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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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동5리 무안읍 대사동 작성
  • 대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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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브 정보

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총 98세대, 인구 134명(남77, 여57) / 2025.12.기준.
자연마을 구성
성동5리인 「대사동」은 성동저수지 아래로 약사사, 마구실, 삽바웃골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졌다. 원래 성동1리였는데 무안군청을 비롯한 관공서 및 문화기반시설, 각종 상업시설 등이 많이 입주하며 마을이 커져서 분리되어 「대사동」이 되었다.
지명유래
마을 이름의 유래는 큰 사찰이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대사동」 일대가 모두 절터였다. 「대사동(大寺洞)」이란 이름만큼이나 불교와 관련된 사찰이 많았고 불세(佛勢)가 성했던 곳으로 예전에는 「절골」이라고 불렸다. 주민들의 이야기로는 이곳에서는 "버선발(또는 벗은 발)로 남산까지 다녔다"거나 또는 "팔만구천 암자의 절세를 갖추고 있었다"라고 할 정도로 사찰이 많았었다고 한다. 현재 남아 있는 무안 「약사사(藥師寺)」는 고려 태조 원년(918)에 성명 미상의 대사가 창건한 「남악사(南岳寺)」 또는 「남학사(南鶴寺)」가 폐찰 된 자리에 1972년 「대우사(大又寺)」를 지었고 이어서 1983년 「약사사」로 개명하여 중창한 절이다.
마을형성(입향조)
처음 이 마을에 터를 잡은 성씨는 서씨, 고씨, 박씨 등이라고 하나 확인할 수 없다. 《입향시조와 성씨자료》에는 성종 대에 나주김씨 김수남(金粹南, 1487~1540)이 나주 거평에서 살다가 이곳으로 왔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후에 제주양씨 양의남(梁義南, 호-月軒)이 임진왜란 때 능주 월곡에서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참고: 《무안 세적지(世蹟誌)》 김수남, 양의남 條) 현재 대사동 주변의 웬만한 임야는 나주김씨 소유의 문중 산이다. 이 같은 상황으로 볼 때 1500년대 초에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보이며, 입향조는 나주김씨로 추정된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무안군청 아래에 있는 마을이름이 「마구실」 또는 「마기곡」으로 예전에 이곳에서 말을 기르고 관리했던 곳으로, 지형 역시 ‘일어나는 말의 형국’이라고 한다. 이는 풍수적으로 동적이고 진취적인 기운이 흐르는 ‘기마형(騎馬形)’ 지형에 해당하며, 과거에 말 목장으로서의 실용적 가치와 풍수적 상징성이 잘 조화된 곳으로 해석된다.
마을성씨
복합성씨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미기재
행정구역 변경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무안현 읍내면에 속한 「대사동리」로 나오며, 1912년의 자료에서는 외읍면의 대천정리, 마기곡리, 용산리, 복룡동 등으로 관련 지명이 보이지 않다가, 1917년의 자료에서 외읍면 성동리 「대사동」으로 나온 이후 1988년에 무안읍 성동5리 「대사동」으로 관할이 바뀌어서 오늘에 이른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원래 말을 기르고 관리했던 곳으로 「마구실」이라고 했던 「대사동」에는 무안읍으로 바뀌기 전에 「면성 파출소」가 있었다. 또한 성동제 맞은 편에 있는 ‘큰 산’에는 원래 나주김씨 제각이 있었고, 저수지가 생기면서 버벌산이라고 부르는 곳으로 그 제각을 옮겨서 지었다. 제각 아래에는 옛날 원님들이 나들이 나와서 즐겼던 「구시래」라는 바위도 있었고 또한 사찰 앞에 활을 쏘는 「사장터」도 있었다. 이처럼 유서 깊은 역사와 문화가 쌓여있는 마을에는 무안군청을 비롯한 각종 관공서는 물론 사업시설들이 즐비하였다. 따라서 주민들은 주로 상업을 주업으로 하지만 무안의 특산물인 양파 등의 밭작물을 경작하기도 한다.
주요시설
약사사, 중앙교회, 무안 군립국악원(1985), 무안군청, 왕국회관, 쥬바라 복지원, 백련불교문화원 등
마을변화
마을에는 무안의 큰 절인 약사사를 비롯하여 무안군청, 국악원, 중앙교회, 왕국회관 등은 물론 대림장, 시애틀호텔을 비롯한 수많은 상업시설이 자리해있다. 이에 전통마을로서의 문화나 조직 등은 저조한 편이지만, 예로부터 여러 성씨가 모여 양보와 화합으로 활기찬 마을을 만들어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노인회, 부녀회
공동이용시설
대사동마을회관, 대사동경로당, 성동공원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약사사 앞을 흐르고 있는 개울을 ‘월천(月川)’이라고 했으며 대림장 앞에서 낙지골목으로 가는 개울에 ‘월천교’가 있었다. 사찰 앞에는 활터인 ‘사장터’가 있었으며, 그 앞의 산은 활터와 관련 있는 ‘매듭산’이라고 불렀다. 또한 성동저수지를 지나 오른쪽으로 가면 ‘저지동골’이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은 6.25 한국전쟁 때 14명의 주민이 인민재판을 받아 한꺼번에 총살당했던 곳이라고 전한다.
동/식물
약사사 주변에는 주목할 만한 나무 세 그루가 있다. 사찰 경내에 있는 두 그루의 나무는 둘레가 3m가 넘으며, 또한 사찰 뒤에 있는 팽나무는 둘레가 5m가 넘는 아주 오래된 나무로써 지금도 신도와 주민들이 매월 초사흘이면 이 나무 앞에 음식을 차려놓고 제를 지내고 있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마을에는 원당산과 마구실, 구시낭거리, 평남거리 등의 지명이 남아있으며, 또한 대사동 서쪽에 있는 등성이를 ‘산당’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용산에서 대사동으로 넘어오는 고개를 ‘삽바웃재’라고 하며, 예전에 원님들이 나들이 나오던 ‘구시래’라는 바위에서는 남자들이 목욕을 하고 여자들은 ‘저지동골’에서 했다고 한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약사사 앞은 예전에는 몽탄과 일로로 가는 큰 길이었다. 그리하여 행인들이 팽나무 앞을 지날 때는 이 나무를 신목(神木)으로 믿고 치성을 드리고 갔으며, 잡귀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침을 세 차례 뱉고 지나갔다고 한다. 또한 단오날에는 주민들이 팽나무 아래에 있던 들독을 들고 힘겨루기 시합 등을 하기도 했다고 전한다.
유물, 유적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발간한 《전국문화유적총람》에서는 「무안약사사」에 약사사여래불, 이인사지(里人寺址) 5층 석탑 및 당간지주가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지금은 약사사여래불만 남아있다. 이는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78호(1990년 12월 지정)로 지정된 무안 약사 석불입상이며, 「약사사」 창건주 경훈스님의 선몽에 나타났다는 이 석불은 왼손에 약항아리(藥壺)를 들고 오른손은 시무외인(施無畏印)의 결인을 취하고 있는 약사여래불이다. 불상을 자세히 살펴보면 고려시대 조각으로는 드물게 뛰어난 불상임을 알 수 있으며 광배석십상대장상(光背石十三大將像)과 함께 있다. 또한, 워낙 불교적 인연이 강한 곳이라 「남학사」가 폐찰되면서 다시 세워진 절이 「이인사(里人寺)」인데, 지금은 없어지고 옛터(寺址)만 희미하게 남아 있다. 이 절의 주춧돌이라 여겨지는 큰돌 1점과 약사사를 세울 때 발견한 석불 나한상으로 여겨지는 20여 점의 불상편, 그리고 다수의 청자 파편이 발견되어서 사찰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지만, 구체적인 기록이 없어서 창건연대나 규모 등을 확인할 수가 없다. 원래 「약사사」를 포함한 대사동 주변의 땅은 조선조 이래 오랫동안 이 지역의 세도가였던 정참봉 곧 정학정의 땅이었다. 후손들의 관리가 부실하여 지금은 대부분 남의 땅이 돼버렸지만, 한때는 자기 땅만 밟고 다녀도 한나절을 간다고 할 정도로 넓은 규모의 땅을 소유했다고 한다. 그런데 절이 있었던 공산(貢山, 현재 성동공원)은 삼학소주에 넘어갔는데, 삼학소주 사장은 그때 산 밑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불상, 석등, 5층탑, 사자상, 당간지주 등을 모두 서울로 가져갔다. 주민들의 전언에 의하면 그때 이러한 유물들을 가져가는 기간이 한 달이나 걸렸다고 할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고 한다. 그중에서 약사상은 바위에 조각한 것이었기 때문에 가져가지 못하고 다른 문화재는 전부 실어갔다고 한다. 삼학소주 측은 지역문화재를 실어간다고 주민들이 반대할까 봐서 현재의 「노성원」에 집을 지을 수 있도록 성금을 제공했다고 한다. 이때 현재 성동공원인 공산은 무안군의 소유가 되었다. 현재 약사사 팽나무 앞에 정참봉을 칭송하는 ‘정학정덕혜기념비’가 있다.
설화
현재의 군청이 있는 곳에 터를 잡을 때 일화가 있다. 군청 뒤에 있는 산이 원당산인데 무안군의 초대군수였던 정시채 씨가 산의 이름을 보고 군청의 터 자리를 잡은 것이다. 즉 원당산은 ‘원님 집이 들어설 자리’라고 해석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원당산에 있는 바위에는 ‘원님이 바위에 서서 읍내를 살펴봤다’라는 발자국이 남아 있다고 한다.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미기재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성동공원은 본래 이 마을에 있는 정참봉(정영회, 1885~1936)의 소유였다. 정상에는 정참봉 제각이 있었으나 현재는 제각 대신 정참봉의 추모비가 자리하고 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당시 무안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은 이 제각에서 미군 앞에 일본도를 내어놓고 군대 해산 문서에 서명을 했다고 전해진다. 현재 성동공원은 1985년부터 무안군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공원 주변 동백나무, 배롱나무, 단풍나무 등 큰 나무와 울창한 산림 덕에 주민들에게는 자연과 더불어 좋은 쉼터로 쓰이고 있다.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미기재
기타사항
미기재

출처

각주
미기재
참고문헌
1. 《마을역사자료조사》(무안문화원, 2017) 2. 《마을유래지》(무안군,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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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