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마을은 승달산맥인 연증산의 한 줄기인 매봉 골짜기에 안겨있는 자연마을이다. 매봉의 왼쪽으로는 원당뫼가 뻗어 나가 그 아래에 무안군청이 들어서고, 오른쪽으로는 산맥이 뻗어 내려 무안병원을 지나 예전에 영산강 물이 들어왔던 들판을 향해 뻗어 내리고 있다.
지명유래
「용산(龍山)」은 성동3리에 속한 마을로 마을의 뒷산이 ‘용의 형상’을 하고 있어서 붙은 이름이다. 《마을유래지》에 따르면 ‘마을 뒷산의 지형이 용(龍)과 같다고 하여 용산(龍山), 비룡산(飛龍山)이라고 부른다.’라고 하였다. 그렇듯이 마을의 주산인 연징산의 한 줄기인 매봉의 형상이 용과 같아서 「비룡동(飛龍洞)」이라고 부르다가 「용산」마을이 되었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의 입향조에 대하여 《마을유래지》에서는 ‘마을에 전해진 바로는 처음 이 마을에 기반을 닦은 성씨는 남평문씨(南平文氏) 문사일(文士日)로 원래 그는 나주 남평에 살다가 무안을 살펴보고 이 마을의 산세가 수려하여 이주 정착하였다고 한다.(제보: 문홍재)’라고 하였다.
하지만 이후 진행된 마을 조사에서는 이 마을에 나주김씨, 제주양씨, 남평문씨 등 세 성씨가 점차적으로 들어와 마을을 이루었으나, 이 중에서 처음 들어온 성씨가 매봉 너머 대사동에서 들어 온 나주김씨라고 한다. 또한, 무안군의 《입향시조와 성씨 자료》에 따르면 나주김씨 김수남(1487~1540)이 나주 거평에서 살다가 이곳으로 왔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후에 제주 양씨 양의남(호-月軒)이 임진왜란 때 능주 월곡에서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마을은 길에서 깊숙하게 안으로 들어왔으며 지형상 와우(臥牛) 형국으로 편안한 느낌을 준다. 이러한 지형 때문에 6.25 한국전쟁 때는 무안읍 등 주변에 사는 사람들이 몸을 피하러 찾아오는 피난지 역할도 했다.
또한, 주민들은 마을의 전체적인 모습을 용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으로 보고 있다. 실지로 용의 알로 여겨지는 바위가 마을 한 주민의 집에 있었다. 그런데 이 알이 외부의 충격에 의해서 깨졌을 땐 마을에 좋지 않은 일이 연이어 일어났다고 한다. 이를 풍수적으로 보면,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받으며 풍요로움과 편안함 속에서 주민들이 안정적으로 삶을 꾸려나갈 수 있는 터전이라고 한다. 동시에 '용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라는 점은 이 마을이 단순한 길지를 넘어 미래 세대에 걸쳐 잠재력과 위세 그리고 비범한 인재들을 배출할 것으로 해석된다.
따라서 마을을 가르고 지나가며 매봉에서 흐르는 맥을 자르는 811번 지방도로가 개설될 때 마을주민들은 “용의 혈을 자른다.”고 항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공사로 인해 마을주민 30여 명 이상이 갑자기 목숨을 잃게 되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고 한다.
마을성씨
복합성씨 마을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자료를 통해본 지명의 변화는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무안군 읍내면 비룡동으로 나오다가 1912년의 자료에서 외읍면 용산리로 나오고, 이후 1917년의 자료에서 외읍면 성동리 용산으로 나온다. 우리 지역에는 무안읍의 용산과 복룡, 일로읍의 복룡리, 청계면의 복룡, 해제면의 용산마을처럼 마을이름에 용(龍)자가 들어가는 것이 많다. 이는 대체로 지형적인 특성을 나타내는 이름으로 강이나 바다를 향해 산의 맥이 흐르고 있으면 붙여지는 이름이다. 주민들은 옆 마을인 성동4리 복룡은 용이 엎드려 있는 마을이지만, 용산은 용이 비상하는 마을이라고 비교를 하기도 한다.
행정구역 변경
「용산」마을은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무안현 읍내면에 속한 동문외리로 나오고, 1912년의 자료에는 무안군 외읍면의 용산리로 나오며, 1917년의 자료에서 외읍면 용산리와 성동리, 동문외, 대천정, 대사동, 마기곡, 복룡리, 지촌 등 7개 마을이 나온다. 이후 1988년의 자료에서 무안읍 성동리의 「용산」과 「대사동」, 「여트물」, 「실학실」, 「복룡」 5개 마을이 나오며, 현재는 무안읍 성동리 산하 「용산」마을 포함해 6개 마을로 이루어졌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원래 이 마을은 마을 가운데를 흐르고 있는 하천을 중심으로 옹기종기 이루어졌다. 조선 시대까지만 해도 마을 앞으로 영산강물이 들어왔으며, 그 물줄기는 현재의 불무제 공원에 있었던 불무제 저수지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식수나 농업용수로는 부족하여 주민들은 물을 소중히 여겼으며, 1940년도에 이르러서야 마을 뒤 용산골에 용산저수지가 만들어져서 비로소 마을이 풍족하게 살게 되었다. 실제로 그때부터 주민들의 살림살이가 펴져 지금은 다른 마을 못지않은 넉넉함을 갖출 수가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현상은 풍수 사상을 빌어서 용이 물을 만나게 되니까 마을이 흥성해졌다고 믿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처럼 저수지를 소중하게 여긴 주민들은 다른 마을의 저수지가 농업기반공사 소속으로 넘어갈 때에도, 이 마을의 저수지는 마을 소유로 만들어 주민들이 굳게 지키고 있다. 그러다 2002년부터 시작된 하천복개사업으로 마을에 큰길이 나면서 현재처럼 마을의 규모가 잡히기 시작하였다.
주요시설
무안종합병원
마을변화
근세기에 들면서 마을 앞으로 광주-목포 간 도로가 생기고 「성암」마을로 이어지는 길이 생기면서 무안병원이 들어왔다. 또한 도로변으로 여러 상가, 창고, 기업들이 들어오면서 양파, 마늘과 같은 밭농사를 주로 하는 농촌 마을에서 도시 근교 마을로 점차 발전하였다. 그렇듯이 마을주민들은 여러 성씨와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도 서로 얼굴을 붉히는 일이 없을 정도로 화합이 잘되는 것을 자랑으로 삼고 있다. 주민들은 이러한 기풍을 서로 남의 잘못을 감싸서 안아주는 넉넉함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동계, 부녀회, 노인회
공동이용시설
용산새마을회관, 용산경로당
전통식품/특산품
마늘, 양파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마을 입구에는 다른 마을에서는 볼 수 없는 소나무와 느티나무를 주종으로 한 숲이 조성되어 있다. ‘마을이 가려져야 잘 산다.’라고 예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말에 따른 것이다. 이른바 ‘비보숲’의 성격을 띠는데 ‘마주 보이는 감방산에서 키질을 하면 이 마을에는 쭉정이만 날아든다’라는 어느 어른의 지적에 따라 마을을 보호하기 위하여 조성한 숲이라고 한다. 이 숲은 입향조인 남평문씨가 조성했다고 한다.
동/식물
마을 앞에 당산나무로 여겨지는 나무가 세 그루 있다, 나무 둘레가 각각 4m, 2m 60cm가 넘는 나무들로 수령은 대략 180년 정도로 추정된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남아 있는 지명으로 무안병원 뒷산의 ‘실학실’로 넘어가는 재를 ‘된재’라 하고, 마을에서 성암마을로 넘어가는 고개를 ‘어등개재’, ‘여시밭골’로 불렀으며, 이곳엔 ‘절골’도 있다. 한우촌과 요양병원 사이에 있는 골짜기를 ‘구남골’이라고 하는데, 이는 한 가정에서 아들 9명을 낳았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그리고 무안병원이 있는 자리는 ‘밤남골’이며, 마을에서 대사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삽바웃재’라고 하고, 마을 앞길 건너의 들판을 ‘수항실’이라고 부른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마을에서는 매년 1월 14일에 당산제와 용왕제를 지낸다. 당산제는 오래전부터 내려온 풍습이지만, 저수지에 용왕제를 지내게 된 것은 해마다 저수지에 사람이 빠져 죽으면서 시작되었다. 그렇게 주민들이 정성스레 용왕제를 지내면서 불상사는 멈췄다. 마을 앞에 있는 ‘살맥이독’에도 예전에는 제사를 지냈으나 현재는 지내지 않고 있다. 주민들은 당산나무 잎이 피어나는 것을 보고 그해 농사의 풍흉을 점쳤다고 한다.
유물, 유적
마을의 저수지 위에 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폐쇄되었다. 처음에는 이곳에 무당이 살았으나 후에 「용두사」로 변했다가 「용주사」로 개칭되어 사찰의 모습을 갖추었으나 얼마 전에 아예 문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