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박산」마을은 성내리의 중심을 이루는 대박산의 맥을 타고 내려온 곳에 형성되어 있다. 마을 앞에는 1960년대 조리섬과 영해촌 간척과 더불어 개간된 농지가 펼쳐져 있다. 마을 방향의 도로 맞은편에는 바위산이 있으며, 「영해」마을 방향으로 바디나리산이 있다. 지금은 마을 주변이 도로와 평지로 개간되어 있지만 예전에는 대박산을 타고 내려온 숲이 마을 뒤를 받치고 있었고, 아름드리 소나무가 마을 곳곳에 있었다고 한다.
지명유래
이 마을의 이름은 뒷산, 대박산에서 비롯되었다 하여 한밭뫼(한박뫼) 또는 대박이라고도 부른다. 한편으로 마을 노인회장(박성석)은 ‘대박(大朴)’이란 지명이 ‘이 마을에 박씨 성이 많아 박씨들이 크게 되라’는 의미로 불렀지 않았는가 추정했다.
대박산이란 지명은 우리나라 곳곳에 있다. 강원도 정선에 있는 대박산은 산경표에 ‘크고 밝은 뫼’라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으며, 나주 다시에 있는 대박산은 ‘봉우리가 바가지 모양’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곳 대박산의 의미를 제대로 아는 주민들은 없었다.
마을형성(입향조)
마을의 입향조를 정확히 확인할 수는 없다. 다만 마을형성은 밀양박씨 박양삼(朴養三)이 함평에서 살다 생활이 어려워 여러 곳을 전전하다, 1660년경 이곳 대박에 정착해 김해김씨 딸을 맞아 자손을 이어갔다 한다.(제보자 박인규(朴仁圭)) 그러나 밀양박씨 족보에 박양삼은 찾을 수 없었고, 마을주민이 말한 밀양박씨의 입향조는 훨씬 뒤의 사람이었다. 이렇듯 마을 구성의 주요성씨인 무안박씨, 김해김씨, 제주양씨 등이 있지만, 이들의 입향유래가 밝혀지지 않아 대박마을 형성시기는 자세히 알 수 없다.(《마을유래지》, 1987)
풍수지리(마을형국)
이 마을은 지형이 바가지 모양을 하고 있어 와우형(臥牛形)이라 하는데, 바가지 모양과 와우형의 상관관계는 얼핏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마을의 바가지모양이 둥근 달팽이(蝸牛)집을 연상시켜 그렇게 부른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마을성씨
무안박씨, 밀양박씨, 김해김씨, 제주양씨 등 원주민과 외지에서 이주한 성씨 등 복합성씨를 이루고 있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호구총수》(1789)에 「대박산」마을은 무안현 현화면 「대박산리」로 기록되어 있다. 이후 일제강점기 들어와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1912)에는 현화면 「대박산동」으로 변경되었다가 《신구대조조선전도부군면리동칭일람》(1917)에서는 망운면 「대박산동」으로 나온다. 이후 1983년 운남면이 망운면에서 분면(分面)되면서 운남면 성내3리 「대박산」마을로 편성되어 오늘에 이른다
행정구역 변경
본래 무안 망운면 지역으로 조선시대에 다경진성이 있어 「성안」 또는 「성내」라고 하였다.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다시 「대박산동」은 무안군 망운면에 편성되었으나, 1983년에 망운과 운남으로 나뉘면서 운남면 성내3리 「대박산」마을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마을 주민들은 주로 농업에 종사하며 주요 작물은 벼, 양파, 마늘이다. 일부 주민들은 마을 안에서 작은 규모로 과수(果樹)를 재배하고 있다. 또한 마을 전체가 가축의 분뇨 냄새와 파리 등으로 곤욕을 치르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경제적인 여유를 제공하고, 돈분이 마을 주변의 황토 땅을 기름지게 하여 농작물의 수확에도 영향을 미쳐 소득이 늘었다.
주요시설
미기재
마을변화
마을에 들어서면 돈분(豚糞) 냄새가 코를 찌른다. 40여 가구가 사는 마을에 7곳의 돈사와 3곳의 우사에서 내 품는 냄새이다. 7곳의 돈사 중 5곳이 외지인이 경영하는 돈사라고 한다. 주민에게 ‘한 마을에 이렇게 많은 축사가 들어선 이유’를 묻자, ‘마을 앞에 있었던 구일산업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1960년대 구일산업이 이 마을과 영해촌을 막으면서 형성된 거대한 간척지에 농작물 대신 돼지를 기르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은 구일산업이 문을 닫아 간척지에는 돼지농장이 없지만, 그때의 영향으로 마을에 돈사가 많이 생겼다는 말이다. 또 다른 이유도 있다. 바닷가에 축사가 있으면 병충해에 강하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즉 해풍의 영향을 받아서 동물이 건강해진다는 것이다. 실지로 구제역이 전국에 요동칠 때도 무안에는 피해가 없었던 이유 중 하나가 해풍의 영향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부녀회(1978년 창립)와 노인회가 활동하고 있다.
공동이용시설
대박산마을회관, 마을누정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근처의 「학례」마을과 공동으로 실시한 행복마을 조성사업은 마을의 모습을 크게 바꿔놓았다. 붉은 벽돌과 기와를 얹은 팔작지붕의 한옥들은 정부의 한옥지원사업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말끔하고 단정한 한옥들은 여느 부촌 못지않다.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마을을 중심으로 4개의 뚜렷한 지명이 있다. 서쪽은 ‘앞구지(마을너머 바닷가)’, 북쪽은 ‘한아지(운남면사무소 방향)’, 동쪽은 ‘동남곶이(양곡‧신기마을 방향)’, 남쪽은 ‘바디나리(영해마을 방향)’이다. 또한 대박산 주변에는 4개의 곶이 있다. ‘동남곶이’ · ‘뿔당곶이’ · ‘우앙곶이’ · ‘밥풀곶이’ 등이다. 이외 ‘바위산’은 마을회관 앞 잔등으로 이곳에는 선선한 바람이 불고, 전망도 좋아 예전에 동네아이들의 주요 놀이터였으며, 어른들도 그곳에서 휴식을 취했다 한다. ‘장짓등’은 바위산 너머로 도원촌과 대박농장이 자리하고 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마을회관 뒤로 난 마을 길에는 당산나무인 멀구술나무(면나무)가 있다. 수령이 수백 년 된 이 나무는 2000년대부터 10여 년간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유로 고사 상태였으나, 10여 년 전부터 다시 살아났다. 그런 사정으로 나무기둥 중앙에는 커다란 구멍이 생겨났다. 정월보름에 이 나무에서 지내던 당산제는 2005년 무렵부터 폐지되었다.
유물, 유적
미기재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박병무(면장), 박채진(미군정시 초대면장으로 비석거리의 의로운 청년 중 한 명이며, 운남면사무소에 공적비가 있다), 박현오(면의원), 박종수(충남대 교수), 박성재(무안군 의원), 박문재(축협 조합장)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6.25 한국전쟁 당시 운남과 운북의 갈등 속에서 이 마을 주민 가운데 한 사람이 희생당했다.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미기재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마을 주변의 땅들은 대부분 외지인의 소유이다. 2000년대 이후 이 지역에 간척기업도시(자동차 공장 등)가 들어선다는 소문이 돌아 투기 바람이 불었고, 기획부동산이 들어서면서 대부분 시세보다 훨씬 비싼 값에 외지인들이 사들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발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후유증만 남았다. 그때 묻지마 투자를 했던 서울 사람들은 투기 바람이 잠잠해진 현장을 확인하고 망연자실했으며, 그런 모습을 보는 주민들의 마음도 역시 씁쓸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