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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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용월1리 무안읍 노동·약곡 작성
  • 노동·약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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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총 30세대, 인구 44명(남27, 여17) / 2025.12.기준.
자연마을 구성
용월1리에 속하는 「노동」, 「약곡」마을은 무안읍에서 고절리의 오리정을 지나 상동마을을 바라보면서 보평산 방향으로 약 4km가량 떨어진 곳에 있다. 세칭 무안읍에서 최고의 벽지 마을로 버스도 다니지 않는 마을이라고 하였으나, 현재는 두 마을을 합쳐서 30여 가구에 44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지명유래
마을의 지명에 관하여 《마을유래지》에 의하면, 「노동」은 ‘마을 앞에 갈대가 많았고 금성나씨가 마을을 형성하면서부터 노동이라 하였다.’라고 하였으며, 그 후 400여 년 전 무렵에 정운창 공이 터를 잡아 마을을 이루면서는 「명주골」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또한, 노동마을에서 조금 더 들어가면 나오는 「약곡(藥谷)」마을은 ‘여산송씨가 거주하면서 이곳의 물이 맑아 약곡이라 불렀다.’라고 하듯이 주변에 약초가 많이 자생하고 있어서 붙여진 마을 이름이다.
마을형성(입향조)
「노동」마을의 입향조는 원래 영성정씨 집성촌이었으나 이후 금성나씨가 노동마을을 형성하였고, 또한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전에 무안읍 평월에 살던 압해정씨 정운창 선생이 터를 잡아 마을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처럼 《마을유래지》에 의하면 「약곡」마을 역시 400여 년 전에 들어온 여산송씨 송천종(宋千鍾, 1519~1584, 자-인유, 호-절암) 공이 입향조이다. 공은 전라북도 고부군 향제에서 살았으나 정미사화(乙巳士禍, 1547년(명종 2년)에 일어난 사화이며 윤원형 일파가 대윤 세력을 숙청하기 위해 만들어낸 사건)의 여파로 많은 선비들이 화를 입자, 부귀공명을 멀리하고 화를 피해 1547년 고절마을에 들어와 은둔하며 후손들의 교육에 힘썼다. 그리하여 고절마을에서의 생활이 안정되자 송천종 공은 그의 모친과 함께 약곡마을로 이주하였다. 이곳은 산세가 수려하고 물이 맑아서 장차 큰 마을이 형성될 수 있을 것으로 보여서 옮긴 것이다.
풍수지리(마을형국)
원래 노동마을은 조리형으로 아늑함을 주는 영성정씨 집성촌이었으며 옛 물아혜군의 치소가 있었던 곳이라고 추정되기도 한다. 풍수지리상 이와 같은 ‘조리형(笊籬形)’은 산과 강이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는 지형으로 기운이 순환하기 쉽고 안정적이어서 사람들에게 평안함과 풍요를 가져다준다고 여긴다. 한마디로 사람이 먹는 쌀을 이는 데 쓰는 기구인 조리가 그렇듯이 사람에게 필요 없는 것은 다 걸러내고 요긴한 것만 담는 곳이다. 뒤로 보평산(225.4m), 앞으로 영산강의 지류를 감고 흐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장소이기 때문에 아주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거주했던 곳이라고 하겠다.
마을성씨
원래 영성정씨 집성촌이었다가 금성나씨, 나주정씨, 여산송씨 등이 입향하였고, 또한 오래전에는 왕씨는 물론 평월 뒤 산지촌에서 장흥고씨와 압해정씨 등도 들어왔다고도 하며, 지금은 복합성씨 마을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조선시대 지명 자료인 《호구총수》에는 보평리와 약곡리만 나오지 「노동」이란 지명은 나오지 않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노동」이란 마을 이름은 그 이후에서야 나오는데 갈대와 상관없는 「노동(老洞)」이라는 한자로 나온다. 주민들에게 왜 노동(蘆洞)이 아닌 노동(老洞)이냐고 물어보았으나 원인을 알지 못했다. 마을 앞에 갈대밭이 많았다는 기록이 있고 마을 뒤에 있는 영성정씨 재각인 삼사재의 주련(柱聯)에도 노각(蘆角)이란 한자어가 나오는 것으로 봐서, 갈대가 있는 마을이란 의미의 노동(蘆洞)이 정확하지만, 행정기록이나 절차상 편의에 의해 원래 뜻보다는 쓰기 쉬운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행정구역 변경
본래 무안군 외읍면 지역으로 1979년 《호구총수》에는 무안현 외읍면 약곡리로 나오며,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2년의 자료에서 다시 무안군 외읍면 약곡리로 나온다. 이후 1987년의 자료에서 현재와 같은 무안읍 용월1리 「약곡」, 「노동」마을로 나온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뒤로 보평산과 앞으로 갈대가 자랄 정도의 물이 흐르는 곳에서 오래전부터 거주해온 마을의 주민들은 풍요와 평화로운 습속을 일상적으로 지녀왔다. 특히, 「약곡」마을을 둘러싼 산에는 이름만큼이나 많은 약초가 자생하고 있다. 하수오를 비롯한 엄나무, 마, 더덕, 머루 등이 지천으로 널려 있어 주민들 중에는 약초만을 채취해서 판매하여 생활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 정도다. 이처럼 약초가 많은 이유는 산이 깊어서 사람의 왕래가 적을 뿐만 아니라 지형적인 영향도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무안에서 유일하게 두릅이 났던 곳이기도 하다. 이처럼 자연환경이 좋아서인지 이 마을 주변에는 1,970여 개가 넘는 무덤이 널려 있다. 마을의 입향조인 여산송씨 문중산이 많아 대부분이 송씨들 묘이다. 주민의 표현처럼 공동묘지에 둘러싸인 형국이다. 그렇듯이 자료에 의하면 「노동」, 「약곡」 마을은 오래전부터 면주골이라 불러왔다. 지금도 주민들은 마을이 면주골로 불려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는 중요한 구전 자료이다. 왜냐하면 무안은 백제시대 때 물아혜군 면주(綿州)라 불렸기 때문에 이곳이 나말여초(羅末麗初) 때 물아혜군의 치소(治所-감영이나 현청이 있는 곳)였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주요시설
회관, 무안동부교회, 평안교회
마을변화
마을에서는 자연적인 이점을 살려 친환경 농법으로 농사를 지어 주민들은 질 좋은 농산물을 생산하고 있다. 그리하여 2006년에는 <전남친환경마을>로 선정되었으며, 주로 도시의 대형백화점 등에 납품되는 쌀은 높은 가격을 받고 있다. 논에는 우렁이가 돌아다니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으며, 따라서 이 마을에는 축사가 전혀 없다. 얼마 전까지 주민 중에 한 사람이 소를 키웠으나 재미를 보지 못하고 폐쇄시켰다. 그 이후 마을 주민들은 회의를 통해 더 이상 마을에 축사를 둘 수 없다는 결의를 하였다. 이처럼 마을에서는 친환경농업을 지속적으로 실현함은 물론 오염물 없는 청정마을로 만들어가고 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청년회, 노인회, 부녀회
공동이용시설
노동·약곡마을회관(경로당, 더위쉼터)
전통식품/특산품
주 소득원 양파, 마늘, 쌀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마을을 감싸고 있는 마을의 주산인 보평산은 해발 225m의 낮은 산이지만 백제시기로 추정되는 보평산성이 있었던 곳이다. 보평산성에 관한 기록은 《여지도서(輿地圖書)》(영조 35년, 1759)에 처음 나타난다. 이 문헌에 따르면 ‘보평산성은 무안현의 북쪽 5리에 있고 물량고지(勿良古址)라 전한다.’고 했다. 여기서 ‘물량(勿良)’은 944년(고려 혜종 원년)에 변경된 무안의 옛 이름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보평산성은 대략 고려 초에 쌓은 성으로 짐작되며 ‘물량’의 치소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한때는 모든 주민들이 식수로 사용했던 샘이 논 가운데 있다. 샘 옆에는 오래된 백일홍 나무가 있어 샘과 마을의 역사를 보여주지만 나무의 수령은 알 수 없다. 그리고 농업용수로 큰 역할을 하고 있는 약곡저수지는 1956년에 완성되는데, 이를 만들 때 약곡마을 주민들의 반대가 극심하였다. 그렇잖아도 마을이 협소하여 농지가 적은데 대부분의 농지가 저수지 용지로 들어가기 때문에 주민들은 반대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노동마을을 비롯하여 상동, 평월마을 등 주변의 대단위 농지에 농업용수를 대기 위해서는 이곳에 저수지가 필요했던 것이고, 이내 약곡마을 주민들의 협조와 통해 건조되었다.
동/식물
느티나무(보호수지정, 1982.12.03, 수령 170년, 수고 17m)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남아있는 지명으로 서당골, 귀동골, 강남골, 묵작골, 토성제, 저수지 밑에 장터거리, 주막과 서낭당이 있었던 탑골 등이 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노동마을의 효자각 뒤에는 나무 둘레가 약 4m가 넘는 당산나무인 느티나무가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기록에 의하면 이곳에서 주민들이 매년 정월보름에 당산제를 지냈다고 하는데, 현재는 지내지 못하고 있다.
유물, 유적
현재 「약곡」마을 뒤에 세 개의 고인돌이 있으나 주민들은 예전에는 더 많이 있었다고 하지만 확인할 길은 없다. 또한, 약곡마을 문안재(일명 토성제(土城堤))에 백제시대 때 물아혜군의 치소로 여겨지는 보평산성지(普平山城址)의 토성(土城)이 일부 남아있다. 현재 용월리 794번지의 토성제(길이 30m, 높이 6m, 상폭이 4.5m, 하폭 8.5m)는 눈으로 확인할 수 있으며, 산 능선을 따라 약 3km 정도의 성벽이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토성의 규모에 대한 내용은 일제강점기의 조사 기록인 《조선보물 고적조사 자료》(조선총독부, 1942)가 유일하다. 이 보고서에는 ‘산록의 밭 가운데 높이 약 6자의 토루(土壘)가 약 30간(間)이 있고 보평산성 또는 물량군 터라 한다.’고 하였다. 현재 남아있는 성은 훼손 정도가 심해 확인할 길이 없으나, 지형상으로 볼 때 성은 산 능선과 계곡을 포용하여 쌓은 포곡식 형태를 띠고 있다. 동·서벽 전체와 북벽의 일부는 산 능선 정상부의 외면을 돌로 쌓고 내면은 흙으로 축조했다. 성내의 계곡부는 완만한 경사의 분지를 이루고 있으며 민묘 등으로 인해 건물터 등의 유구는 찾을 수 없다. 현존하는 성의 시설물로는 3개소의 문터가 남아 있는데, 서문터는 문안재라 불리는 무안읍 매곡리 발산마을로 통하는 소로이며, 남문터는 무안읍 용월리 노동마을에서 성내부로 통하는 소로로 현재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토성제가 남문이다. 그리고 동문터는 용월리 약곡마을로 통하는 고갯마루 정상 부근에 위치한다. 뿐만 아니라 1번 국도가 고절리를 지나 토성을 가로지르고 있어 지리적으로 중요한 길목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내성과 외성이 있으며 성문, 성너머, 성안 등의 지명이 지금도 쓰여지고 있다.’고 한다. 이곳에서 고대의 유물들은 찾을 수가 없으나 주민 중의 한 사람이 성안에서 밭을 갈다가 푹 꺼지는 곳이 있어 자세히 살펴보니 회(灰)로 만든 고분이 나왔는데 내부가 3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물론 안에는 유물들이 없었다. 마을 뒤 서당골로 부르는 곳에는 도요지가 있었는지 분청자나 백자가 아닌 청자 파편들이 무수히 발견되었다. 이러한 이유때문인지 일제시대부터 근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도굴꾼들이 마을과 산을 휘젓고 다녔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물아혜군의 치소가 무안읍 고절리와 용월리에 걸쳐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또한 《무안군사》에도 ‘물아혜군의 치소는 무안읍 고절리와 용월리에 걸쳐있는 보평산성지와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문안재가 있는 능선 부근에는 폐치(廢置)연대를 알 수 없는 ‘고사(高寺)’라 하는 절이 있었다. 《면성지》 기록을 보면 ‘인조 14년 병자년 연간에 지봉 고응후가 남한산성의 치욕을 통탄하여 회적(晦跡, 종적을 감출) 하기를 맹세하고, 이 절에서 소요하였으므로 인하여 이름 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현재는 주변에 기왓장만 남아 있어 절터였음을 추정케 하고 있을 뿐이다. 근처에 지석묘 1기가 있다. 이외에 노동마을 앞에는 1970년에 세운 효자각이 있으며, 그 안에는 ‘효자성재정공실적비’라 써진 비석이 있다. 마을 뒤에는 <삼사재>라 부르는 영성정씨 재각이 있는데, 1940년에 건립한 재각으로 주련이 기둥에 10개나 걸려있고 안에는 현판이 4개가 있다. 또 마을 뒤에 2006년에 세운 ‘정채순여사열부비’가 서있다. 그리고 약곡마을에는 세 곳의 재각이 있다. ‘약재(藥齋)라 부르는 장흥고씨 재각은 1955년에 건립하였는데, 마을의 오른쪽에 있다. 마을 뒤에는 ‘영언재’라는 여산송씨의 재각이 있는데, 주변정리가 깔끔하게 되어있어 송씨들의 경모사상을 엿볼 수 있다. 1936년에 지었으며 8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또 하나의 재각은 ‘석호재’로 장흥고씨 재각이다. 근래에 지은 것으로 마을 왼쪽에 자리하고 있다. 모든 재각이 팔작지붕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구조를 갖고 있다.
설화
조선초 관방시설의 정비에 따라 석축(石築)되어 왜구 방어를 위한 산성으로 쓰이기도 했던 보평산성의 토성에는, 옛적 고려시대에 하씨(河氏) 성을 가진 사람이 이 산을 거점으로 수십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살았다는 전설도 전해온다.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정철수(제주경찰청장)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이 마을은 지리적인 위치 때문에 한국전쟁 때에 빨치산의 통로가 되어 어려움을 겪은 일이 있었다. 당시 영광의 불갑산에 근거를 두고 있던 빨치산들이 감방산을 지나 무안읍을 습격할 때는 반드시 이 마을을 거쳐서 지나가는 길이었기에 주민들이 받은 피해가 컸다.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모두 세 차례의 빨치산 습격을 받았는데, 끝에는 주민 12명이 같은 날에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다. 또 낮에는 태극기, 밤에는 인공기를 달면서 간신히 견디고 있었는데, 어느 날은 이를 착각하여 태극기를 올렸다가 인민군이 들어오는 바람에 주민이 혼을 났던 일이 있기도 하였다.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미기재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미기재
기타사항
미기재

출처

각주
미기재
참고문헌
1. 《마을역사자료조사》(무안문화원, 2017) 2. 《마을유래지》(무안군,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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