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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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용월2리 무안읍 상동 작성
  • 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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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총 83세대, 인구 129명(남66, 여63) / 2025.12.기준.
자연마을 구성
왜가리 백로들의 천국, 상동 들노래로 널리 알려진 용월리 「상동」마을은 무안읍에서 2km 거리에 있다. 보평산(225.4m)의 동북쪽으로 관양산, 주치봉, 청룡산, 매봉 등이 사방으로 둘러쳐진 산중에 자리해있는 자연생태적으로 유서 깊은 마을이다. 왜가리, 백로들의 서식지가 천연기념물 211호로 지정되어 나라의 보호를 받고 있으며, 상동 들노래가 무형문화재 제42호로 지정되어 주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 마을은 함평군 엄다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보평산의 맥을 이어받고 있다.
지명유래
마을의 지명유래에 대하여 《마을유래지》에는 ‘보평산 물줄기가 마을 좌우로 분산되어 서로 견제한다 하여 「상동(相洞)」이라 부르다가 ‘서로 상(相)’보다 ‘윗 상(上)’의 뜻이 더 좋다하여 「상동(上洞)」으로 바꾸었다 한다’라고 마을 이름의 유래를 밝히고 있으나, 주민들은 「상동(相洞)」이라 부른 적이 없다고 밝힌다. 어떻든 ‘마을 이름을 「상동(上洞)」이라 한 것은 청제마을의 위에 위치해서 붙여진 것이다’라는 주민들의 증언을 통해 마을 이름에 대한 가닥을 잡을 수 있다. 즉, 원래 진주하씨와 진주강씨가 마을의 아래쪽인 청제마을에 살았는데, 조선조 중반에 광산김씨가 마을 위쪽에 자리를 잡으면서 마을 이름을 「상동(上洞)」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이는 마을에 있는 ‘상동오성계기적비문(上洞五姓契記蹟碑文)’에 의하면 ‘청계촌 동편의 위에 위치하고 있어서 한계를 분별키 위해 상동(上洞)이라고 하였다.’라는 내용으로 확인된다.
마을형성(입향조)
마을의 입향조는 광산김씨 김남신(金南贐, 자-사헌, 호-교은, 1623~1690)으로 조선시대 인조 연간 즉 1620년 무렵에 광주 판정에서 평다리를 거쳐 본 마을 상단에 입향해서 터를 잡았다. 광산김씨현감공파 가승보에 의하면 집안에 우환이 있어 일찍 부모를 여의고 8살 때 유모 할머니와 함께 왔다고 한다. 이후 1대(代) 정도 늦게 장흥고씨 고두문(1614~1680, 자-천약, 호-약재)이 마을로 입향하였다. 공은 김신재, 유시남 등과 교유하며 학문에 전념하고 과거시험에 집착하지 않았으나, 후일 곤재 선생의 ‘자산서원’을 훼철하자는 일부 유림들의 주장을 배척하다가 모함을 받아 기장에서 8년간의 유배생활을 했다. 이처럼 장흥고씨가 광주에서 고절리를 거쳐 입촌하였고, 이어서 전주최씨가 평치(坪峙)에서 입촌하였다. 또한 함양박씨와 달성배씨가 청계면 월선리와 청천리에서 각각 입촌하여 5성(五姓)이 공존하였다. 이후 근세에 들어 김해김씨와 무안박씨 그리고 인동장씨가 들어와 8성(八姓)이 살고 있는 마을이 되었었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마을의 풍수지리를 보면 북쪽으로 보평산의 정기를 받은 관양산이 옹위하고, 서쪽에는 주치봉과 동쪽으로 청룡산이 좌우로 호위하고 있으며, 마을 앞에는 고려 때 청제언(靑堤堰)이라고 부른 용암지란 소류지가 있다. 이러한 청룡산과 소류지의 섬에는 현재 백로가 서식하고 있다. 이처럼 좌청룡 우백호의 산세와 마을 앞의 용암지는 배산임수의 지형을 이루고 있으며, 동시에 ‘전택수전(前澤水田)’을 통해 재물의 흐름과 기운을 모으는 요소로 해석된다. 더구나 청정함과 맑은 수기(水氣)가 느껴지는 청제언 곧 용암지에는 청정한 환경에서만 사는 길조인 백로가 실제로 살아서 이 마을이 풍수적으로 길지(吉地)임을 나타낸다고 하겠다. 또한, 마을의 주산은 매봉으로 서쪽의 주치봉과 대를 이루고 있으며, 매봉 옆의 뒷산은 연산(燕山)으로 제비형국의 산이다. 그리하여 연산에 있는 골짜기는 연소골(燕巢골-음운 변화를 일으켜 원소골이라고 함)이라고 부르며, 이 산이 새 형국이라 묘를 만들 때 석물을 하지 않는다.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연산의 봉우리가 뒤쪽으로 약간 기울어 쳐져서 이 마을에 큰 인물이 나오지 않는다는 설이 있다고 한다.
마을성씨
입향조인 광산김씨와 함께 장흥고씨, 전주최씨, 함양박씨, 달성배씨 5성(五姓)에 더하여 김해김씨, 무안박씨, 인동장씨와 함께 8성(八姓)이 살던 공존하던 마을이었으나 최근에는 타성씨가 많이 들어와서 사는 복합성씨 마을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문헌을 통해 마을 이름의 변화를 보면 1789년의 문헌인 《호구총수》에는 무안현 외읍면 청제리(靑堤里)로 나온다. 이후 1912년 자료에는 외읍면 용암(龍巖)리로, 1917년의 자료에는 외읍면 용월리 용암으로 나오다가, 1987년의 자료에서 현재와 같이 무안읍 용월리 상동(上洞)마을로 표기되어 있다.
행정구역 변경
행정구역의 변경을 문헌을 통해서 살펴보면, 본래 무안군 외읍면 지역으로 1979년 《호구총수》를 보면 무안현 외읍면에 속한 청제리였다.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으나 1912년에 다시 무안군 외읍면 용암리가 되었다가 1917년에 외읍면 용월리 용암마을이 된다. 이후 1987년의 자료에서 현재와 같은 무안읍 용월2리 상동마을로 나온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상동마을은 현재까지도 쌀, 고구마, 양파, 마늘, 담배를 주업으로 하는 전형적인 농촌마을로서 이웃 간에 온정이 오가는 훈훈한 마을로 예전부터 널리 알려져 있다. 그만큼 청정한 자연환경에 더하여 풍성한 농경지로부터 안정적인 생활환경이 이루어진 곳이다. 따라서 마을이 흥성할 때는 주민들 수가 600명이 넘었다. 그리하여 1960년대에는 이장을 두 명이나 두기도 했다. 마을을 동(東), 서(西)로 나누어 관리하게 한 것이다. 또한 일제강점기에는 모범마을로 선정되기도 했는데, 목화재배를 잘해서 우수마을로 지정되었다. 지금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마을로 찾아오는 백로, 왜가리 등과 함께 주민들은 평화로운 농촌마을을 이루고 있다. 쌀, 고구마, 양파, 마늘을 주업으로 하고 있다.
주요시설
정자 앞에는 청룡산의 왜가리를 볼 수 있도록 2층의 조망대가 설치되어 있으며 망원경도 구비하고 있고 마을회관 이름이 용연경로당이다. 오래 전에 마을 위쪽에서 두 분의 선생님이용연재라는 서당을 열었다. 마을아이들 뿐 아니라 주변 마을의 아이들까지 와서 배웠다. 그러다 두 분 선생님이 계시지 않자 자연히 서당은 폐쇄되었다. 주민들은 서당의 건물을 그대로 마을회관으로 옮겨서 지었다. 이름도 용연재를 따서 용연경로당이라 한 것이다
마을변화
외부로 학교를 다녔으며 광산김씨 종친회, 백호회(광주), 청룡회(서울) 등으로 젊은이들은 도시로 나갔고 귀농인구가 약간은 있으나 노인들의 과다로 인해 인구수가 감소하고 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노인회(53명), 천중회(총회, 60명), 부녀회(28명), 부청회(동계), 상동 들노래 보존회(23명)
공동이용시설
마을창고, 용월교회
전통식품/특산품
마을의 특산품으로 <학마을 된장>이 있다. 이는 마을부녀회에서 지역의 황토콩을 사용하여 전통적 방법으로 제조한 된장인데, 상표 등록을 하여 판매하고 있으며 맛이 뛰어나 해마다 주문이 밀리고 있다.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원래 물이 잘 나오던 마을 앞에는 ‘쐐기샘’이 있었는데, 마을주민들이 주로 사용했던 ‘못샘’ 다음으로 수량이 많은 샘이다. 얼마나 물이 잘 나왔던지 지반이 침하될까 우려되어서 다시 메우기까지 했다. 또한,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상동마을에는 농업기반공사 소유의 넓은 용연이라고 부르는 ‘용암방죽’이 있다. 이곳에는 갖은 종류의 연꽃을 비롯한 수생식물들이 피어나며, 이는 또한 방죽에 서식하는 각종 생물들끼리의 먹이사슬을 구성한다. 특히 마을의 청룡산과 함께 매년 3~4월 무렵이면 찾아오는 5천여 마리의 백로와 왜가리의 번식지가 된다. 백로는 주로 동남아 지역에서 월동 후 날아오며, 청정한 자연환경이 조성된 「상동」마을은 이들의 번식지이자 생태관광 명소로 성장 중이다.
동/식물
주민들은 「상동」마을의 ‘용암(龍岩)저수지’와 ‘청용산(靑龍山)’으로 백로와 왜가리가 많이 날아오면 풍년이 들고 길사(吉事)가 많다고 믿으며 관리하고 있다. 이러한 왜가리는 1946년 3월경에 처음 30여 마리가 찾아오기 시작하여 차츰 늘어났다고 한다. 하지만 6.25 한국전쟁을 겪은 이후부터는 아예 찾아오지 않았다. 주민들은 이전에 매년 왜가리가 찾아오지 않은 적이 없다고 증언한다. 그러다가 1966년에 다시 찾아오기 시작해서 현재는 4,000여 마리의 대규모로 찾아와서 입춘 무렵부터 입추까지 마을의 산과 방죽에서 머문다. 그렇듯이 왜가리가 청룡산으로 들어오면서 마을에는 흉사나 우환이 생기지 않았다. 그리하여 호기심이나 또는 학술 목적 등으로 외지인들이 왜가리의 생태를 살피기 위하여 청룡산에 올라가려고 하면 마을에서는 함부로 오르지 못하게 한다. 그만큼 왜가리는 이 마을주민들이 보호하는 생물로서 극진한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다. 몇 년 전 조류학자인 윤무부 교수가 마을을 다녀갔는데 두 차례 다녀갔는데 모두 해오라기가 서식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당시 윤 교수는 “왜가리와 해오라기가 함께 있는 것은 보기 드문 현상”이라며 관심을 표했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지역에 남아있는 지명으로 관노봉이라고 부르는 갈봉, 됫백이, 쐐기, 웃데미, 알데미, 안고랑, 개당골, 새발등 등이 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이 마을의 <상동 들노래>는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지만 마을사람들 사이에 구전(口傳)되어 오는 노랫말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해방 후 고재식(高在植) 씨가 그 맥을 이어 오다 부산으로 이사한 후 고윤석(高允錫) 씨가 선(先)소리의 명수(名手)로 그 전통을 이어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노랫말은 공기 맑고 산수 좋은 농촌생활의 보람을 찾고, 마을주민의 협동심을 길러주며, 농사의 고달픔을 달래고 일의 능률을 올리기 위해, 모찌기부터 시작 모심기, 초벌파기, 한벌매기, 맘도리에 이르기까지 불려지는 농요(農謠)이다. 현재 상동 들노래는 모찌는 노래, 모심는 노래, 논매는 노래, 지음(止音), 드네기 노래, 풍작 노래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금은 농촌에도 경운기, 트랙터 등 기계화가 이루어져 지루하기만 했던 논밭이랑도 그다지 멀게 느껴지지 않는 시절이다. 그리하여 예전처럼 모내기를 한다거나 김매기를 하는 등의 노동이 필요 없어져 <상동 들노래> 같은 노동요는 찾기가 어렵다. 이에 상동마을에서는 이를 보존하고 전수하는 공동체인 ‘무안 상동 들노래 보존회’를 결성하여 제28회 남도문화제 으뜸상과 개인연기상을 수상(2001)하였고, 제43회 한국민속예술축제 공로상을 수상(2002)하는 등 다양한 공연을 해 오고 있다. 지난 2006년 12월에 전라남도 무형문화유산 제41호로 등록되었다.
유물, 유적
마을에는 열녀비, 효행비, 정거비(定居碑), 공적비 등 10여기의 비석이 서있다. 처음 세워진 비는 1977년의 열부영성정씨비, 1983년에 교은처사정거비와 김재열선생경모비, 1983년에 고재현숭모비와 고인석효행비, 1993년에 고동재공적비, 1997년에 주민이 세운 고봉조공적비, 2002년에 주민이 세운 김재한공적비, 2003년에 고씨 문중에서 세운 고봉조공적비와 들노래유래비, 마을회관 앞에는 선돌이 있다.
설화
무안읍에서 이 마을로 들어올 때 넘어오는 고개는 ‘주치봉(走雉峰)’ 또는 ‘복치봉(伏雉峰)’으로 부른다. 마을 옆 산은 청룡산(靑龍山)으로 왜가리 서식지이며, 정상에는 큰 바위 하나가 놓여 있다. 이를 상여바위 또는 용바위라고 부른다(왜가리, 백로 등의 천연기념물(211호)) 지정으로 인해 출입이 금지되어 있어 볼 수 없다.) 주민들이 ‘그 바위를 상여바위로 봤을 때 마을에서 보이면 동네에 젊은 사람이 죽는 등의 우환이 생긴다’ 하여 바위 앞을 나무로 가릴 수 있도록 큰 나무를 심었다. 또한 이 용바위가 마을 이름인 용암(龍岩)의 근거가 된다고 하겠다.
기록물, 문헌
상동 들노래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서민경(상동 들노래 전수자), 조삼례(신지식인-된장명인)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고영준(나주등기소장), 고귀석(수협중앙회부장) 고부진, 고윤, 고익송(유학자)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보평산 주변 마을 사람들은 팔월 한가위가 되면 특별한 추억을 기억해 낸다. ‘무안판 만남의 광장’이었던 보평산에서의 만남을 가졌던 일이다. 지금은 교통 등 모든 것이 발전하여 서로의 안부를 묻는데 어려움이 없지만, 3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마을을 떠난 사람들의 안부는 팔월 추석에 이곳 보평산 봉우리에 올라와서야 들을 수 있었다. 그날만 되면 보평산 봉우리가 눈물과 웃음과 아쉬움이 넘실거렸다고 한다. 몽탄, 무안읍, 현경, 해제, 망운 등으로 시집가거나 이사 간 사람들이 보평산으로 올라와 서로 만나서 안부를 전하기도 하고 소식을 나누었기 때문이다.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마을 앞에는 함평군 엄다면으로 가는 현재 2차선으로 난 오래된 길이 있는데, 이를 이른바 청룡재라고 불렀다. 인근 모촌, 평산 등 현경면에 사는 사람들이 학교 갈 때나, 고구마를 머리에 이거나 지게에 짊어지고 학다리장을 보러 갈 때 다녔던 길로 애환이 서린 길이기도 하다.
기타사항
마을에서는 인재 양성을 위해서 학교를 스스로 조직하여 운영하기 하였다. 아직 근대교육이 이뤄지기 전인 고종 임진년 1892년에 약봉 고창주, 김재규 선생이 사숙(私塾)을 열었다. 주민들의 의무분담금과 주변 마을의 찬조금을 받아 용연재를 신축하였다. 용연재가 설립된 이후 무안읍을 비롯한 인근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후 마을의 주요 문중인 다섯 성씨가 계(契)를 조직하여 오성계(五姓契) 또는 서당계(書堂契)라 하고 재각 주변의 농토를 사들여 운영비로 활용하였다. 일제강점기 이전까지는 용연재의 운영이 잘 이루어지고 후학들의 배출이 활발하였으나, 경술국치 이후부터는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특히 2차 세계대전과 6.25 한국전쟁은 마을의 혼란을 극에 달하게 하였으며 오성계의 활동과 유산이 무의미하게 되었다. 현재 용연재는 마을 주민들의 부채 탕감을 위해 매각처분하였다.

출처

각주
미기재
참고문헌
1. 《마을유래지》(무안군, 1987) 2. 《마을역사자료조사》(무안문화원, 2017) 3. 《무안군사》(무안군,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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