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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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3리 운남면 월악 작성
  • 월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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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브 정보

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총 90세대, 인구 141명(남74, 여67) / 2025.12.기준.
자연마을 구성
이 마을은 운남면 소재지에서 월악길을 따라서 약 3km 가량 진행하다가 왼쪽으로 꺾어서 들어가면 만날 수 있다. 주변에 큰 산이 없어서 들판에 세워진 마을로, 서해바다 건너에는 신안군 고이도가 손에 잡힐 듯이 가깝다. 마을에서 남쪽을 바라보면 간척지 너머로 대박산이 훤히 보이기도 한다. 마을 구성은 「고랑물」, 「너매」, 「새터」, 「한아지」, 「종점」, 「오기촌(버득)」 「꿩(공)바탕」, 「물목」, 「학선동」, 「사신동」, 「원건네」 등 11개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행정구역으로 운남에서 가장 많은 마을을 안고 있다. 이처럼 자연마을이 많은 것은 달을 둘러싸고 있는 하늘의 별들을 나타내기 때문이라고 주민들은 말한다. 마을이 형성될 때는 「고랑물」에서 김, 박, 이(金, 朴, 李)의 세 성씨가 마을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점차 주민들이 늘어나 여러 곳에서 터를 잡아 오늘의 월악을 이루게 된 것이다.
지명유래
「월악(月岳)」은 달과 관련이 있는 마을이다. 원래 지명은 1789년 《호구총수》에 나오듯이 ‘달이 떨어지는 마을’이라고 「월락촌(月落村)」이라 하였으나, 그 의미가 바람직하지 않아 일제강점기에 들어 현재의 이름인 「월악(月岳)」으로 바뀌었다. 한글로는 「달애기」라고도 부르는데, 이렇게 바뀐 것은 마을 서쪽에 국수산이 있는데 달이 질 때 국수산 묏부리에 걸린다 해서 「월악」이라 한 것이다. 「고랑물」은 골짜기 마을이란 말에서 비롯된 지명이다. 「한아지」는 「한호지」라고도 불리는데 주민들의 설명에 따르면 결국은 한 가구만 남는다는 의미를 지닌 지명이다. 「오기촌」은 오기(傲氣)가 많은 사람이 산다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공바탕」은 나무꾼들이 공놀이를 하던 곳이라고 하나, 이번 조사에서 주민들은 「꿩바탕」이란 솔밭 아래 양지쪽이라 겨울에 눈쌓이면 꿩들이 많이 내린다고 해서라고 한다. 「학선동」은 풍수적 의미로 학이 날아가는 형국의 마을이며, 「물목」은 물이 멈추는 지역이란 의미이다. 끝으로 처음에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보이는 「고랑물」은 국수산을 배경으로 앞에는 신안군을 건너볼 수 있는 서해안을 마주하고 있는 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에 처음 들어온 사람은 김해김씨 김세덕(金世德, 자-사원)이다. 김세덕은 1600년대 말 영암군 시종면에서 살기 좋은 곳을 찾아 「고랑물」로 들어와 터를 잡았다. 공은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다른 사람들의 모범이 되는 생활을 했다. 이후 밀양박씨 박봉묵(朴鳳默, 자-여행, 호-湖月, 1678~1733)이 신임사화를 피하여 이 마을에 들어와 명리를 멀리하고 서적과 벗 삼아 일생을 보냈다. 공의 무덤은 몽탄면 구리마을 죽봉 아래 있다. 공은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의 우애가 돈독하였으며 기상이 있었다. 곧이어 전주이씨들이 들어왔다. 전주이씨 입향조는 이순원(李順遠, 미상~1801)의 아들인 이재(1744~1818)로 영광 무량제에서 태어났다. 시국이 어수선하여 계속해서 머물 수가 없어 조용한 곳에 은거하기 위하여 연리 「도탑골」에서 살다가 이 마을로 들어왔다. 공은 효성이 지극하고 학문이 깊어 주민들의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뒤이어 진주강씨도 들어왔다.
풍수지리(마을형국)
주산인 국수산의 지형이 지네 형국이라 맞은편에 보이는 성내리의 다경진성을 닭으로 보았다. 이는 국수산의 지형이 길게 뻗고 여러 갈래로 흐르는 지네(百足) 형태를 닮은 것으로, 풍수적으로는 마을에 생기가 흐르고 사람이 왕성하게 살아가는 기운을 의미하며, 맞은 편 다경진의 닭형상과 아울러 “상극(相剋)이 오히려 조화를 만들어” 마을의 안전과 번영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마을성씨
김해김씨, 밀양박씨, 전주이씨, 진주강씨 등 혼합성씨 마을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미기재
행정구역 변경
원래 영광군 망운면에 속한 지역이었으나, 1914년에 무안군 망운면으로 편입되었다. 이후 1983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망운면에서 운남면으로 분리되어 1987년부터는 운남면 내리에 속한 「월악」마을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주민들의 주업은 농업이 대부분이나 대규모 새우양식장이 있다. 어르신들은 「달애기농장」이 조성되고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얽힌 일화를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마을 조성 초기부터 여러 성씨들이 모여 살아서 그런지 외지인에 대하여 개방적이고 호의적이다.
주요시설
달애기복합주민센터
마을변화
「월악」마을은 최초 농촌공동체 활성화를 위한 다양한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2019년에는 <달애기복합주민센터> 준공과 함께 마을축제가 열렸고, 2025년에는 농협자산관리회사와 운남농협의 사회공헌활동으로 주민들에게 생활물품이 지원되는 등 복지, 문화, 공동체 기반이 강화되고 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동계, 노인회, 부녀회
공동이용시설
마을회관, 경로당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마을은 양쪽에 간척지를 끼고 있다. 신월과 이어지는 「달애기농장」은 조선조 말에 다경진만호 백수문에 의해서 만들어진 간척지이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 「산전만길랑(山田萬吉郞)」이 운영하였다. 농장 외에 태양열 단지와 염전이 운영되고 있다. 또 성내리 농장마을과 이어지는 제방은 1968년 한해(旱害) 때 만든 간척지이다. 이곳에는 대규모 새우양식장이 운영되고 있다. 이 마을에는 또 하나의 특이한 간척지가 있다. 「채탑골농장」이라 부르는 간척지인데 마을 주민 8명이 힘을 모아 이룩한 농장이다. 달애기 농장주 일본인 산전(山田)의 행패가 극심하여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자주적인 농장을 만들어보자는 뜻을 모아 만든 간척지이다.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미기재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국수산은 주민들이 신성시 여겼던 산이다. 얼마 전까지 산 위에는 주민들이 단을 쌓고 치성을 드려왔던 곳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단의 형태가 희미하게 남아있고 바위가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 잡목이 우거져 있다.
유물, 유적
마을회관 앞에 1988년에 세운 <해봉밀양박공종휴송덕비>가 있었는데, 2022년경 운남면사무소 앞으로 이전하였다. 이유는 한국전쟁 때 인민군 치하에서 망운면장 직을 수행하면서 지혜롭게 처신하여 많은 주민의 생명을 구한 박종휴 면장의 공을 운남면 차원에서 기리려는 의도라고 생각된다. 국수산 아래에는 주민들이 명당고지 또는 명당 끝이라고 부르는 수원백씨 묘가 있었다. 망주석이나 비석은 없었지만 예사롭지 않은 자리에 세워진 묘다. 「고랑물」에 <강릉유씨열부비각>이 있고 이곳에서 「너매」로 넘어가는 길목에는 <전주이씨효자각>이 있다. 1944년에 지어진 열부각에는 <절부고사인박덕규처유씨행실비>라는 비가 있다. 1940년에 지어진 효자각에는 효자 이태복의 효행을 기록한 <효자죽헌이 공지비>가 있다. 그 옆에 <죽산거사이공사적비>가 있다. 「한아지마을」 뒤에 샘이 있었는데 문둥병도 낫는다고 하는 약효가 뛰어난 샘물이었다. 2025.9.5. 재조사 할 당시에 현장을 보니, 옛날에는 샘터 주변에 두 가구가 살았다고 한다. 그 샘은 갯벌에 있었는데 썰물 때 바닷물을 퍼내면 약수(용천수)가 금방 채워졌다고 한다. 지금은 갯벌가에 방조제가 축조되어 접근하기도 어렵고 거주민도 없어 이용하지 않는다. 썰물 때 드러난 샘은 갯벌이 꽉 차 있었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효자각과 열부비각의 내용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효자 이태복(1808~1876)의 족보 명은 이문찬으로 태복은 아명이다. 자는 「문백」이요 호는 「죽헌」이다. 부친께서 알 수 없는 병으로 앓아눕게 되자 갖은 의약도 효험이 없고 병만 깊어가므로 아버지를 대신해서 죽겠다고 했다. 그러나 끝내 부친이 위독한 상태에 이르자 허벅지의 살을 베고 단지를 하여 구완하였다. 이러한 아들의 효심에 하늘도 감동하여 부친의 병이 완쾌되니 공의 나이 16세였다. 그 후 부모가 돌아가시자 3년간의 시묘살이를 지성으로 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슬하에 자식이 없어 양자를 들여 대를 잇게 하였다. 강릉유씨열부비 내용은 다음과 같다. 비각은 시멘트 구조물로 1944년 (갑신년)에 세웠다. 시멘트 담 안에 비각이 세워져 있다. 비각의 오른쪽 기둥에 「백세광연(百歲光然)」 왼쪽 기둥에 「천추명절(千秋名節)」이라 음각되었다. 강릉유씨는 망운면 탄도리 출신으로 18세에 밀양박씨 박덕규에게 출가하였으나 결혼 후 며칠 만에 남편이 죽자 남편의 뒤를 따르고자 하였다. 탄도에서 치마를 둘러쓰고 물에 투신하였으나 깨어나 보니 범바위 부근 모래사장에 누워 있었다. 유씨 부인은 ‘죽지 말라’는 하늘의 뜻으로 알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 시부모를 비롯한 시가 식구들을 극진히 모셔 주변의 표상이 되었다. 친가에서 재혼을 시키려고 하자 20여 년이나 친정에 가지 않았다고 한다. 부인이 별세한 후 양자인 종철이 부인의 열녀행을 널리 알리기 위해 비각을 세웠다.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박종휴(6.25 전쟁 당시 망운면장), 이선신(면장) 박종걸(면장), 이현장(평통위원)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마을에는 일제강점기 때 징용으로 끌려간 사람이 2명이 있었다. 마을회관 앞에 1988년에 세운 <해봉밀양박공종휴송덕비>가 있다. 해봉 선생은 6.25 한국전쟁 당시 망운면장이었는데 수복 이후 좌익에 관련된 사람을 색출하여 처단할 때 감정이 아닌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게 하여 많은 목숨을 살렸다고 한다. 또한, 이 마을에는 강씨 성을 사용한 사람이 운남면 좌익총책으로 있었는데 밖으로 나타나는 행동은 많이 하지 않았다고 한다. 운남 출신 소설가 김웅이 6.25 전쟁 중 운남에서 일어난 사건을 배경으로 쓴 장편소설 『죽창(세손출판사, 1996)』 에는 당시 망운면장이 ‘신창민’으로 묘사된다. 신창민은 말 한마디에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처럼 오가던 동족상잔의 전쟁 중에 망운면장 직을 수행하면서 좌우 양쪽에서 신뢰받게 처신하는 것으로 그려졌다.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미기재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미기재
기타사항
미기재

출처

각주
미기재
참고문헌
1. 《마을유래지》(무안군, 1987) 2. 《마을역사자료조사》(무안문화원, 2017) 3. 《무안군의 문화유적》(목포대학교박물관, 1986) 4. 김웅 소설, 『죽창』(세손출판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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