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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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동4리 무안읍 복룡 작성
  • 복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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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브 정보

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총 71세대, 인구 102명(남55, 여47) / 2025.12.기준.
자연마을 구성
「복룡」마을은 실학실, 각시골, 개장뫼, 복룡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으며, 무안읍 소재지에서 나주 쪽으로 약 1km 거리에 있다. 목포-광주 간 국도 1호선이 마을을 윗마을과 아랫마을로 나누고 있다. 주민들은 마을이 자리한 위치가 용머리에 해당하기 때문에,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마을에서 인물이 나지 않도록 용머리를 동강 내기 위하여 마을을 가르는 길을 냈다고 보고 있다.
지명유래
우리 지역에 「복룡(伏龍)」이라는 이름의 마을이 네 군데나 있다. 일로읍 복룡리, 삼향면 지산리 복룡마을, 청계면 복룡리와 무안읍 성동4리 복룡리가 그것이다. 이런 이름을 지닌 마을들의 지세를 보면 모두 해안을 끼고 있으며, 낮은 산맥이 해안을 따라 같이 하고 있어서 마치 용이 엎드려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무안읍의 복룡마을도 영산강 간척사업이 시작되기 전에는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와서 연징산의 맥을 이은 안고랑과 개장뫼가 마을을 받쳐주는, 마치 ‘웅크리고 있는 용’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마을 이름을 「복룡」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마을유래지》에서도 ‘산세가 용이 엎드려 있는 형태라 하여 「실학실」 또는 「복룡」이라 부른다.’고 하였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의 입향시조는 《마을유래지》에나 주민들이 ‘지금으로부터 300여 년 전에 청계 도대에서 살다가 결혼 후 분가하여 이곳으로 이주한 함풍이씨 이기순(李基淳)’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무안군의 《입향시조와 성 씨 자료》에는 이 마을에 처음으로 들어온 이가 무과 급제로 고성현감을 지내다 인종(1544~1545)의 서거 후 이곳에 자리 잡은 나주정씨 정이하(鄭以夏, 호-해은) 공으로 보고 있다. 그의 아들 지주는 어모장군이었고, 철주는 선전관이었으며, 손자인 정기수(鄭麒壽, 호는 월탄(月灘))와 정황수(鄭凰壽, 1562~1628, 호는 월봉)는 임진왜란 참여로 원훈에 기록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이 두 분을 모셨던 사당인 ‘월천사지(月川祀址)’가 이 마을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볼 때, 입향조는 나주정씨로 여겨진다. 마을의 또 다른 한 축인 김해김씨 입향조는 김봉오(1802~1861, 자-서기, 호-성계)로 영광에서 이 마을로 1800년대 중반에 이주하였다.
풍수지리(마을형국)
원래 복룡마을의 지형은 해안을 끼고서 낮은 산맥으로 해안을 따라 같이 하고 있어서 마치 용이 엎드려 있는 모습이다. 승달산의 지류인 연징산의 맥을 이은 「안고랑」과 「개장뫼」가 마을을 받쳐주며 마치 웅크리고 있는 용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복룡형국(伏龍形局)은 풍수지리에서 매우 강하고 길한 형상으로 웅크린 용이 마을을 든든히 지키고, 그 아래에 생기와 재물이 응축되어 주민들의 복록과 안정은 물론 후손들의 번영을 약속하는 길지라고 한다.
마을성씨
복합성씨 마을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자료를 통해본 지명의 변화는 1789년의 《호구총수》에서 무안군 읍내면 「복룡동리」로 나오다가 1912년의 자료에서 외읍면 「복룡동」으로 나오고, 이후 1917년의 자료에서 외읍면 성동리 「복룡리」로 나온다. 이후 1987년의 자료에서 무안읍 성동리의 「복룡」으로 나온다. 예전 《마을유래지》에 따르면 당시의 행정구역상으로 성동4리는 「복룡」과 「실학실」 두 개의 마을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나 실학실은 ‘복룡마을 안에 자리하고 있는 풍수상의 한 터로 학을 잃어버렸다’라는 의미의 「실학실(失鶴室)」이란 곳을 가리켰다. 그런데 복룡마을에 도로가 나면서 아랫마을, 윗마을로 나뉘어 윗마을은 「실학실」, 아랫마을은 「복룡」이 되었다. 이렇게 편의적으로 갈라서 불렀으나 주민들은 「실학실」이 마을지명이라는 것 자체를 모르고 있었다. 《호구총서》 등 지명 관련 자료에는 「복룡동리」는 나오지만 「실학실」이란 지명은 나오지 않는다.
행정구역 변경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무안현 읍내면에 속한 복룡동리로 나오고, 1912년의 자료에는 무안군 외읍면의 복룡리로 나오며, 이후 1988년의 자료에서 무안군 무안읍 성동리에 속한 성동4리 복룡마을로 오늘에 이른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원래 이 마을은 주민들의 화합과 협조가 잘 이루어져 살기 좋은 마을이었다. 특히 주민들의 목소리가 마을 밖을 벗어난 적이 없음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을 정도이다. 새마을지도자인 백계복 씨는 건강관리실, 마을회관, 유산각 등을 짓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마을회관 앞에는 김기대 마을 노인회장의 공적비가 서 있다. 도시 근교인 마을의 주민들은 주로 벼농사와 양파, 마늘 등 밭농사를 생업으로 하며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다.
주요시설
쓰레기 소각장, 상하수도 사업소, 무안교통
마을변화
이 마을은 마을 가운데로 ‘국도 1호선’이 지나가면서 주민들은 늘 교통사고의 위험에 불안해하고 있다. 또한 이에 더하여 마치 옹벽처럼 마을을 막는 무안읍 우회도로가 마을 뒤로 나면서, 주민들의 조망권을 저해함은 물론 농사를 짓는 데도 큰 불편을 주고 있어서 주민들은 이에 대한 대책을 계속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도로변을 중심으로 들어서는 각종 상업, 기업시설들을 중심으로 마을의 변화가 크게 일어나고 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부녀회, 청년회(1968년 회원 45명), 목장, 남조직회
공동이용시설
마을회관, 경로당, 농업인 건강관리실, 유산각, 동각 3개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복룡저수지 위에 주민들이 ‘여시밭굴’로 부르는 곳의 산 정상에 큰 샘이 있다. 이 샘 옆에 있는 커다란 바위 아래에서 나온 물이 고여서 생긴 샘이다. 주민들은 이 샘을 ‘선녀샘’ 또는 ‘달내샘’ 곧 ‘월천(月川)샘’으로 부르고 있다. 이 샘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달내’를 이루어 마을로 흐르며 국도 1호선도 이 내를 가로지르는 복룡교 위로 지나고 있다. 예전에는 이 샘에서 너무 많은 물이 솟아 나와 여름철이면 마을이 수해를 입는 등 피해가 컸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 마을 앞을 지나던 스님이 샘이 있는 산의 지형을 보고 ‘장차 이 샘을 막지 못하면 마을이 큰 화를 입겠구나!’ 하고 도술을 부려 물이 나오는 곳을 막아 버렸다고 한다. 그 이후부터는 물이 알맞게 나와 마을에서 물로 피해를 보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또한 이 산에서는 한옥 구들장에 사용하는 일명 ‘방돌’이 많이 생산되어, 한때는 함평, 목포 등 인근 지역에서 방돌을 구하기 위하여 많은 사람이 다녀갔다고 전한다. 이 외에도 마을에는 두 개의 샘이 더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 마을 위에 축조된 저수지는 물의 양이 많아 함평 엄다면의 농지까지 적셔주었다고 한다.
동/식물
당산나무 두 그루가 있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현재 남아 있는 지명으로는 안고랑, 큰고랑, 작은고랑, 여시 밭굴, 범바위, 질몰동(말을 많이 키웠다 해서 부르는 지명), 개장뫼, 각시골(학터), 선녀가 내려와 목욕했다는 선녀샘 등이 남아 있다. 여시밭굴 너머에는 쓰레기소각장이 들어서 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당산나무가 있는 것으로 봐서 예전에는 당산제를 지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는 지내지 않고 있다.
유물, 유적
마을에서 조금 올라간 복룡저수지 위에는 여러 개의 고인돌이 널려 있었는데, 서해안고속도로가 나면서 현재는 현경면 들머리에 마련되어 있는 「고인돌공원」으로 옮겨져 전시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마을 여기저기에 고인돌로 추정되는 큰 돌들이 많이 있었으나 묻어버리거나 치워버린 일이 많았다고 전한다. 특히 현재의 마을회관 자리에는 주민들이 용의 거품이라고 부르던 ‘여의주’에 해당하는 큰 바위가 세 개 있었는데 마을회관을 지으면서 땅속에 묻어버렸다고 한다. 또한, 이 마을에는 임진왜란 공신으로 원훈에 기록된 정기수(鄭麒壽, 호-월탄(月灘))와 정황수(鄭凰壽, 1562~1628, 호-월봉(月峯))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무안지방 사람들의 발의로 창건된 사당인‘월천사(月川祀)’가 1708년(숙종 34년 혹은 1790년)에 창건되었다. 하지만 1868년(고종 5년)에 훼철 후 터만 남아있다가 1947년에 <월천사유허비(月川祀遺墟碑)>를 세웠다. 현재 무안 공용 버스터미널 앞에 있는데 2004년에는 그 옆에다가 유허비의 국문 번역비를 세워서 관심 있는 사람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
설화
「실학실」에 대해 전해오는 이야기로 ‘이 터에 집을 지으면 부자가 된다’라는 속설이 있다. 그래서 실학실에 집을 지을 때는 먼저 담장을 치고 본채를 지어야 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본채를 먼저 지으면 학이 날아가 버리기 때문에 복이 사라져 버려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실학실 터에는 집이 지어진 적이 없으며 예전에는 우사가 있었으나 현재는 버려져 있다.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미기재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미기재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미기재
기타사항
미기재

출처

각주
미기재
참고문헌
1. 《마을역사자료조사》(무안문화원, 2017) 2. 《마을유래지》(무안군, 1987) 3. 《입향시조와 성씨 자료》(무안문화원,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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