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작성자 정보

  • 성동1리 무안읍 원성동 작성
  • 원성동

  • 작성일

컨텐츠 정보

아카이브 정보

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총 93세대, 인구 123명(남63, 여60) / 2025.12.기준.
자연마을 구성
20여 년 전에 대사동에서 분리된 성동1리 「원성동」은 무안읍성 성벽을 사이에 두고 있는 남문안 옆 마을로 무안의 중요기관이 들어서 있다. 농협 무안군지부, 광주은행, 무안신협, 박병원, 전남약국, 낙지 골목, 무안 터미널, 천주교 무안성당, 서해안 설계사무소 등이 있다. 대체로 무안 공용터미널에서 무안군청까지의 국도 1호선을 끼고 있는 마을이다.
지명유래
성동리(城東里)는 무안읍 소재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조선조 초기에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된 무안읍성 때문에 붙은 이름으로 ‘성 동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성은 무안 대굴포에 수군 처치 사영이 있을 때인 1430년(세종 12년)에 만들어졌다. 무안읍성은 평지에 자리 잡고 있으며 둥근 원형을 이루고 있는 게 특징인데, 자연스럽게 흐르는 개천을 이용하여 해자를 이루고 있는 모습이 독특하다. 남문, 서문, 동문 등 세 개의 문이 있었으며 현재의 행정구역도 성을 중심으로 성내리, 성남리, 성동리 등으로 나뉘었다. 그렇듯이 성동리의 대사동에서 분구한 「원성동」은 ‘원래의 성동’이라는 뜻을 지닌 지명으로 추정된다.
마을형성(입향조)
비교적 최근 대사동에서 분구된 데다가 무안읍의 시가지로서 전통마을로 구분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나, 대사동의 입향조로 거론된 서(徐)씨, 고(高)씨, 박(朴)씨를 비롯하여 조선 성종 대의 나주김씨 김수남과 제주양씨 양의남을 들 수 있겠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미기재
마을성씨
복합성씨 마을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미기재
행정구역 변경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무안현 읍내면에 속한 「대사동리」로 나오며, 1912년의 자료에서는 외읍면의 대천정리, 마기곡리, 용산리, 복룡동 등으로 관련 지명이 보이지 않다가, 1917년의 자료에서 외읍면 성동리 「대사동」으로 나온 이후 1988년에 무안읍으로 관할이 바뀌었다. 20여 년 전에 「대사동」에서 분리되어 성동1리 「원성안」마을이 되어 현재에 이른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현재 이 마을에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살고 있지만 예전에는 정참봉, 박참봉, 김참봉 등 세 참봉의 영역에 속한 마을이었다. 무안읍성의 해자가 된 하천을 경계로 성동리와 성남리가 구별되기 때문에 낙지 골목을 경계로 성남과 성동으로 나눠진다. 지금의 낙지 골목은 웃내(성동제 주변)에서 흘러내린 하천을 복개하여 들어섰다. 그리하여 행정구역을 달리하면서 마주 보는 상점들이 많다. 예전의 월성식당을 포함하여 농협 군지부가 있는 자리 주변은 김참봉의 땅이었고, 그 옆 천주교 성당을 비롯하여 무안공원, 약사사 등은 정참봉 땅이었다. 그 외 원성동 마을의 땅은 박참봉의 소유라 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현재 도회지와 농경지가 혼재한 이 마을의 주민들은 주로 양파 등의 농업과 각종 상업활동에 종사하며 비교적 안정된 경제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주요시설
무안 버스터미널, 천주교 무안성당, 광주은행, 농협, 남양 주유소
마을변화
읍내 중심 지역으로 상권이 발달하여 외지인의 유입이 많아지면서 마을의 주민 모임들은 거의 사라졌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마을회관도 없고 노인회, 부녀회도 조직되어 있지 않다.
공동이용시설
미기재
전통식품/특산품
전해오는 말로 ‘해방 이후 주변에 있는 어르신들이 무안에 오면 반드시 삶은 돼지고기를 찾았는데, 그 이유는 월성식당 우물의 물로 요리하면 맛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하며, 실제로 월성식당의 돼지고기 수육은 ‘무안 맛의 원조’였다고 강조한다.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예전에 ‘웃내’라고 부른 ‘성동제’에서 흐르던 월천(月川)의 물줄기가 원성동 마을을 감싸고 흘렀었다. 무안읍이 지금처럼 발전하기 전에 대림장 부근에서 비롯된 한 줄기 또랑물이 천주교 성당을 지나갔다. 그리고 팽나무 거리와 똑다리 그리고 구슬나무 거리를 지나 파크랜드 가게를 거쳐 하천으로 합류했다. 나이 지긋한 주민들은 이 또랑에서 고기도 잡고 목욕도 했다고 회상한다. 또한, 월성식당 자리에도 물이 잘 나오는 우물이 있었다. 웃내 부근에서 비롯된 수원(水源)이 월성식당의 우물과 ‘쪼빡샘’ 그리고 초등학교 뒤 콩나물집 샘이 일치한다. 쪼빡샘은 현재 금영노래방 부근에 있었는데, 깊이는 1m가량밖에 되지 않았지만 깨끗하고 물맛이 좋았으며, 물의 양이 많아 1967~1968년의 큰 가뭄에도 물이 마른 적이 없었다고 한다.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미기재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현재 의료보험 조합 건물 뒤에 있었던 정참봉의 집이 얼마나 잘 지어졌던지, 용인 민속촌에서 본채를 해체하여 그대로 옮겨서 활용하고 있다. 전라남도 민속자료(제12호)로 지정되었던 ‘정득수 가옥’으로 현재는 문간채만 남아 있다. 얼마 전까지 문간채 앞에 문화재임을 알리는 입간판이 있었으나 현재는 사라지고 없다. 문간채의 구조는 일자형 3칸으로 가운데 칸에 대문이 나 있고 좌우에 1칸의 방이 들여져 있다. 3량의 간단한 구조로 기단 없이 화강암 주초 위에 두리기둥을 세우고 부재를 다듬는 치목이 매우 견실하게 되어 있다. 그리하여 문간채 상량을 보면 대정 4년 을묘(1915)에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안채는 1911년에 건립되었다고 하나 경기도 용인에 있는 민속촌으로 가져가서 없고 그 자리에는 일반 민가가 들어서 있다. 안채와 문간채를 구분하는 내부 담장이 있는데 민가에서는 보기 드문 전돌(전돌은 벽돌과 같은 의미로 쓰이기도 한데, 벽에 전통성이나 장식성을 강조할 때 쓰이는 벽돌의 또 다른 용어이기도 하다. 고분이나 능에 많이 사용했다.)로 여러 가지 문양을 새긴 꽃담이 남아 있다. 또한, 절이 있었던 공산(貢山, 현재 성동공원, ‘바산’이라고도 했다)은 당시 주정 원료를 다루었던 정참봉의 손자에 의해서 삼학 소주로 넘어갔는데, 삼학 소주 사장은 그때 산 밑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불상, 석등, 5층탑, 사자상, 당간지주 등을 모두 서울로 가져갔다. 주민들의 전언에 의하면 그때 이러한 유물들을 가져가는 기간이 한 달이나 걸렸다고 할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고 한다. 그중에서 약사상은 바위에 조각한 것이기 때문에 가져가지 못하고 다른 문화재는 전부 실어 갔다고 한다. 삼학 소주 측은 지역 문화재를 실어 간다고 주민들이 반대할까 하여 현재의 ‘노성원’에 집을 지을 수 있도록 성금을 제공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현재 성동공원인 공산은 무안군의 소유가 되었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정승우(고려내화 부사장), 박의남(삼영검사 이사), 강성석(조선대 교수), 정해병(우체국장)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미기재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미기재
기타사항
미기재

출처

각주
미기재
참고문헌
1. 《마을역사자료조사》(무안문화원, 2017) 2. 《마을유래지》(무안군, 1987)

본문

메모

관련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