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월(平月)」마을은 용월3리에 해당하며 ‘국도 1호선’의 무안과 함평의 경계 지점에서 왼쪽으로 꺾어 들면 만나는 마을로 큰마을, 작은마을(새터), 산지촌으로 이루어졌다.
지명유래
원래의 지명은 「평다리(平橋)」였다. 주민들은 왜 평다리라고 불렀는지 유래는 모르지만 영성정씨 족보나 1789년의 《호구총수》를 보면 ‘평교(平橋)’로 나온다. 이는 두 가지로 추정할 수 있다.
하나는 《마을유래지》에 나온 대로 ‘예전에는 마을이 포구로서 「상동(上洞)」과 「노동(老洞)」을 연결하는 관문이었고 내륙을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하여서 「평다리(平橋)」라고 부르다가 일제강점기에 「평월(平月)」로 개칭하였다.’라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마을 앞으로 흐르고 있는 무안천은 조선시대에는 바닷물이 들어왔던 지역이다. 마을에서 현청이 있는 읍내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건너야 하는 무안천의 다리가 평평한 다리여서 마을 이름도 그렇게 불렀으리라 여겨진다. 지금도 국도 1호선의 무안과 함평의 경계지점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다리가 있는데, 그 다리 이름이 「평다리」이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평교에서 현재의 이름인 「평월」로 바뀌는데, 이는 다른 지명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일본이 자기들 쓰기 편할 대로 마을 이름을 바꾼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청계의 구로동(龜老洞)이 구로동(九老洞)으로, 삼향의 대안동(大雁洞)이 대안동(大安洞)으로 변했듯이 「평다리」라고 불렀던 마을 이름을 일본인들의 발음대로 ‘평달’로 생각해 ‘달’을 음차하여 ‘月’로 표시하면서 「평월」로 바꾼 것으로 여겨진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의 입향조는 압해정씨(영성정씨로 부르기도 한다) 정세화(丁世華, 1556~1607, 자-군실(君實), 어모장군도총부도사 역임) 공으로 조선 중종 대에 부사를 지냈던 정극순(丁克淳, 1468~1544, 자-가신)의 증손이다. 정극순은 경기도 광주 두모포에 살았으나 연산군의 폭정으로 혼탁한 정쟁을 피해 공수산(현재 남산) 아래 동문 밖에 터를 잡고 유유자적한 생활을 한 선비이다. 증손 세화(世華) 대에 이르러 임진왜란을 맞아 면성면 마기곡으로 피하였다가 이후 상동으로 옮겼으나, 터를 정하지 못하다가 현몽을 받아 현재의 마을로 옮겼다고 《무안세적지(務安世蹟誌)》에 전한다.
풍수지리(마을형국)
1912년의 자료에서부터 「평교」라는 지명이 없어지고 「평월」로 나오는데, 사실 주민들을 마을형국이 반달이고 또한 마을 뒤에 칠성바위가 있어서 비롯되었다고 믿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실제 이러한 지형으로 보이는 마을형국을 풍수지리로 보면, 반달 모양의 포용적인 지형은 마을의 생기를 모아 안정과 부를 가져오며, 마을 뒤의 칠성바위는 신성한 기운을 더하여 주민들에게 장수와 지혜, 복록을 내려주는 매우 길한 명당 터라고 하겠다.
마을성씨
원래 입향성씨인 압해정씨 집성촌이었으나 이후 장흥고씨와 광산김씨가 들어왔으나 현재는 복합성씨 마을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지명유래에서 살펴본 것처럼 「평다리(平橋)」에서 「평교(平橋)」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평월(平月)」로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행정구역 변경
행정구역의 변경을 문헌을 통해서 살펴보면, 원래 무안군 외읍면 지역으로 1789년 《호구총수》를 보면 무안현 외읍면에 속한 평교리였다.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으나 1912년에 다시 무안군 외읍면 평월리로 변경되었다가 1917년에 외읍면 용월리에 속한 평월이 된다. 이후 1987년의 자료에서 현재와 같은 무안읍 용월3리 평월로 나온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이 마을은 원래 큰마을에서 분가하여 새터라고 불리는 작은마을과 산지촌으로 이루어진 자연마을이다. 입향성씨인 압해정씨 집성촌이었으나 후일 장흥고씨와 광산김씨가 들어왔으며 지금은 여러 성씨가 모여사는 혼합성씨 마을이다. 대체로 큰마을은 교회 등을 다니는 종교 신자들이 많이 살고 있으며, 작은 마을은 종교보다는 전통성을 고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산지촌은 사람이 살고 있지 않다. 주민들의 주업은 농사로써 주로 쌀, 고구마, 양파, 마늘, 참깨, 담배 등을 재배하고 있다.
주요시설
마을회관
마을변화
반달형국이라는 마을지명처럼 마을 뒤에는 청룡산을 중심으로 뒷매와 정문등 그리고 앞뫼 등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뿐만 아니라 100여 년이 넘은 팽나무가 마을을 둘러싸고 있어서 예전에는 편안하고 아늑한 마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앞으로는 서해안고속도로 무안 나들목이 생기고 뒤로는 서해안 고속도로가 지나고 있어서 무분별한 소음과 어수선한 느낌을 주고 있다. 현재 마을에는 귀촌가구 2~3세대와 젊은 층이 별로 없어서 노령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주민들 간에 협조를 잘하며 외지인들에게도 친절하게 잘 지내고 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동계, 부녀회, 노인회, 개발위원회
공동이용시설
창고 1동, 마을정자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청룡산 옆에 ‘굴바위산’이 있는데 예전에 석산 개발과 함께 현재는 서해안고속도로에 편입되어 버렸다. 이 산은 사람이 들어 다닐 수 있는 굴이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의 ‘구박골’이라 부르는 곳에 ‘용샘’이 있다. 용샘은 물이 좋아 피부병과 위장병에 특효가 있어서 널리 알려진 샘물이다. 또한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으며, 비가 많이 와도 늘 일정한 수량을 내는 물이다. 이 샘은 서해안고속도로가 생기면서 훼손되어 버렸으나 지금도 물은 조금씩 나오고 있다. 그렇듯이 이 마을은 원래 물이 잘 나왔다. 마을 앞에 ‘쐐기샘’이 있는데 ‘못샘’ 다음으로 수량이 많은 샘이다. 물이 너무 잘 나와서 지반 침하가 우려되어 다시 메우기까지 했다.
또한, 이 마을은 원래 포구와 내륙을 연결하던 여러 길의 요지이었다. 상동에서 청룡재를 넘어 산지촌 마을을 지나 함평의 학다리로 가는 길을 ‘비단길’이라 하며, 이 길은 평월마을을 포함한 고절리와 용월리 사람들이 학다리역을 갈 때, 학다리 사람들이 망운장이나 무안장을 보러올 때, 또한 고절리와 용월리 여자들이 갈퀴나무를 하여 팔러 갈 때, 평월마을의 남자들이 겨우내 짰던 가마니를 팔러 갈 때 등 무수히 다녔던 길이다. 그리하여 비교적 좁은 길이었지만 사람들의 왕래가 잦아서 ‘비단길’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마을에는 장승백이가 있었는데, 현재 서해안고속도로 무안 나들목에서 무안으로 들어오는 입구에 있었으며, 그곳에는 주막과 여러 채의 집이 있었다고 한다.
그렇듯이 마을에는 조선시대에 ‘평제원(平梯院)’이라고 부르는 역참이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평제원이 나오는데 ‘현에서 북쪽으로 8리 떨어져 있는 곳에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주민들도 예전에 역마을이라는 지명이 있었으며 큰마을에서 작은마을로 넘어가는 능성이를 ‘역마등’이라 하고, ‘주막등’이란 지명도 있었다고 한다. 그 외에 말을 먹이는 ‘마싯골’이 있었는데 ‘모싯골’이라고도 한다. 말들의 먹이통으로 여겨지는 ‘구수 맛골’도 있다.
동/식물
마을 정자 앞에 큰 팽나무가 있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남아있는 지명으로 갈봉(관노봉), 됫백이, 쐐기, 평제원, 역마을, 역마등, 구박골 용샘, 비단길, 청룡제 등이 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예전에는 마을회관 앞에 3기의 입석(立石)이 있어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했다. ‘살맥이독’이라고 불리는 이 입석은 마을에 호열자, 홍역, 천연두 등 전염병을 막기 위해 세웠다. 주민들이 당산제를 지낸 후 줄다리기를 하고 줄을 입석에 감았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당산제도 지내지 않고 입석도 없어졌다. 얼마 전까지 두 기의 입석이 남아있었으나 현재는 한 기도 없다.
유물, 유적
마을 뒤에 ‘칠성바위’라고 부르는 고인돌군이 있다. 울타리 안에 6기 그리고 울타리 밖에 1기가 있는데, 주민들은 이 중에서 한 개의 고인돌을 ‘달바위’라고 부르기도 한다. 칠성바위라고 하여 별의 모양으로 배치되었는가 하였더니 그것은 아니고 2줄로 배열되어 있었다. 제일 큰 바위를 재보니 260cm×285cm의 길이였다. 칠성바위가 놓여 있는 주변의 지반이 모두 바위였다. 하지만 주민들은 현재 3기가 대밭에 따로 있다고 한다.
현재 마을회관 옆에 평월재, 평교단, 효자각 등 압해정씨 가문과 관련된 유적들이 들어서 있다. 평월재는 1989년에 세운 건물로 정면 4칸, 측면 2칸, 팔작지붕의 형태이다. 평교단은 삼문이 있으며 입향조의 선대인 정극순의 가묘가 있는 단을 모시고 있다. 효자각은 여러 차례에 걸쳐 중수한 건물로 안에는 정려 현판이 걸려 있다. 효자각의 주인공은 입향조의 백부인 정찬이다. 정찬은 정극순의 손자로 1533년에 태어났다. 정찬은 천성이 유순하고 재질이 과인하여 효행이 하늘을 감동시켰다. 어머니께서 병석에 눕자 매일 변을 맛 볼 정도로 지극한 효성을 보인 것이다. 해서 당시 사림이 국가에 천양(闡揚)하여 국가에서 정려를 명했다. 효자각은 명종 7년 성동리 마기곡에 창건 후 1920년경 현재의 위치로 옮겨서 중건하였다. 오래되어 무너져 버린 효자각을 2005년에 새롭게 중건하는 등 지금까지 다섯 번 중수 하였으며 내부에 정려편액 1기가 있다. 평월재각 앞에 정철수공적비(1990)가 있으며, 영성정씨부사공파세적비(1983)와 효자정찬정려중수헌성비(2006)가 있고, 1993년에 건립된 애향평월시정중건헌성비가 있다.
설화
마을을 지나는 비단길의 ‘지말등’이라고 부르는 곳에 선돌이 있었다. 주민들이 ‘각시바위’라고도 부르는 이 바위는 기원이나 소원을 들어주는 바위로 주민들이 정성스레 치성을 들여왔던 바위이기도 하다. 실지로 이 마을에서 장군이 나왔는데, 그 사람 어머니의 말을 들어보면 이 바위에서 애기를 팔았기 때문에 신령의 보호를 받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팔다’라는 어휘는 ‘특별한 치성을 드렸다’라는 의미이다. 각시 바위의 중간에는 정화수나 제물을 올릴 수 있게 홈이 파여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길을 넓히면서 이 바위도 길에 묻혀 버렸다. 각시바위 옆에는 주막도 있어서 당시에는 번화했던 길임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