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성」마을은 1988년 성남2리 「후청」마을에서 분리되었다. 무안읍 중심부에 인접한 마을로 무안읍에서 가장 넓은 면적과 약 400여 명의 인구를 가진 대규모 마을이다. 원래 무안읍 교회가 있었던 골짜기에 있었으며, 오른쪽으로 매듭산, 왼쪽으로 국악원이 있었다. 현재는 각종 교회와 종교시설, 우체국, 경찰서, 승달맨션 등 각종 아파트와 다양한 기관 건물이 들어서 있는 복합생활권을 이루고 있다.
지명유래
「산성」(山城)이란 지명의 유래는 무안읍의 조산인 남산에 성(城)이 있었던 데서 비롯된다. 남산에 있었던 성은 산근산석성, 공수산성, 또는 남산산성으로 불리는데 백제시대 때 축조된 성이다. 현재 남산 팔각정에 이르는 정상 부분은 물론 산정(山頂)을 중심으로 곳곳에 석축이 잔존해 있다.
마을형성(입향조)
1988년 성남2리 후청마을에서 분리되어 입향조를 알 수 없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미기재
마을성씨
복합성씨 마을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미기재
행정구역 변경
1789년에 나온 《호구총수》에는 읍내면 후청리에 속하였다. 고종 광무 원년 1897년에 목포진이 개항되어 감리서 설치로 무안부(府)로 승격되어 무안읍 지역은 외읍(外邑)이 되었다. 1910년 무안부가 목포부로 개칭되어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외읍면 후청리로 나온다. 1914년 목포부와 분리되어 무안군이 되었으며 1979년 무안면이 무안읍으로 승격되었다. 1988년 성남2리에서 분리되어 성남5리가 되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산성」마을의 영역은 실로 넓어서 주민들의 성격도 다양하다. 약사사 맞은 편의 수정아델리움에서 시외버스터미널 앞 도로를 기점으로 각종 기관과 건물이 좌우로 늘어서 있다. 원래 <국도 1호선> 도로는 성남리와 성내리를 지나가는 좁은 길이었다. 이후 성남 2리와 5리의 경계인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낙지골목을 지나 무안교회로 이어지는 길로 <국도 1호선>이 확장되었다. 그때는 경찰서 정문이 지금의 후문이었다. 그러다가 다시 새롭게 현재의 광주-목포 간 도로로 <국도 1호선>이 확장되어 지나가게 되면서 구(舊) 길이 되었다. 원래 무안초등학교 부근에 있던 경찰서와 우체국 등은 6.25 한국전쟁 이후에 옮겨온 것이다. 이처럼 도회지 상가로써 넓은 영역에 다양한 계층의 주민들이 살고 있으며, 주로 자영업 또는 직장인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정작 마을회관 등이 없어서 마을공동체로써의 활동이 별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일본인 신사당 옆에 「후청」마을에서 가장 큰 주택을 소유했던 정일영 씨의 2층집이 있었다. 현재는 경찰서 맞은편 민원인 주차장 부지로 한때는 무안국악원이 있었던 곳이다. 구 무안읍교회 주변 좁은 골에서 시작된 「산성」마을은 「후청」마을과 분리 후 가장 넓은 마을이 되었다. 그러나 마을회관이 없는 관계로 주민들과의 교제나 회의, 또 의견 수렴에도 어려움이 많다. 또한 주민들 대부분 토박이가 아닌 외지인들이다 보니 함께 모이기가 더 어렵고 의견도 다양하다. 원주민들은 「후청」마을의 그늘이 너무 커 오래도록 「후청」마을에 속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마을회관 건립 부지를 기증받아 절차가 끝나면 마을회관 건립을 기대하고 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동계, 노인회, 부녀회
공동이용시설
우체국, 숭덕정, 무안군 관광안내소
전통식품/특산품
양파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산성마을은 수정아델리움-버스터미널 낙지거리 동쪽-공무원아파트-KT플라자-맞은편으로 보험공단-무안군 선관위-충혼탑 입구-농산물품질관리원-무안읍교회 경계 지역으로 형성되어 있다.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미기재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매년 새해 첫날과 현충일에 충혼탑 광장에서 참배한다.
유물, 유적
남산공원 아래 주차장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의 신사(神社)가 있었던 곳이다. 주민들이 <신사당>이라 부르는 이곳은 일본인들이 성스럽게 여겼던 곳이었다. 현재는 공원주차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주차장 위에는 무안읍에 흩어져 있던 관찰사와 현감. 역대 무안군수 선정비 및 공덕비 등을 이건하였는데 무안노성원(務安老星院)에서 추진하였다. 충혼탑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 나라의 어려움이 있을 때 조국을 위해 목숨 바친 지역 분들의 뜻을 기리고자 1973년 3월 건립되었다. 2005년 위패봉안소를 건립하여 302위 위패를 모셨다. <항일독립유공인사 숭모비>와 <3.1 독립운동 무안의적비>는 의병활동, 3.1 만세운동, 광주학생운동, 광복군 참여 등 애국지사 17분의 애국정신을 기리고 알리기 위해 1998년 8월 15일 건립하였다. 미군정 시절 무장공비 소탕 시 전사한 장기창 순경의 비가 있다. 맞은편에는 활을 쏘는 <숭덕정>이 있고 입구에는 두 기의 석장승이 자리하고 있다. 원래 「후청동」마을 장승거리에 있었던 동방대장군(東方大將軍)과 서방대장군(西方大將軍)을 옮겨온 것이다.
광산김씨 사당인 <숭현사>를 지나 깊숙한 골짜기에 자리 잡은 <성도사(남악사)>는 1942년 정정보 씨의 선몽에 의해 건축된 사찰이다. 꿈에서 땅에 부처가 묻혀 있어 갑갑하다며 꺼내 달라고 하기에 그 꿈대로 땅속을 파보니 부처가 누워 있었다고 한다. 급하게 꺼내서 〈남악사〉를 짓고 봉안하였다. 불상은 석조비로자나불로 목과 신체 부분이 떨어진 상태였으나 시멘트로 접합하여 보광전(普光殿)에 봉안하였다고 하나 현재는 대웅전만 있다. 원래 이 석불은 초당대 뒤에 있는 미륵사에 있던 것으로, 정정보 씨가 이 사찰을 짓고 옮겨 봉안하고 있으며 기단부만 미륵사에 남아있다. 현재 성도사(남악사)에는 대웅전과 요사채 등의 건물이 있고 보광전은 없다.
공무원아파트 앞에 1982년에 세운 <정암장석진공덕비>가 인도 확장으로 2023년 선산으로 옮겼다. 정암은 몽탄면 출신으로 광주학생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인물이다.
남산성지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남산성은 현에서 남쪽으로 2리 떨어져 있다. 석성이고 둘레가 2,300척, 높이가 11척이고 안에는 샘 3곳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는 석성의 일부 흔적만 남아있다.
1919년 3월 19일 무안 장날 이 마을의 강지석(만창리)을 포함한 김한근(상사지), 박용규(성내리) 등 24명이 중심이 되어 남산조산 등(현재 충혼탑이 있는 자리)에서 선언문을 낭독하고 준비한 태극기를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며 장터로 만세를 부르면서 행진했다.
광산김씨(光山金氏) 사당인 〈숭현사(崇賢祠)〉는 1987년(정묘)에 창건하여 문안공 휘(諱) 양감을 주벽(主壁)으로 하고 낭장공 휘 규(珪), 양간공 휘(諱) 연, 문숙공 휘 주정(周鼎), 문정공 휘 태현을 함께 모셔 매년 3월 회일(그믐)에 유림과 후손들이 향사(享祀)를 봉행하고 있다.
설화
남산공원 입구 좌우에 있는 <성남리 석장생>은 전라남도 민속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석장승은 액운을 막아주고 소원을 들어주며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 역할을 했다. 1741년(영조 17년) 향약계에 「후청」마을 당산제의 기록이 보이므로 장승도 이 무렵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후청마을에서 1984년 이곳으로 옮겨왔다는 기록과 무안군청 앞에 버려져 있다가 이곳으로 옮겼다는 기록도 있다. 장승은 고려·조선시대 역관들의 이정표 역할을 했으며 벅수는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이다.
미륵사(현 정토마륵사)의 비로나자불 좌대의 받침대만 있는데 받침대의 조각기법이 통일 신라와 비슷하고 통일 신라에 비로자나불이 유행했으므로 절의 역사를 약 1,000년으로 잡는다. 또한 이곳에 모셔졌던 부처님은 비로자나불로 모셔갈 때의 현몽은 우리나라에서 도인이 많이 출세하는 정기를 끊기 위해 부처님의 목을 잘라 다른 곳에다 버렸는데 무안읍 사람의 꿈에 현몽하여 “나를 잘해서 제대로 목을 붙여 모셔달라”는 말씀을 하시어 현몽을 받은 사람이 수색하다가 안승산 골짜기 폭포 밑에서 부처님 목을 찾아 부처님의 목을 붙이고 좌대와 함께 남학사로 모셔갔다. 《무안군의 문화유적》(목포대학교박물관, 1986, p.247, 법현스님)
기록물, 문헌
남산입구 선정비군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서오근 시인은 무안문화원장을 역임하였다.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무안읍교회 앞에 1947년 세운 나주정씨들의 <월천사지유허비>가 남아 있고 2004년 <유허비 번역비>를 세웠다. <월천사>는 월탄 정기수와 월봉 정황수 형제를 배향했던 사당이다. 임진왜란의 치욕적인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형제가 의병장이 되어 왜구를 토벌했던 충신들이다. 형제는 무안읍 월천리에서 태어나 일찍이 우계 성혼 선생에게 수학하였다. 월봉은 일찍부터 무예를 배워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두 형제는 의병을 모집하여 임란에 참여하였다. 이후 이순신 장군의 부름을 받아 한산도 해전과 당포해전 등에서 혁혁한 무공을 세웠다. <월천사>는 1868년에 훼철되어 복원이 안 되고 있으며 지금은 유허비만 무안읍 성동리에 서 있다.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남산(191.7m)은 고을 남쪽에 있는 산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1394년(태조 3년) 「무안향교(務安鄕校)」가 세워졌으나 그 후 호환으로 1470년 현재의 교촌리로 이전하였다. 1919년 3.1 독립만세운동이 시작된 곳이기도 하며, 활쏘기하는 <숭덕정>과 <충혼탑>, 항일독립 유공인사 <숭모비>와 3.1 독립운동 <무안의적비> 등이 있고 정상에는 <남산정자>가 있다.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마을회관이 없어 주민 간 소통과 공공편의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어서 주민들은 마을회관 건립을 강하게 요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