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마을은 「새터」, 「가운데뜸」, 「건네뜸」, 「산중」, 「모란밭(해당화가 많아서)」, 「범바우」로 이루어졌다. 운남면 소재지에서 서쪽으로 3km가량 떨어져 있으며, 신월로 옆에 있다. 운남면의 지형이 그렇듯이 마을 주변에 큰 산이 없다. 그러나 운남의 서쪽 끝에 있는 원동은 좌측의 호암산에서 흥문산으로 이어지는 비교적 고지대 둔덕 아래쪽에 위치한다. 마을 앞쪽에는 「들판(달애기농장)」이 있고 멀리는 망운면 조금나루가 보이며 마을 뒷쪽에는 바다 건너 신안군 고이도가 지척이어서 주변을 조망하기가 용이하다.
지명유래
「원동」은 「언꾸지」라고도 불렀지만 그 유래는 정확히 찾을 수 없었다. 무안군이 발행한 《마을유래지》에는 ‘마을이 앞으로도 더욱 큰 마을이 될 수 있는 곳이라 하여 집 원(院)자를 붙여 원동(院洞)이라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주민들도 ‘주변 마을 중에서 제일 먼저 형성된 마을’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지난 마을조사를 통하여 《한국지명총람》에서 ‘원동은 신흥 서쪽에 있는 마을로 원집이 있었다’라는 기록을 발견하였다. 「원집」이란 예전에 관리나 나그네들이 유숙하는 원(院)으로 쓰던 집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원이란 고려나 조선시대에 출장 나온 관원들을 위해 각 요로(要路)와 인가가 드문 곳에 둔 국영 숙식시설이다. 참고로 삼향읍 유교리에도 같은 한자를 쓰는 마을이 있다. 이 마을도 원이 있었던 마을이다. 실제로 마을의 지리적 환경을 보면 신안군 고이도와 선도 주민들이 내륙으로 오고가는 항구와 같은 통로 역할을 하고 있어 원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하여 마을 형성도 조선조 후기에 이루어졌으리라 여겨진다.
마을형성(입향조)
마을의 입향조는 260여 년 전에 한양에서 이곳으로 유배되어 온 청주한씨 한사준(韓士俊)이다. 그 외의 내용은 자료가 없어 확인할 수 없었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배산임야(背山臨野)형이다. 마을 뒷길 건너에 「숫돌봉」에서 이어지는 흥문산(興文山)과 호암산(虎岩山)이 있다. 호암산은 바위산인데 지형이 마치 호랑이가 엎드려 있는 형국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주민들은 이 호랑이가 서해안을 건너 한양으로 올라가려고 했으나, 조금나루의 청룡도와 내동의 총이 겨누고 있어 힘을 써보지 못하고 웅크리고만 있다고 한다, 그러나 언젠가 이 호랑이가 힘을 얻어 원래의 기상을 펼칠 날이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마을성씨
청주한씨 외 혼합성씨 마을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예전에는 주변 사람들이 이 마을을 「고잔언꾸지」, 「언꾸지뽈깽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주민들은 「고잔」이란 조선시대 영광군 고잔면에 속했다 해서 부르는 지명이라 하는데, 조선시대 영광군에는 고잔면이란 지명이 없다. 물론 고려시대나 그 이후에도 없다. 추정컨대 ‘고잔’이란 다른 지역 사람들이 이 지역을 업신여겨서 지칭했던 이름으로 여겨진다. 말하자면 후미지고 낙후된 고장이란 뜻의 ‘고장’이 변음되어 「고잔」이라 불려지게 된 것이라 하겠다. 지금도 일부에선 「고잔놈들」 또는 「고잔것들」이라는 말이 쓰이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사용을 자제해야 할 용어이다. 하지만 경기도 안산시 고잔동의 지명인 고잔(古棧)은 곧 오래된 나무다리 또는 나무나루를 뜻한다는 점에서 바닷가 마을인 「원동」의 지형적인 특성과 어울려 옛지명 「고잔」 의 가능성도 충분하다고 추정된다.
행정구역 변경
원래 영광군 망운면에 속한 지역이었으나, 1914년에 무안군 망운면에 편입되었다. 이후 1983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망운면에서 운남면으로 분리되어 1987년부터는 운남면 내리에 속한 「원동」마을이 되어 현재에 이른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마을의 앞뒤로는 간척으로 인한 농지가 조성되어 있다. 마을 앞에 조성된 간척지는 일본인 「산전(山田)」에 의해서 완성되었는데 그 후에 비로소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특히 논보다는 밭이 많아 외지에서 이 마을로 시집오기를 꺼려하기도 하였다. 새마을사업이 한창일 때는 아녀자들이 중심이 되어 범바우산 앞 뻘에서 갯지렁이를 잡아 가정경제를 이끌었다. 현재는 주민 대부분이 농업을 위주로 하고 있고 3가구가 어업을 하다가 그만두었다고 한다. 현재 범바우 앞에서는 대규모 새우양식장을 운영하기도 한다.
주요시설
화평교회
마을변화
주민들은 운남면에서 가장 많은 공무원을 배출한 마을이 「원동」이라고 입을 모아 말한다. 운남국민학교에서 1학년부터 6학년까지 반장이 모두 이 마을 자녀가 차지한 때도 있었다. 경제적으로도 「달애기농장」의 원둑을 막기 전에는 어려웠지만, 원둑을 막은 후부터는 넉넉해지고 특히 탄도만의 수산물을 거둬들이면서는 경제에 아쉬움이 없다고 한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노인회, 부녀회, 어촌계
공동이용시설
원동마을회관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흥문산은 공동묘지였으며 특히 초분이 많이 있었다. 김웅의 소설 《죽창》에는 구장댁 며느리 최행님이 남편의 폐병을 고치는데 해골바가지에 고인 물이 좋다는 말을 듣고, 이를 얻기 위해 김용수와 야간에 초분골에서 시체가 들어있는 관을 여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숫돌봉에서는 질 좋은 점토가 나와 옹기의 재료가 되고 있으며 화장품의 원료가 되는 백토도 채취하고 있다. 지금도 숫돌봉 주위를 살펴보면 점토층과 백토가 넓게 분포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숫돌봉은 싯돌봉이라고도 하는데 칼을 가는 돌이 나온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 앞에는 큰방죽들이 있고 마을 뒤에는 두뭇골이 있다. 두뭇골에는 물이 잘 나오는 방죽이 있어 장어 등 고기가 많이 살고 있었다. 한때는 이 방죽이 주민들의 자랑이었으나 지금은 메워져 이름만 전해지고 있다. 또 두뭇골 옆에는 베늘리라고도 부르는 산박들 또는 산밧골이 있다.
동/식물
마을 중앙에 있는 은행나무는 마을 곳곳에 뿌리를 뻗어 새 나무가 생기고 있다. 언뜻 보면 암컷처럼 보이지만 수컷이어서 열매를 맺지 않는다. 나무의 수령이 오래되다 보니 죽은 가지가 많이 있다. 그런데 이 가지가 꺾어질 때마다 마을의 우환이 발생한다고 한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남아있는 지명으로 ‘짓댕이’가 있으며 물이 나오지 않는다 해서 ‘고자고랑이’라고 부르는 지명도 있다. 서북쪽에 있는 부리로서 큰 뻘끝이 있다. 호암산 뒤에는 ‘도챗골’이 있으며 옆에는 양어장의 ‘죽개’가 있다. 이외에 ‘배늘리’, ‘허청골’, ‘터럭바우’ 등이 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마을 중앙에는 주민들이 자랑으로 여기는 은행나무가 있다. 둘레가 2m 80cm 넘을 정도로 오래된 나무인데 이 마을의 입향조가 들어오면서 심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예전에는 이 나무를 영험하게 여겨 주민들이 모두 모여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당산제를 지내왔으나 요즘에는 개인별로 치성을 드리고 있다. 이 나무에 정성스럽게 치성을 드렸던 주민의 외손 중에 사법고시 합격자가 나오기도 하였다.
유물, 유적
목포대학교박물관에서 조사한 자료를 보면 토기(土器) 요지가 있었다고 한다.
요지는 마을 북쪽에 있는 「산박들」의 구릉사면부에 위치한다. 요지가 있는 곳은 마을 남쪽 해안으로 3기의 요지가 있으며 그중 1기는 해안가의 낮은 구릉에 위치한다. 다른 2기는 이곳과 인접한 해안가의 단애를 따라 산재해 있었다고 한다. 회청색경질토기편과 자기편 등이 수습되었다. 또한, 마을 뒤 길가에 <현원광산김씨사행비>라는 열녀비가 있으며 마을 왼쪽에는 「화평교회」가 있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죽창』에 기록된 원동마을의 상사소리와 상여소리, 주인공 김용수가 객지에서 고향에 돌아와 머물면서 동네 대소사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나옴
<원동마을 상사소리(논매기할 때 부르는 노동요)>
어여 어허여루 상사디여어
앞산은 멀어지고 뒷산은 다가온다(선창 메김소리)
어여 어허여루 상사디여어(후렴)
이물꼬 저물꼬 다 헐어놓고 쥔네 양반 어디 갔나?
어여 어허여루 상사디여어
장터 안에 첩을 두고 첩내 방에 놀러 갔소
어여 어허여루 상사디여어
이 배미 저 배미 다 심어불고 한 배미만 남았구나
어여 어허여루 상사디여어
떴다 보아라 밥 소쿠리가 떴네
어여 어허여루 상사디여어
서마지기 논배미가 반달만큼 남았고나
어여 어허여루 상사디여어
네가 무슨 반달이냐, 초승달이 반달이제
어여 어허여루 상사디여어
모시야 적삼에 반쯤 나온 젖좀 보소
어여 어허여루 상사디여어
많이야 보면 병 난단다 담배씨만큼만 보고 가소
어여 어허여루 상사디여어
<빈상여 소리>
(발인 전날 밤에 망자의 집 마당에서 놀리는 상여/본 공연에 앞서 해보는 리허설에 해당/3회 후 팥죽을 먹고 종료)
가나암 보오사알(공포가 선창)
가나암 보오사알(상두군들이 복창)
너허 너허 너화너 너이가지 넘자 너화너
(상두꾼들이 받는 소리도 점차 구슬픈 가락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가네 가네 나는 가네 북망산천으로 나는 가네
너허 너허 너화너 너이가지 넘자 너화너
북망산천 머하더니 내 집 앞이 북망일세
너허 너허 너화너 너이가지 넘자 너화너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오실 날이나 알려주오
너허 너허 너화너 너이가지 넘자 너화너
노다가세 노다가세 항천 가기 전에 노다가세
너허 너허 너화너 너이가지 넘자 너화너
(마칠 때 하는 소리)
가나 보살 가나 보살 (한동안 반복되다 공포가 쉬어갑시다
하는 말에)
태고오
태고오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미기재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이 마을도 운남면의 다른 마을처럼 6.25 한국전쟁 때 주민들의 갈등으로 인한 피해가 많았다. 어림잡아 약 30여 명이 한국전쟁 기간 중 피해를 봤는데 「언꾸지 뽈깽이」, 「모스크바」라고 부르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당시에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 다른 마을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았다. 특히 「배나무정」에서 망운의 총포부대와 싸웠던 죽창부대 대장이 이 마을 주민이기도 하다.
운남 출신 소설가 김웅이 전 3권으로 쓴 장편소설 『죽창(세손출판사, 1996)』 에 잘 묘사되어 있다. 소설의 주인공 박기태(두곡 출신)와 김용수(원동 출신)가 무안에서 버스를 타고 고향에 가다 폭설에 망운 목내에서 차가 막혀 머리실(두곡) 박기태 집까지 걸어 하룻밤 자는 것부터 소설이 시작된다. 원동마을은 『죽창』의 주요무대이며 마을 유지 임동석(구장댁), 임동석의 며느리 최행님, 송민섭, 이수남, 수철 형제 등 주요 등장인물이 이 마을 출신이다. 한국전쟁 당시 10세였던 김웅 작가는 소설의 서문에서 당시의 참상을 사실에 근거를 두고 『죽창』을 썼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