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안(西門內)」은 무안읍 소재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옛 무안읍성의 서문 안쪽에 있는 마을을 말한다.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된 읍성(邑城) 내에 있었던 「서문안」마을은 성으로 둘러싸인 취락지로 생겨났으며, 따라서 현재까지 무안의 중심지로서 도회지 마을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지명유래
원래 배가 여기까지 드나들었던 곳이라는 의미인 ‘원두골’이라고 불렀으나, 고려 후기 명종 2년(1172) 무안현이 되었고 1413년(태종 13년) 무안현감이 파견되었다. 1430년 세종 12년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무안읍성을 축조한 후 성의 서문(西門)에 위치하여 ‘서문내(西門內)’라고 하였다. 읍성을 중심으로 형성된 민가들은 현재의 행정구역으로 이어져 무안읍성 안쪽에 있는 성내리(城內里), 남쪽에 있는 성남리(城南里), 성의 동쪽은 성동리(城東里) 등으로 나뉘어졌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에 처음 들어온 성(姓)씨는 읍성이 완성되고 주변이 안정된 1500년대 전후로 순흥안씨(順興安氏)와 나주정씨(羅州鄭氏)가 들어왔다고 한다. 《마을유래지》에는 ‘순흥안씨 안주선(安周善)이 경기도 고양에서 살다가 1500년대 초 중종 때 신흥 세력인 한성판윤에게 밀려 이곳에 낙향한 후 터를 잡으면서 마을이 시작되었다’라고 전한다. 이후 밀양박씨 박신원(朴信元)이 밀양에서 살다가 역시 이곳에 이르러 정착하였다고 한다.(제보: 박용규)
풍수지리(마을형국)
이른바 비보진압풍수(裨補鎭壓風水)의 흔적이 남아있는 마을이다. 지금은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지만 예전 읍성의 동문 밖 용산마을에서부터 중들(중평)을 지나 닭사골을 거쳐 차밭머리까지 토성이 있었는데, 그 위에 울창하게 우거진 숲이 띠처럼 두르고 있었다고 한다. 풍수지리로 봤을 때 무안읍이 쥐 형국이고, 마주 보이는 고절3리 오리정(개설피)이 고양이 형국이라서, 쥐들이 마음껏 활동하려면 고양이에게 보이지 않도록 조성한 비보 숲이다. 이러한 비보진압풍수는 한국 풍수지리학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흉한 지세나 환경을 보완하고 억제하여 길한 기운으로 바꾸는 방법이다.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추구하는 이러한 실용적 지혜는 무분별한 개발로 예전의 숲을 찾아볼 수 없으나 연로하신 주민들의 기억으로 전해오고 있다.
마을성씨
혼합성씨 마을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무안읍은 무안군의 북부에 위치한 읍이자 1969년 신안군과 분군(分郡)이 되면서 목포에 있던 군청사가 무안읍으로 이전하면서 무안군청 소재지가 되었다. 마을의 원래 지명인 「원두골」에 무안읍성을 짓게 되면서 읍성 서문 안쪽의 마을인 「서문내」가 되었다. 읍성 안에는 노상리, 노하리가 있었다. 그 후 「성내리」, 「원성내」 등으로 불렀으며 지금은 「서문안」이다.
행정구역 변경
고려시대는 무안현(務安懸), 조선시대에는 읍내면(邑內面)과 의읍면(外邑面)의 일부였다. 1789년의 《호구총수》에 읍내면 서문내리로 기록되어 있고, 1897년에 목포진이 개항되어 감리서 설치로 무안부(府)로 승격되어 청사를 목포로 이전하고 무안읍 지역은 외읍(外邑)이 되었다. 1910년에 무안부가 목포부로 개칭되어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외읍면 서문내리로 나온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노상리, 노하리, 아후리, 동문내리, 서문내리를 합하여 무안읍에 편입되었고, 3월1일 목포부와 분리하였다. 이후 1917년 《조선면리동일람》에서 외읍면 성내리, 서문내리로 나오며, 1957년 면성면에서 무안면으로 개칭하였다. 이때 「서문안」으로 마을 명칭이 바뀌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69년 도서지역은 신안군(新安郡)으로 육지부는 무안군(務安郡)으로 분군(分郡)되었고, 1969년 12월 28일 무안군 성동리에 현 청사가 준공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79년 5월 1일 무안읍으로 승격되었고 1996년 1월 6일 성내1리와 2리가 행정 분리되었다. 마을이 활성화되고 인구가 늘면서 성내1리와 성내2리를 각각 분리하여 성내3리 서문안마을이 되었다. 2011년 성내1리에서 휴먼시아아파트 단지가 성내4리로 분리되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원래 무안읍성에는 세 개의 문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서문(西門)은 한양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서문을 나서면 오리정이 보이고 고려시대 토성이 있던 보평산 기슭에 있는 성(城)재를 지나서 한양으로 향한다. 성 밖 아래에는 좁다란 길이 있어 성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일반 양민들이 다닌 길로 지금도 서문에 사용했던 주춧돌과 큰돌이 서문다리 옆 담장에 묻혀있다고 한다. 서문 앞에는 해자를 건너는 두 쌍의 노둣돌이 있어 성 밖을 나설 때는 그 길을 건너야 했다고 한다.
예전에는 빈촌(貧村)으로 가마를 매는 등 어렵게 생활하였으나 어려운 환경에서도 주민들이 서로 힘을 모아 협동하고 화합하는 마을의 전통을 이루면서 지켜왔다. 근세를 거치면서 하천을 복개하는 등 마을환경이 변화되어 지금은 무안 읍내에서 잘 사는 마을로 주민들 개개인 삶의 만족도도 높고 장수마을로 알려져 있으며, 특히 지역에서는 드물게 조문화된 상조계인 다매계(喪負契)를 전통적으로 운영하였다. 마을 주민이 상을 당하면 3일 동안 근신하며 고인의 명복을 빌면서 함께 상여를 매는 등 일손을 보태는 것으로 회칙 등 각종 규약을 마련하여 조직적으로 운영하였으나 산업화 및 핵가족, 직장 등으로 지금은 현대식 장례문화를 행하고 있다.
주요시설
무안초등학교, 무안읍사무소, 제일교회, 무학교회, 무안농협, 무안축협 및 마트
마을변화
오랜 역사 문화를 지닌 마을은 무안읍의 중심 마을로 발전해왔다. 특히 무안읍성이 있던 자리를 중심으로 1915년 개교한 무안초등학교와 1969년 무안군청이 무안읍으로 이전한 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현재 무안읍사무소가 있고 무안식당 앞은 1897년 무안읍지에 실린 읍내장(邑內場)인 오일장이 처음 열린 곳이다. 그러다가 이후에 몇 차례 이전하면서 ‘쪼빡샘’이 있었던 금영노래방 부근으로 옮겼다가 현재 무안읍주민자치센터(구 서울약국) 뒤로 옮겼으며 다시 불무제 아래로 옮겼다. 그리고 1983년에 와동마을 시장터로 옮겼다가 2016년 현대화 사업을 통해 쾌적하고 편리한 환경, 특히 아케이드가 설치되어 날씨 영향을 받지 않고 장을 볼 수 있는 현 전통시장 터로 옮겼다. 시장이 열리는 날은 4일과 9일이며, 하절기에는 토요야시장이 열려 지역 문화관광자원 등과 연계하여 지역 특화상품 판매에 주력하고 있다. 지척에 불무공원과 승달예술회관, 무안군 노인복지회관 등이 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동계, 부녀회, 노인회
공동이용시설
마을회관(노인회관), 무안읍사무소, 무안초등학교, 전통시장
전통식품/특산품
양파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이 마을에는 두 개의 우물이 있었다. ‘큰샘’과 ‘작은샘’인데, 큰샘은 무안초등학교 담장 밑에 있는 샘으로 1967~1968년 대한해(大旱害)에도 마르지 않았다. 지금도 보존되고 있는데 1970년대에는 주민 중 한 사람이 이 물로 콩나물을 재배하기도 하였다. 작은샘은 「아대샘」이라고도 부르는 데 축협 자리에 있었으나 도로가 포장되고 마을길이 넓혀지면서 묻혔다고 한다. 마을을 감싸고 흐르던 무안천은 복개되었다. 불무제 수로인 무안천은 홍수 범람 시 길로 물고기가 올라와 주민들이 큰 물고기를 잡는 일이 자주 있었다고 한다.
동/식물
무안읍성 서문 맞은편에 10여 그루의 느티나무가 있었지만 모두 고사되고, 현재는 500여 년 수령의 느티나무 한 그루만 남아서 보호수로 지정(1982.12.3)되어 있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중들, 닭사골, 성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서문안과 동문안으로 나누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서문다리에 있는 느티나무에서 당산제를 지냈다. 주민들의 건강과 안녕을 위해서 샘굿을 포함하여 거리굿 등을 지냈는데 지금은 지내지 않고 있다. 느티나무는 500여 년의 수령이며, 이 나무의 잎이 한꺼번에 피면 그해 농사는 풍년이 든다고 주민들은 믿었다. 그 이유는 봄비가 알맞게 내리면 농업용수 확보와 곡식들이 때맞춰 싹이 나고 잎이 났지만, 가뭄이 들거나 비가 부족할 때는 나뭇잎들도 제 시기에 잎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산제를 지낼 때 주민들이 얼마나 엄격하게 지냈던지 마을 안에서 임신한 여자가 있으며 다른 마을로 피정을 보내기도 하였다.
유물, 유적
무안읍성(務安邑城)은 조선 세종 12년(1430) 왜적의 칩입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된 성이며, 무안 대굴포(大堀浦: 현 함평군)에 수군처치사영이 있을 때 만들어졌다. 평지에 지어진 무안읍성은 자연스럽게 흐르던 개천이 해자로 활용되었다, 1910년 일제강점기 일본의 철거령으로 대부분의 읍성이 철거되었고 무안읍성 안에 현재의 무안초등학교 등이 세워졌다. 무안초등학교는 조선시대 객사가 있던 자리이며, 전매서 부근에는 동헌이 있었고 축협 자리에는 형옥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시절 초등학교를 짓기 위해 객사를 허물 때는 객사 자리에서 구렁이가 나왔다고 하며, 이곳에서 나온 각종 건축자재는 목포 유달산으로 옮겼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말엽에 초등학교 앞에는 소방서를 비롯하여 면사무소가 있었고 무안식당 자리에는 우체국도 있었다. 현재의 무안읍사무소에는 경찰서가 있었다.
또한, 옛 무안읍성 서문 앞의 해자를 건너는 노두다리와 관련한 민담과 함께 중건비도 현존한다. 노두다리는 신축도로 개설시 길 속으로 묻혀버렸고, 그 서문 맞은편으로 늘여서 있던 십여 그루의 느티나무들 중에 현재 남아있는 한 그루의 나무 옆에 1815년에 서문다리를 세운 중건비 ‘서천외석교중건비시주겸감배봉인(西川外石橋重建碑施主兼監裵鳳仁)’이 있다. 이 다리를 중건한 배봉인 선생의 사연이 주민들을 통해서 전한다. ‘배봉인은 이 마을 주민으로서 집안이 넉넉했다. 부족함 없이 생활 해온 그에게 고민이 있다면 아들의 학습 문제였다. 격려하고 질책해도 뜻하는 대로 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마음을 고쳐먹고 아들에게 투자하는 공력과 돈을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쪽으로 생각하고 이 다리를 놓았다.’라고 한다. 그 외에도 거북이 와대가 있는 비를 포함하여 여러 기의 공적비 등이 있었으나 석교중건비 외의 다른 비석들은 충혼탑 아래로 모두 옮겨졌다.
그리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성들’이라 부르는 읍성의 성벽이 남아있었다. 폭이 넓고 상당한 높이의 성벽인데 주민들이 올라가서 놀기도 하고 더위를 식히기도 하였다. 아카시나무가 많이 자랐는데 봄에 꽃 필 때는 많은 사람들이 놀러 왔으며, 특히 한국전쟁 때는 피신 장소가 되기도 하였다고 한다.
마을이 도시화되면서 무안읍성의 각종 유적, 유물과 마찬가지로 읍성을 둘러서 해자로 사용했던 하천 역시 계속 복개되어 도로가 되었고, 급격히 이루어진 마을 공간의 변화는 주로 주민들의 기억으로만 남아있다. 이 마을의 무안읍성 등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와 연구가 필요한 대목이다.
현재 무안읍사무소 옆의 무안식당 자리에서 5일장이 처음 열렸다. 그 당시엔 무안, 일로 함평장이 있어서 함평과 무안은 물론 몽탄 사람들까지 장을 많이 이용하였고, 무안사람들은 옷가게와 신발가게를 주로 했다고 한다. 마을 앞에서 고절리로 가는 길 왼쪽 옆 들판을 ‘중들’이라고 한다. ‘닭사골’은 전통시장 뒤쪽에서 고절리로 가는 길의 산 위쪽에 있는데 둥근 섬 같은 곳을 닭사골 달걀이라고 했으나 현재는 없다.
기타사항
무안읍성은 약 600년 전인 1430년(세종 12년) 만들어진 성으로 평지에 있는 성이자 자연스럽게 흐르던 개천이 해자로 활용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둘레가 473보(1보는 약 180cm)이고, 그 후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둘레가 2,700척, 높이 15척, 성안에 6개의 우물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1척은 30cm) 척으로 계산 시 0.8km 정도이다.
문종(1450~1452) 대에 왜적의 침입에 대비해 성을 수리하기 위해 순찰한 결과를 문종에게 고할 때, 둘레 2,700척, 높이 11척, 여장의 높이는 3척, 문은 3개며, 내문은 2개였다. 성안에 우물은 2개, 샘은 2개, 작은 못 1개, 해자 둘레는 2,893척이라고 무안읍성의 규모를 알리고 있다. 성안은 읍내면으로 동문과 서문 사이에 ‘노상’과 ‘노하’라는 이름이 있다. 1872년 《지방지도》를 보면 남문을 중심으로 왼쪽엔 객사, 연가루, 향청, 사령청, 시장, 산마청, 옥, 경신역, 서문이 있고, 중앙엔 관사청, 읍사창, 장청, 형사청, 군기고가 자리하고, 오른쪽 동문쪽은 동헌, 작청, 관청, 현사, 서창, 훈련청, 성문당, 그리고 남문인 진남루가 있다. 성 밖으론 해자 위에 학교, 불무교, 서교, 중교, 대교, 하교 등 6개의 다리가 있으며, 성밖 서문 쪽엔 향교가 있고 그 옆으론 송림서원이 있다. 곡식과 땅의 신에게 제를 올리는 사직단, 서문에서 북쪽으로 가는 길 쪽에는 전염병으로 죽은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제사를 지내는 여제단이 있고, 동쪽에서 남쪽으로 복룡, 대천, 월천, 대사, 후청 등 마을 이름이 나온다. 객사는 무안의 별호인 면성관이며, 《해동지도》(1750년대 초)나 《여지도》(1795년 이전 제작추정)에는 송림서원이 있으나, 1872년 《지방지도》에 송림서원이 없는 이유는 지도가 그려지기 4년 전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기 때문이다.
국방상 중요한 읍성으로서 여러 번 중수했음을 알 수 있고 일제강점기에 폐성되었고, 1922년 기록물엔 읍성 건축물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음을 알 수 있다. 객사 자리엔 무안초등학교가 지어졌다. 부지는 개인들에게 매도되고 광주-목포 간 도로 공사 시와 성동저수지 축조 때도 석축돌을 이용하여 파괴되었다. 현재 무안읍 성내리와 성남리에 읍성 관련 명칭과 흔적인 석축 일부가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