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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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암5리 운남면 용동 작성
  • 용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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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브 정보

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총 55세대, 인구 93명(남47, 여46) / 2025.12.기준.
자연마을 구성
「용동」은 동암5리에 속한 마을로 20여 년 전에 「원동암」에서 분리되었다. 궁게들을 중심으로 자연마을인 탑동, 색교, 어장골, 용동마을로 이루어졌다. 운남면 소재지에서 동남방향으로 3km 정도 가면 나오는 마을로 동암1리 「원동암」 마을의 안쪽에 있다.
지명유래
「용동」은 용골에서 비롯된 지명이다. 지형이 용을 닮았고 마을에 물이 잘 나오는 샘이 있어 마치 용이 머무는 마을처럼 여겨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또한 「탑동」은 용동마을 안쪽에 있다. 마을에 절이 있었는데 그곳에 탑이 있어 마을 이름도 「탑골」이라 불렸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오래전 동암마을 주민 중 한 사람이 목포에 이 탑을 팔았다고 한다. 탑은 지금도 목포에 있다고 하나 확인할 수 없다. 절이 있었던 자리에는 지금도 많은 기와 조각들이 나온다고 한다. 「색교」 또는 「새터」는 새로 조성된 마을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어장골」은 용동잔등이라 부르는 지역 주변에 있는데 예전에 비가 오지 않을 때는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던 곳이다. 특히 용등 잔등은 족두리잔등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예전에 서해에서 고기잡이하고 저녁 늦게 마을로 들어오는 배들에게 등대 역할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마을유래지》에는 지형이 ‘용꼬리를 닮았다하여 「용꼴」이라고 부르다가 「용동(龍洞)」으로 개칭하였다’라고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마을형성(입향조)
마을의 입향조는 원동암마을과 같은 김해김씨 김준희(金俊希)다. 얼마 전에 원동암마을과 분리되었고, 지금도 마을에 김해김씨들이 많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입향조인 김준희 공은 선조 대 사람으로 영암에서 살았다.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영산강변에 왜구의 출몰이 잦았을 뿐만 아니라, 왜구를 토벌한다고 관군 출입이 빈번해지자 이를 피해 살기 좋은 곳을 찾아온 곳이 이 마을이다.
풍수지리(마을형국)
「용동」 마을은 용의 꼬리 형국을 지닌 풍수지리적 길지로서 뒤로는 산이 받치고 앞으로는 청계만이 펼쳐진 배산임수형 바닷가 마을이다. 주민들은 이를 길지로 인식해 마을 이름을 「용동」으로 바꾸었으며, 풍수적으로 풍요, 발전, 수호를 상징하는 마을로 자리잡았다.
마을성씨
초기 김해김씨 집성촌, 현재는 혼합성씨 마을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미기재
행정구역 변경
1912년 자료에는 무안군 현화면 동암리로 나온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죽산리, 신기동, 영해촌, 석교촌, 서촌을 합하여 망운면 동암리로 묶여졌다. 이후 1983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망운면에서 운남면으로 분리되면서 운남면 동암리가 되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마을 앞에 있는 궁게들은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에 의해서 간척사업이 되어 형성된 농지이다. 이 들은 운남에서 제일 먼저 침수되는 수해지구로 일로의 영화농장과 망운의 구렛들과 함께 3대 수해지구이기도 하였다. 조금만 비가 와도 주민들이 불안했는데 현재는 옛날이야기가 되었다. 궁게는 ‘궁-구멍’을 파고 사는 "게" 이니, 「궁게들」이란 게 구멍에 게의 종류인 서렁기, 농기, 갈기가 들판 곡식처럼 널려 있는 갯벌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 갯벌이 일제강점기 때 간척이 이루어지고 용동저수지가 만들어지면서 주민들에게 옥답으로 바뀐 것이다. 이곳은 운남면에서 제일 먼저 경지정리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이 마을은 농사를 짓는데 있어서 선도 농가였다. 주민들 스스로 배우고 익혀서 효과적인 농산물을 생산해 주변 마을의 부러움을 받기도 했다. 예전에는 고추와 담배 농사가 주를 이루었다. 현재는 양파와 마늘이 주된 농사이나 면적당 수확량이 다른 마을에 비해서 높기도 하다.
주요시설
동암교회, 용동저수지
마을변화
톱머리 간척사업이 이루어지면서 물길이 바뀌고, 이어 농장과 골프장이 들어서면서 바닷물이 오염되었다. 그로 인하여 많이 잡히던 고기와 그들의 서식지였던 뻘밭은 모래와 자갈로 황폐해져 버렸다. 예전 황금어장의 소멸은 물론, 덤으로 물이 썩어가는 냄새까지 주민들은 맡아야 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청계만 주변에 거주민들이 대책위를 구성해서 어민들의 피해 보상을 요구하고 있지만 쉽게 결론이 나지 않고 있다. 바다의 시장인 ‘파시’가 열렸던 자리를 말하는 「전자리」라는 지명을 통해 예전에 이 마을에서 청계만 건너 도대 마을까지 이어지는 나루가 있었다고 기억된다. 이 나루로 인하여 파시(波市)가 이루어졌는데, 이 파시로 인하여 「전자리」라는 지명이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전자리」란 전(田/물때 따라 물가 교통 요지에 열리던 임시 저자)이 섰던 자리를 말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해제 쪽의 어촌에서는 파시가 열렸던 「전막금(전자리)」이라는 지명이 많이 있다. 이 나루는 얼마 전까지 하루에 한 번씩 목포와 연결해 주는 여객선(진경호)이 다니는 포구이기도 하였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동계, 노인회, 부녀회, 개발위원회
공동이용시설
용동마을회관, 용동경로당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마을 앞 청계만은 얼마 전까지 황금어장이었다. 석화를 비롯하여 낙지, 오징어, 숭어 등이 이른바 물 반 고기 반으로 잡혀 주민들에게 많은 소득을 안겨줬다. 마을 앞에 송림이 우거진 1,200여 평의 동산이 있어 바닷고기들이 산란하고 활동하기에 아주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고기 잡는 철이 되면 이런 수산물을 파는 파시가 형성되었고 많은 사람의 왕래가 있었다.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남아있는 지명으로 동암마을과의 경계에 있는 새알등, 죽산마을과 경계에 있는 똑똑골, 신기마을과 경계에 있는 시망등이 있다. 그 외에 서당너머, 동산길, 초분골, 정기밑에, 해지기잔등 등의 이름이 남아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목포대학교박물관 자료에 따르면 2005년 《문화유적 자료조사》에서 이 마을의 저온창고 뒤편에 있는 구릉에서 유물들을 발굴하였다. 유물은 회흑색연질토기에서 구연부에 파상문이 시문되어 있는 회청색경질토기편 등이 수습되었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다양한 계층에서 많은 사람이 제 역할을 하고 있어 국회의원 언론인 등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무안군 출신 애국지사 3인 중 한 분이신 김순복 애국지사께서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김진호(전 CBS 사장), 김성재(철학박사, 전 조선대학교 교수), 김용재(문학박사, 전 목포대 교수), 김광재(수의학 박사, 미국 거주) 등이 생존해 있다.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6.25 한국전쟁은 운남과 망운면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는데 운남면 주민 대부분이 피해를 많이 입었다. 하지만 이 마을은 피해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주민들이 서로 보호해 주고 감싸주었기 때문이다. 피해를 입은 사람은 2명인데 경찰 출신과 면사무소 직원이었다. 이 외에도 주민 3명이 행방불명되기도 했다고 한다.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미기재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미기재
기타사항
미기재

출처

각주
미기재
참고문헌
1. 《마을유래지》(무안군, 1987) 2. 《마을역사자료조사》(무안문화원,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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