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마을은 내5리에 속하는 마을로 원래는 「가난골」이라 불렀다. 주민들이 마땅한 농지도 없고 수입도 없어서 가난하게 사는 마을이라 해서 「가난골」이라 했다. 이 마을은 「가는골」과 「허천굴」, 「동섬」으로 이뤄졌는데 「내동」과 「원동마을」 중간지점에 자리 잡고 있다. 「허천굴」에는 2가구가 살았는데 지금은 없어지고 밭으로 변했다.
지명유래
원래 가난하게 사는 마을이라 해서 「가난골」이라 했는데 한자로 바뀌면서 ‘가는골’이라는 의미의 「세동(細洞)」으로도 불렀다. 이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당시 망운면장이었던 박종휴 씨가 「신흥」으로 개명했다. 「신흥」은 새로 일어날 수 있는 마을이란 의미가 있다. 《마을유래지》에는 ‘마을 형성 당시 「개능골」이라 했다가 한국전쟁 이후 원동과 분리되면서 마을을 새로 일으킨다 하여 「신흥(新興)」이라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의 입향조는 반남박씨 박종년(朴宗年, 자-대수, 1774~미상)이다. 공은 나주 반남에서 세거하였으나 살기 좋은 곳을 찾아 이 마을에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무안군 《마을유래지》에는 ‘반남박씨인 박종년이 1841년에 한양에서 이곳으로 귀양오면서 박씨의 입향조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었다. 이를 확인하기 위하여 주민과 후손의 말을 들어봤으나 확인되지 않았다. 반남박씨 족보를 보아도 벼슬에 대한 기록도 없고 특히 귀양을 왔다는 표현도 없이 간단한 인적사항만 기록되어 있었다.
하지만 입향조의 손자인 박제언(자-기순, 호-여은. 1875~1946)은 인근에서 알아주는 큰 학자였다. 《무안연원록》에 따르면 박제언은 송사 기우만 선생의 제자로 학문이 깊었을 뿐 아니라 총민하고 효우가 독실해 주변의 칭송이 자자했다고 한다. 많은 제자들을 가르쳤을 뿐 아니라 마을의 중앙에 「서당골」이라 부르는 곳에 학당을 두어 후손을 포함한 주민들을 가르쳤다. 주민들은 「한양 양반」이라 부르며 따랐다고 한다.
풍수지리(마을형국)
호암산은 바위산으로 반도의 형국인데 망운의 조금나루를 바라보고 있다. 산의 지형이 마치 호랑이가 엎드려 있는 형국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주민들은 이 호랑이가 서해안을 건너 한양으로 올라가려고 했으나 조금나루의 청룡도와 내동마을의 총이 겨누고 있어 힘을 써보지 못하고 웅크리고만 있다고 한다, 그러나 언젠가 이 호랑이는 힘을 얻어 원래의 기상을 펼칠 날이 있을 것이라고 주민들은 믿고 있다.
마을성씨
반남박씨가 많았으나, 지금은 혼합성씨로 이루어진 마을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문헌으로 마을 이름의 변화를 보면 조선 시대나 일제강점기 때는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광복 이후에도 나오지 않다가 1987년에 가서야 비로소 운남면 내리 신흥 마을로 기록되어 있다.
행정구역 변경
원래 영광군 망운면에 속한 지역이었으나, 1914년에 무안군 망운면으로 편입되었다. 이후 1983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망운면에서 운남면으로 분리되어 1987년부터는 운남면 내리에 속한 「신흥」마을이 되어서 오늘에 이른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이 마을은 주민들의 말처럼 운남면에서 가장 가난한 마을이다. 마을 주변에는 천혜의 갯벌이 있고 간척으로 형성된 기름진 땅이 있는데도 다른 마을과 비교할 때 현저한 가난 속에서 생활하고 있다. 주민들은 그 이유로 두 가지를 들었다. 하나는 어촌계 가입이 되지 않아 갯벌 수산물을 채취할 수가 없으며, 두 번째는 정부 지원을 받지 못해 마을을 발전시킬 기회를 놓쳤다는 것이다. 특히 여러 성받이가 모여 사는 마을이다 보니 의견 통합이 힘들고 추진력을 갖기 어려워 발전이 되지 않았다고 스스로 진단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주민들은 근면하고 검소하게 생활하여 경제적으로 불편함은 없다. 협동과 양보로 주민들의 목소리가 마을을 벗어난 적이 없다고도 한다.
주요시설
미기재
마을변화
「신흥」 마을은 최근 농촌복지 확충, 생활인프라 개선, 송전선로 건설사업이라는 세 가지 축을 중심으로 변화하고 있다. 이는 주민들의 삶을 안정시키는 긍정적인 요소와 함께 송전사업에 따른 주민과의 갈등이라는 과제를 동시에 안고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앞으로 무안군의 도농 균형정책과 주민 의견의 원활한 반영 여부가 마을의 발전을 좌우할 것으로 보인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동계, 노인회, 부녀회
공동이용시설
마을회관, 경로당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마을 앞에는 간척을 통해서 이루어진 간척지가 있으며 대부분 「내동」과 「원동」마을 사람들의 소유이다. 원래 이 간척지는 조선말 다경진만호였던 백수문이 「신월마을」과 「월악마을」에 둑을 막으면서 형성된 「달애기농장」이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에 의해 관리되면서 마을 사람들은 이 간척지를 「산전이 농장(일본인 山田萬吉郞)」으로 불렀다. 이 간척지는 일본인의 농장이었지만 주민들의 삶을 윤택하게 해주었다.
농장이 형성되기 전까지는 이렇다 할 농지가 없어 주민들이 대단히 곤란한 생활을 했으며, 농지가 조성되었어도 물이 없어 곤란을 겪었다. 물을 가둘 수 있는 저수지가 없고 염기가 많은 농지이다 보니 비가 오지 않으면 농사를 지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지하수개발이 본격화되면서 비로소 농사다운 농사를 지을 수가 있었고 생활 형편도 좋아지게 되었다.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마을 뒤에 「숫돌봉(주민들은 싯돌봉이라 함)」이 있다. 이 봉우리는 호암산으로 가는 길 입구에 있으며 반남박씨 문중 산으로 산에서 싯돌로 사용할 수 있는 돌들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낫을 많이 사용했던 시기에는 이 산에서 주워온 돌로 낫을 갈아 날을 세우기도 하였다. 호암산에는 여시골이란 곳이 있는데 예전에는 여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싯돌봉과 호암산 사이에 「목넘개」라는 지역이 있는데 현재는 양식장을 하는 곳을 말한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마을 뒤에 있는 「숫돌봉」은 고려시대에 가마터가 있었던 곳이다. 주민 박진석 씨 소유의 밭 주변에 다량의 토기편이 산재해 있었다. 목포대학교 박물관 자료에 따르면 숫돌봉 구릉상의 북사면에 요지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유물은 회청색 계통의 토기로 격자문이 새겨져 있어 시기는 고려시대로 추정하고 있다. 80년대에는 외지에서 질 좋은 이곳의 점토와 백토를 찾아 싯돌봉의 흙을 채취해 간 일도 있었다.
또한, 마을 오른쪽 「동섬」이라 부르는 곳에 1997년 3월에 운남초등학교로 통합된 내리국민학교가 있었다. 지금은 종교단체인 목포 주안교회에 매각된 학교 부지이지만 주민들이 울력으로 일궈낸 배움터였다. 원래는 「내동마을」에 세우려고 했으나, 「내동마을」 주민들이 학교 부지를 내주지 않아 이 마을에 세워진 것이다. 마을 주민 중 김재동, 김장용, 배삼용 등 세 사람은 2세 교육을 위해 자신의 땅을 학교 부지로 쾌척하였다. 하지만 학생 수 감소로 폐교할 때 지역 주민들과는 아무런 상의도 없이 교육청 단독으로 처분해 주민들은 대단히 큰 아쉬움을 지니고 있었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미기재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운남은 6.25 한국전쟁 때 운북, 운남의 지역간 갈등으로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봤던 곳이다. 특히 옆 마을인 「원동」은 ‘운남의 모스크바’로 불리면서 30여 명이 피해를 볼 정도로 혼란이 컸던 곳이다. 해서 이 마을도 어느 정도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여겼으나 주민들은 전혀 피해가 없었다고 한다. 마을에 영광과 불갑산을 오가며 좌익 활동을 했던 주민이 있었으나 주민들에겐 피해를 주지 않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