마을로 선조 때 만호창이 있었던 곳’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주민들은 만호창이 있었다는 기록이나 유래를 전해 듣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유래지에는 “남산골을 흐르는 폭포가 있고 약수터와 울창한 숲으로 가득 차 있어 앞으로 만호(萬戶)가 살 것이라고 하여 만창(萬昌)이라 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2개의 고등학교, 대학교가 개교하였으며 대단지 아파트단지가 형성되어 상주인구 및 이동인구가 많은 마을이 되었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의 입향조라 할 수 있는 성씨(姓氏)는 300여 년 전에 자리 잡은 현풍곽씨(玄風郭氏), 나주오씨(羅州吳氏), 광산김씨(光山金氏) 등 세 성씨(姓氏)다. 《마을유래지》에는 300여 년 전에 이 세 성씨들이 자리를 잡고 마을을 이루었다고 하나, 주민들이 문화의 연속성을 갖고 살기 시작한 것은 200여 년 전으로 추정된다. 그 이후 무안박씨가 이주해 왔다고 하며 신씨도 터를 잡고 살았다고 한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미기재
마을성씨
혼합성씨 마을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마을이름이 없었으나 1912년의 자료인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외읍면 「만창리」 로 나와서 오늘에 이른다.
행정구역 변경
1789년에 나온 《호구총수》에는 읍내면 후청리로 기록되어 있다. 1895년에는 읍내면, 외읍면으로 부르다가, 고종 광무 원년 1897년에 목포진이 개항되어 감리서 설치로 무안부(府)로 승격되면서 청사를 목포로 이전하고 무안읍 지역은 외읍(外邑)이 되었다. 1910년 무안부가 목포부로 개칭되었다.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서 외읍면 「만창리」로 나오며 1914년 목포부와 분리하였다. 1917년의 자료에는 외읍면 성남리, 1957년에는 면성면이 무안면으로 개칭되고 1979년 무안면이 무안읍으로 승격되었다. 이후 1987년의 자료에서 무안읍 성남3리 「만창」마을로 나온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무안군청이 무안읍으로 이전하였어도 무안읍 외곽이었던 「만창」마을에 30여 년 전 초당대와 백제고가 개교하기 이전엔 논농사와 양파가 주업이었다. 주변에 학교가 들어오고 학생을 위한 숙박시설 수요가 급증하자 빌라 등을 많이 지으면서 주민 소득도 높아졌다. 상업 및 자영업 일자리가 늘어났다. 지금은 농업(벼농사 및 양파), 자영업, 직장인 및 학생들이 많은 활력 넘치는 마을이다.
주요시설
백제고, 무안고, 초당대, 초당요양병원, 향군복지회관, 정토미륵사, 엘림교회, 꿈이있는교회
마을변화
이 마을에는 백제고, 무안고, 초당대, 정토미륵사가 자리하고 있으며, 광주-목포 간 <국도 1호선>이 마을 가운데로 지나가고 있어 마을이 동/서로 나누어진 형태다. 마을 아래로는 확장 이전의 <국도 1호선> 도로가 남아 있다. 마을이 넓다보니 열두 고랑으로 표현하기도 하며 마을 경로당이 두 군데 있다. 마을 이장은 세대수가 많다 보니 주민들의 의견을 취합하기가 어렵다고 할 정도다. 「만창」마을은 지명의 유래처럼 만호(萬戶)가 들어설 정도로 번창하고 있다. 우선 1979년도에 실시된 ‘취락구조개선사업’으로 주거환경을 개선하였다. 또한 백제고와 초당대가 들어서면서 젊음이 넘치는 마을을 만들더니, 인재의 요람인 무안고가 통합되어 2015년 신축 이전된 교사(校舍)에서 새출발 기념식을 하면서 명실상부한 ‘학사촌’이 되었다. 예전에는 별다른 소득원이 없어 가정경제에 어려움을 겪었던 마을이었으나 학교들이 들어서면서 마을 상권이 살아나고 학생들이 기숙할 방이 부족하자 양파 저장고로 사용하던 창고마저 방을 만들어 학생들에게 제공했다. 젊은 학생들이 많다 보니 기성세대 주민들에게 불편한 문화도 있지만, 그럼에도 ‘학사촌’의 형성은 마을 전체에 활기를 넣어주고 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동계, 청년회, 부녀회, 노인회
공동이용시설
마을회관(2), 물맞이 공원
전통식품/특산품
양파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예전 <국도 1호선>이 마을을 지나갔고 그 후 광주-목포 간 도로 확장으로 동쪽인 윗마을에는 초당학원 등이 자리하고 있다. 초당학원의 백제고등학교 전신인 백제여자상업고등학교가 1980년 첫 입학식을 하였고, 1995년 초당대 전신인 초당산업대학교가 첫 입학식을 하였다. 2015년에는 통합한 무안고등학교가 이전 개교하였다. KT플라자 옆-무안승원팰리체 에코파크아파트-초당요양병원-무안고등학교-초당학원(초당대 및 백제고)-물맞이 공원이 마을 경계이다.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무안고등학교 아래 연못의 모양이 곡식을 고르는 기구인 ‘키’의 모습이었다. ‘치’는 ‘키’의 사투리로 방죽의 모습이 마치 ‘키’를 닮은 것처럼 보인다 해서 ‘치가리’라 했다. 예전에는 폭이 5m 정도에 상당한 길이의 연못(방죽)이 있었다. 주민들은 그곳에서 조개를 잡고 우렁이와 고기를 잡기도 했다. ‘범산골’은 ‘범바위골’이라고도 하며 백제고등학교 옆 골짜기이며 ‘물맞이골’에는 ‘선량폭포’가 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초당대 축제’는 봄 혹은 가을에 개최하며 ‘물아혜 대동제’라한다. 재학생, 교직원, 졸업생 및 지역주민으로 참여와 관람의 즐거움을 통해 화합의 장을 만들 수 있는 축제로 학과 장기 자랑, 동아리 공연, 초대 가수 등의 공연이 있다.
유물, 유적
<정토미륵사>는 창건 당시 <미륵사>라는 사찰명으로 1472년 혜운화상(慧雲和尙)이 창건하였다. 그 유지(遺址)에는 석불(石佛)대좌가 있고 와당편(瓦當片)과 청자편(靑瓷片)이 출토되기도 했다. 성남리석불(城南里石佛)은 원래 미륵사에 봉안하였는데, 그 후 땅속에 묻혀있다가 1942년 정종보(丁鐘保) 씨가 꺼내 남악사에 옮겨와 봉안하였다고 《마을유래지》(1987, 무안군)에 기록되어 있다. 500여 년 동안 관리가 안 되어 폐사 위기에 있다가 중창의 기회를 맞아 1995년에 대웅전을 중창한 사찰이기도 하다. 이 사찰에는 우리 지역에서는 드물게 ‘비로자나불상’이 있었던 곳이다. 주민들은 이 불상을 <남악사>로 가져갔다고 한다. 불상이 있었던 좌대가 미륵사 대웅전 뜰에 있다.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해남 대흥사의 말사로 있다. 최근 수행단체인 ‘정토회’에서 인수하여 수행도량으로 사용되고 있다. 〈정토미륵사〉라고 한다. 초당대학교가 들어선 자리는 ‘동학골’이라 하는데 초당대학 관계자들은 동학(童學)골이라 한다. 즉 아이들이 학문을 배울 수 있는 배움의 골짜기라는 것이다. 하지만 동학(東學)골로 써야 한다. 왜냐하면 이곳은 19세기 말 이 땅에 커다란 변혁을 가져왔던 동학농민혁명이 전국을 뒤흔들 때 무안의 동학군들이 훈련을 하고 죽창을 만들었던 곳이기 때문이다. 또한 주변 마을의 노인들도 대체로 동학군들이 활동했던 골짜기로 알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에도 무안의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자랑스러운 역사가 있는 곳이다. 1919년 3월 19일 무안 장날, 이 마을의 강지석(만창리)을 포함한 김한근(상사지), 박용규(성내리) 등 24명이 중심이 되어 남산 조산(현재 충혼탑이 있는 자리)에서 선언문을 낭독하고 준비한 태극기를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며 만세를 부르면서 장터로 행진했다. ‘만창리 독립만세운동’ 또는 ‘무안만세운동’으로도 부르는 이 운동은 3.1 운동 이후 전남에서 최초로 일어난 운동이기도 하며, 불의에 맞서 싸웠던 동학의 정신을 계승한 독립운동이었다. 물맞이골은 한국전쟁 때 많은 사람들이 사망한 곳이기도 하다.
설화
초당대에서 정토미륵사로 넘어가는 고개를 서낭골(성황골)이라 하며, 백제고등학교 옆에 있는 골짜기가 범산골이다. 호랑이 모양을 한 바위가 있어서 붙여진 지명이다. 예전 범바위 주변에 나무숲이 없을 때는 마을의 개들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개들이 살지 못하고 죽거나 도망가 버린 일이 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범바위 주변에 숲이 들어서고, 마을에서 범바위가 보이지 않게 되면서부터 마을의 개들이 잘 살 수 있었다고 한다.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강지석 씨는 독립운동가로 1894년 무안군 출생으로 무안 3.1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보안법 위반으로 수감되었으며 1953년 3월 16일 사망하여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기업인이자 초당학원 설립자 김기운 씨는 무안군 몽탄면 출생으로 1920년 출생하여 2018년 별세하였다. 백제고와 백제약품(주), 초당약품(주), 초당산업 등의 설립자다. 의약품업계 최초로 전국유통망을 구축하였다. 이 외에 최주일 변호사, 오만근 교장, 정욱수 대원산업 대표 등이 이 마을 출신이다.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정토미륵사 아래에는 <물맞이 고랑>이라 부르는 ‘선랑폭포’가 있다. 예전에는 여름철 이곳에 물 맞으러 가는 아낙네들로 마을 앞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고 한다. 이 물을 맞으면 관절염을 비롯한 신경통에 특효가 있다는 소문이 나면서, 농번기를 보낸 영광, 함평 등 곳곳의 아녀자들이 물을 맞으러 왔기 때문이다. 특히 물을 맞을 때는 부정을 타면 안 된다는 말이 있어서, 물 맞는 날에 뱀을 보거나 상서롭지 못한 일이 있으며 아무리 멀리서 왔다 하더라도 물을 맞지 않고 다시 돌아갔다고 한다. 이 고랑은 연징산에서 발원하여 내려오는 물줄기가 만들어낸 폭포로 선녀가 옷자락을 날리며 내려오는것 같다고 해 ‘선랑폭포’라고 했다. 수량이 많아 주민들이 물맞이를 하면서 선랑폭포 대신 <물맞이골>로 불리고 있다. 예전에 이곳은 기도처로도 이용되어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들기도 했다. 지금은 공원화되어 무안군민은 물론 외지인들이 즐겨 찾는 관광지가 되었다. 탈북민의 망향을 슬픔을 달래는 <망향의 탑>이 있다.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마을에 <대아농산>이 있다. 70년대 후반 마을 주민들이 마늘 파동을 이용해 부를 축적해 세운 저장 창고이다. 한때는 이 창고가 주민들에게 많은 일자리를 제공하기도 했다.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미기재
기타사항
미기재

출처

각주
미기재
참고문헌
1. 《마을역사자료조사》(무안문화원, 2017) 2. 《마을유래지》(무안군, 1987) 3. 《무안군의 문화유적》(목포대학교 박물관,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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