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마을은 ‘우데미’, ‘아래데미’로 이루어졌으며, 농업기술센타와 실버요양원을 경계로 청천교까지의 영역에 해당된다. 무안읍에서 초당대를 지나 목포 방면으로 1km가량 가면 나오는 마을로 행정구역명은 무안읍 성남4리 대곡이다. 원래는 하나의 마을이었는데 광주-목포 간 국도 1호선이 지나가면서 두 개의 마을로 나뉘어졌다.
지명유래
마을의 원래 이름은 승달산의 맥을 이어 연징산에서 내려오는 골짜기에 큰 마을이 있다고 하여 「대동(大洞)」이라고 했다. 그런데 소화 2년(1927)에 일본인들이 청계에서 무안으로 들어오는 다리 공사를 할 때 일본식 이름인 「대곡(大谷)」으로 바꿔 부른 것이 지금의 마을 이름이 되었다. 또 연징산 주변에 동삼이 있는 골짜기가 있다하여 「삼밭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마을형성(입향조)
마을의 형성은 《마을유래지》에는 ‘김해김씨 김찬식(金贊植)이 임진왜란 때 이 지역으로 피란을 와서 터를 잡아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해지나(제보: 김석암(金石岩), 지형상 무안읍성이 가깝고 옛 지명이 큰골이라는 점에서 보아 더 옛날부터 많은 주민들이 살고 있던 마을이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주민들은 기록과는 다르게 이씨, 김씨, 송씨 등이 이곳에 들어와 살면서 마을을 형성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미기재
마을성씨
김해김씨, 성풍이씨, 최씨 등 혼합성씨 마을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문헌으로 지명의 변화를 보면 1789년의 자료인 《호구총수》에는 마을 이름이 나오지 않지만, 1912년의 자료에서 외읍면 「대동내리(大洞內里)」가 나오고 1917년의 자료에도 외읍면 「대동내리」로 나온다. 이후 1987년의 자료에서 지금과 같이 무안읍 성남리 「대곡」으로 나온다.
행정구역 변경
본래 무안군 외읍면 지역으로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월천리 등 일부를 합하여 무안읍으로 편입되었다. 1917년 《조선면리동일람》에서는 외읍면이 면성면으로 개칭되었고 1957년에 무안면으로 개칭되었다. 이후 1979년에 무안읍으로 승격되어 이에 속한 성남4리 대곡이 되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원래 승달산 골짜기에 자리한 마을로써 큰골저수지 등에서 흐르는 물 등을 이용하여 쌀농사와 함께 양파, 마늘, 깨, 담배 등의 밭작물을 경작하는 시골마을이었다. 그런데 마을 앞으로 큰 도로인 국도 1호선이 나면서 마을의 변화가 급격하게 일어났다. 특히 교통사고가 빈번히 일어나면서 주민들이 고통을 받았으나 농업기술센터를 비롯한 관공서와 인근의 초당대학교를 비롯한 각종 상업시설이 많이 들어오면서 마을이 소도시형태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주요시설
무안실버타운, 큰골저수지, 물맞이공원, 농업기술센터, 새생명순복음교회
마을변화
예전에 마을이 발전하면서 축사가 많이 들어와서 주민들이 고통을 받았으나, 지금은 주민들이 원하지 않아 축사가 모두 없어졌다. 다른 마을에 비해 이주민들이 많은 편이며 주민 모두가 화합하며 평화롭게 살고 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동계, 부녀회, 청년회, 노인회
공동이용시설
대곡마을회관(경로당)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마을 위에는 선랑폭포가 있는데 지금은 물맞이 고랑으로 불린다. 지금은 대대적으로 주변이 정비되어 산림욕장으로 변하면서 군민들을 위한 산책과 휴식공간으로 조성되고 있지만, 한때는 이곳에서 무속(巫俗) 행위를 했었다. 또한, 60년대에는 추석 때면 수 많은 사람들이 모여 난장을 열었던 곳이다. 또 고랑 위에는 60~70년대 소를 키웠던 목장이 있었던 곳이다. 마을의 왼쪽에는 청계면 청천리와 경계를 이루는 시루봉(증봉)이 있으며 조금 더 가면 옥녀봉이 있다. 옥녀봉 밑에는 일제강점기에 계곡을 막아 만들어진 대곡저수지가 있다. 저수지 안에는 주민들이 즐겨 찾았던 넓적한 평상바위가 물에 잠겨있다고 한다. 시루봉 정상에는 일본인들이 산 주변에서 인물이 나는 것을 막기 위해 쇠말뚝을 박은 자국이 있다는데 확인할 수는 없다. 지금은 축구장이 되었지만 얼마 전까지 예비군 훈련장이 있었던 골짜기 주변을 삼바실 고랑이라고 한다. 옛날은 물론, 근대에 들어서도 주민들이 그 고랑에서 산삼을 캐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실지로 이 마을 주민 중 한 사람이 그곳에서 삼을 캐 먹고 그 자리에서 잠들었다 깨어난 적도 있었으며 그 주민은 장수했다고 한다.
동/식물
마을 위쪽의 물맞이 고랑에 생긴 「물맞이 치유의 숲」은 '물, 향기, 바람'을 주제로 조성된 곳으로 다양한 산림 환경 요소들을 활용하여 인체의 면역력을 높이고 건강을 증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여기에는 특히 홍가시나무를 비롯한 다양한 종류의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이를 통하여 숲의 나무들이 내뿜는 피톤치드(Phytoncide)는 우리 몸의 면역력을 강화는 스트레스 감소 및 심리적 안정에 매우 효과적이다. 숲에서 진행되는 치유 프로그램에 참여하면 스트레스 호르몬이 평균 28% 감소하고 전반적인 활력 증진 및 우울증 완화에 도움을 준다. 이처럼 숲의 평화로운 분위기는 심리적인 안정을 가져다주어 자기효능감을 높이는 데도 기여하며, 특히 청소년의 경우에는 숲 활동을 통해 긍정적인 또래 관계를 형성하고 자아 정체감을 향상시키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이 마을에는 우리 지역의 불교 전래와 관련하여 깊은 연관을 지닌 지명이 있다. 마을 뒷산에 스님봉이라고도 불리는 ‘중봉’과 바라봉 또는 바랑봉이이라고 불리는 ‘목탁바위’가 그것이다. 또한 여기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중봉에서 내려온 스님이 마을을 향해 나무아미타불을 외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부르는 ‘나매미’라는 지명이 있으며, 옆 마을인 청천리 앞 들판에도 불교와 관련이 있는 지명인 ‘나분들’이 있다.
주민들 대부분이 홀로 된 할머니들이 많다. 왜 유독 이 마을만 홀로 된 할머니가 많냐고 묻자, 국도 1호선 공사 때문에 그런다고 했다. 즉 국도 1호선 도로공사 때 마을을 감싸고 있는 혈맥을 잘라버려서 남자들이 오래 못 산다고 하는 것이다. 농촌지도소 주변을 ‘수랑골’이라 했으며 호남전력 주변을 ‘송구장터’로 부르기도 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이 마을의 위쪽에는 ‘미륵사(현재 정토미륵사)’라는 절이 있다. 기록상으로 이 절은 1472년 12월에 창건한 것으로 되었으나, 이 절터에서 발견된 비로자나불 불상과 인근 승달산 건너편 기슭에 있었던 「총지사(摠持寺)」의 설립 과정을 보면 창건 시기를 통일신라시대까지 추정할 수 있다. 현재 이 불상은 예전에 ‘남악사(南岳寺)’였던 ‘약사사(藥師寺)’에 있다. 뿐만 아니라 목포대학교에서 발간한 《무안군의 문화유적》을 보면, 이곳 사찰 주변에서 청자 파편도 많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또한 주민들은 일제강점기에는 이곳에 사찰로 여길 수 있는 집이 없었다고 한다. 단지 사찰 터로 여겨지는 곳에 부처석상과 아기 부처 대여섯 구가 널려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근대에 들어와서야 현재의 미륵사가 세워졌다는 것이다. 이처럼 불교와 관련된 인연 때문인지 이 마을에서는 두 명의 스님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목포대학교 자료에 따르면 마을에 두 군데의 지석묘 군이 있는데 모두 5기의 고인돌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바윗등이란 지명이 있는데 창녕조씨 묘로 마을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있다. 그곳에는 얼마 전까지 조상단지(위패 등을 모셔놓은 함)가 있어서 마을 노인들이 치성을 드렸던 곳이다. 현재는 수풀이 우거졌으며 큰 바위를 포함하여 12기의 바위가 놓여 있다.
설화
마을에서 대곡저수지로 가는 길가에 일명 ‘독바위’라고 부르는 큰 바위가 있는데 일명 ‘수명바위’라고도 부른다. 이는 당시 주민 중에 김석암이란 사람의 사주가 단명으로 나타나자 그의 부모는 바위에 이름을 팔기로 했다. 그리하여 그 바위는 석암씨의 이름을 따서 독바위가 되고, 석암씨는 91세까지 장수했다고 한다. 이처럼 예전에는 실지로 사주상 단명으로 나타나면 절이나 바위에 이름을 팔기도 했다고 한다. 주민 중에 한 사람은 그 바위에 치성을 드려 아들을 얻었다고 한다.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장관선(일승건업대표)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이 지역에는 동학과 관련된 지명이 전해오고 있는데 이른바 ‘붉은 고개’ 또는 ‘붉은 잔등’이 그것이다. 현재 무안고등학교와 무안교회 부근으로 동학에 관련된 많은 사람들이 그 곳에서 피를 흘렸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즉 ‘고막원전투’가 실패로 끝나자 동학에 참여했던 많은 사람들이 피할 곳을 찾아 섬으로 가는 길이었다. 토벌대들이 미리 붉은 고개 주변에 진을 치고 대기하고 있다가 보이는 대로 학살했던 현장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던지 핏물이 강을 이뤘다고 한다. 또한 동학혁명 때 이곳은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였다. 즉 집강소가 있었던 청천리와 관아(官衙)가 있었던 무안읍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민들의 이야기로는 ‘예전에는 한낮에도 이 고개를 넘을 때면 몸에 한기가 느껴질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6.25 한국전쟁 때는 이 마을에서 한 사람의 피해도 없었다.
새마을운동 사업이 한참 시작이 될 때 이 마을에서는 미이라가 발견된 적이 있었다. 현재 농촌지도소가 있는 주변을 ‘방애미재’라 하는데 방애미재 앞에서 광주-목포 간 도로 공사 중 발견된 것이다. 이곳에는 밀양박씨 문중의 커다란 묘가 있었는데 그 묘를 옮기는 과정에서 깨끗하게 원형이 보존된 시신을 발견한 것이다. 이른바 물 명당에 해당된 묘 터로 수맥 때문에 수백 년이 지났는데도 시신을 감쌌던 옷이 변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시신도 탈골이 되지 않아 생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고 한다. 요즈음에 그런 시신이 발견되었다면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귀중한 자료로 관리되었을 텐데, 당시에는 유물, 유적을 포함한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희박한 상태여서 시신은 그대로 화장을 해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시체에서 나온 물(屍水)은 약효가 있다고 하여 이 마을 주민들 뿐 아니라 소문을 듣고 달려온 사람들이 다투어서 물을 퍼갔다고 한다. 실제로 마을 사람들 중에 폐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이 물을 먹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심지어는 주민들이 그 물을 팔았다는 사람도 있었다. 또한 무덤에서 나온 각종 부장품은 찾을 수가 없었고 송판으로 된 관은 농자재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그 무덤의 후손은 무덤이 파헤쳐진 후에 계속해서 안 좋은 일이 일어나 집안이 굉장히 어려워졌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