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의 성내1리와 2리에서 각각 분리되어 형성된 마을로 해당 구역은 무안읍사무소 앞–구 서울약국 옆 엘지전자–무안제일교회-목포식당–읍사무소의 안쪽으로 이어지며, 인근의 「동문안」이나 「서문안」마을보다는 상대적으로 마을 형세가 좁은 편이다. 「남문안」마을은 「무안읍성」의 남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남문안」이라고 한다.
지명유래
성내리는 무안읍 소재지에 있으며 「서문안」, 「동문안」, 「남문안」마을로 이루어졌다. 성내리라는 지명은 조선조 초기에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된 「무안읍성」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성 안쪽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성내3리 「남문안」마을은 읍성의 남문 내에 위치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일부 어른들은 「남문 밖」이라는 지명은 들었지만 「남문안」이란 지명은 처음 듣는다며 생소해하였다. 대신 예전에 무안읍내 전통장터가 있었기 때문에 ‘장터’라는 이름으로 불렀다고 한다.
마을형성(입향조)
기록에 의하면 무안읍에 처음 들어온 성씨(姓氏)는 순흥안(安)씨, 성(成)씨, 윤(尹)씨 등이다. 이들은 향리로써 「무안읍성」이 조성되고, 무안현감과 같은 고을 원님이 파견되면서 토반(土班)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이후 정씨와 박씨 등이 들어왔는데, 「남문안」의 입향조는 어느 성씨가 먼저 들어왔는지 구체적으로 확인되지 않는다.
풍수지리(마을형국)
예전에 무안읍이 쥐 형국이고 「오리정(개설피)」마을이 고양이 형국이어서 「무안읍성」의 동문 밖 용산마을에서부터 중들(중평)을 지나 닭삯골을 거쳐 차밭머리까지 토성과 그 위에 비보 진압 풍수에 따른 숲 띠가 형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에 「무안읍성」의 남쪽에 있는 「남문안」마을은 쥐 형국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는 쥐가 상징하는 생기와 번영, 지혜를 지닌 마을이면서 동시에 외부의 위험을 풍수적 보완 조치를 이루고 있는 형국이다.
마을성씨
복합성씨 마을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성내리는 1982년에 성내1리 「서문안」과 성내2리 「동문안」으로 마을이 분리(分里)되었다. 그 후 <무안읍사무소> 앞을 기준으로 하여 각각 성내1리 남쪽과 성내2리 남쪽을 떼어내어 성내3리 「남문안」마을로 분동하였다.
행정구역 변경
1789년에 나온 《호구총수》에는 서문내나 동문내는 나오는데 남문은 나오지 않는다. 성내리는 본래 무안군 외읍면의 지역인데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무안읍에 편입되었다.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도 남문은 나오지 않는다. 1917년 《조선면리동일람》에서는 외읍면이 면성면으로 개칭되었고, 1982년 성내리가 성내1리와 성내2리로 분리되었다. 이후 1리와 2리에서 각각 분리하여 무안읍 성내3리 「남문안」마을이 되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무안읍의 중심 상업지구인 「남문안」마을에는 조선시대 「무안읍성」내 시장터와 일제강점기에도 시장이 있었다. 그 영향인지 도로를 사이에 두고 성남1리 일신동 마을과 접하고 있는 양쪽 모두 상업지구인, 병원, 약국 등 편의시설 및 상가가 밀집되어 있다. 농사를 짓는 주민들은 소수이며 퇴직자, 자영업, 직장인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다. 하지만 마을회관이 없는 관계로 <노성원>을 회관처럼 이용하여 주민들이 서로 교제를 나누며 만남의 장으로 이용하고 있다. 2011년 <노성원> 옆에 <무안읍노인복지관>이 개관되었다.
주요시설
「남문안」에 있는 <노성원>과 <무안제일교회>는 모두 100여 년이 넘는 역사를 지니고 있다. <무안제일교회>는 1908년 4월 5일 무안읍 성남리 현<무안경찰서> 후문 쪽에 설립된 교회로, 한국전쟁 후인 1955년에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본관은 당시에 지었던 건물이며 성벽과 겹치던 별관은 성내리와 성동리의 경계였으나, 2014년 현 건물로 신축되면서 성벽도 없어졌고 과거의 모습은 없어졌다.
<노성원>은 조선조 말엽인 1874년에 무안읍에 <안읍당(安邑堂)>으로 시작하여 영락계원들로 하여금 관리하게 하였다. 이곳에서 사계절 무안의 안녕과 발전을 기원하는 제를 모셔 왔는데, 일제강점기에는 폐지되었다가 광복이 되면서 부활하였다. 젊은이들이 선인(先人)들의 정신을 계승하고 예의를 존중하게 하도록 남극노인성을 의미하여 <노성원>이라 이름하여 현재까지 이어져 왔고, 지금은 (사)대한노인회 무안군지회 무안읍분회라는 공식 명칭이 있지만 100여 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노성원>이 더 의미 있게 불리고 있다.
마을변화
쪼빡샘과 남문 사이에 오래전부터 무안읍 전통시장의 모태인 ‘무안 5일 시장’이 형성되었으며 이후 불무제 아래 「일신동」마을로 옮겼다가, 1981년도에는 성남리 713번지 「와동」마을로 이전하고 2016년에는 현재 성내1리로 옮겼다. 그리하여 주민들은 「남문안」이라는 마을 이름보다 ‘장터’라는 이름에 더욱 익숙하다. 현재 「남문안」마을은 ‘청정전남으뜸마을’사업을 통해 환경정비, 경관개선, 주민공동체 활성화 등을 진행하였다. 이는 단순한 미화활동을 넘어 지속가능한 마을 발전과 공동체 회복을 목표로 향후 마을의 정체성과 활력을 강화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남문에는 성안에서 유명한 ‘쪼빡샘’이 있었다. 성에는 대략 5~6개의 샘이 있었는데 특히 「서문안」의 ‘콩나물집샘’, 「동문안」의 ‘아대샘’이 유명했다. 또한 웃내 즉 성동제 부근에서 비롯된 수원(水源)이 월성식당의 우물과 쪼빡샘(바가지의 사투리) 그리고 콩나물집샘과 이어진다고 한다. ‘쪼빡샘’은 성남리 6-1번지 부근에 있었는데, 깊이는 1m가량밖에 안 되었지만 깨끗하고 물맛이 좋았으며 1967~1968년 큰 가뭄에도 마른 적이 없었다고 한다. 전해오는 말로는 ‘해방 이후 주변에 있는 어르신들이 무안에 오면 반드시 삶은 돼지고기를 찾았는데 그 이유는 이 우물물로 요리하여 맛이 좋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성황당’은 남문 옆에 있었다고 하나 확인할 수가 없다. 서낭당이라고도 부르는 성황당은 토지와 마을을 수호하는 신을 모시는 당으로써 대부분 마을 입구에 있었다. ‘언덕골’이라 했던 목포철물점 앞은 언덕을 오르는 것처럼 경사가 있었기 때문에 불렀던 지명이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무안읍성」은 무안 대굴포(현재 함평군)에 <수군처치사영>이 있을 때인 1430년(세종 12년)에 만들어졌다. 관방상 중요한 읍성으로서 여러 번 중수했음을 알 수 있고 일제강점기 때 폐성이 되고, 현재의 행정구역도 성을 중심으로 성내리, 성남리, 성동리 등으로 나뉘어졌다. 곳곳에 성터가 남아 있었으나 지금은 개발로 사라졌다. ‘남문’은 구 서울약국과 읍사무소의 중간에 있는 해태마트의 자리에 있었다. 일부 사람들은 청계식당 또는 목포철물점 자리가 남문 자리라고 하나 위치상으로 비슷한 곳이라서 주변에 남문이 있었던 곳으로 보인다. 기록에 따르면 남문에는 <진남루(鎭南樓)>라는 누각이 있었다. <진남루(鎭南樓)>는 남쪽에 있는 문을 뜻하는 말로 대체로 성의 정문에 해당한다. 진남루 앞에 ‘하마거리’가 있었다. 하마거리는 지위 여하를 막론하고 말에서 내린다는 곳인데, 현재 성남리 148번지 부근(옥천식당 부근)으로 성을 찾아오는 손님은 이곳에서 내려 걸어서 남문으로 들어왔다. 들어오는 길이 하마거리–후청동–조약방–구 서울약국–읍사무소로 이어지는데, 이 거리가 예전의 국도 1호선이었다. 또한 이곳으로 작은 시외버스가 다니기도 하였다. 또한, 무안농협 앞에 있는 승달식당을 건축하면서 기반을 다지기 위해 땅을 파는데 땅속에서 도자기를 발굴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오고 있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미기재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미기재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마을 주민들은 아직 마을회관이 없어서 동계와 노인회, 부녀회 등 마을공동체 조직의 형성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며 시급히 마을회관의 신축을 요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