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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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내4리 운남면 도원 작성
  • 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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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브 정보

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총 49세대, 인구 64명(남39, 여25) / 2025.12.기준.
자연마을 구성
「도원」마을은 압해도에서 운남방향으로 놓인 김대중대교를 건너면 바로 오른쪽에 있는 마을이다. 대박산맥을 타고 내려온 바위산을 배경으로 마을 앞에는 바다가 펼쳐져 있다. 예전에는 마을 주위로 소나무 숲이 우거져 길에서 보면, 마을이 식별되지 않을 정도로 은밀하며 아늑한 분위기였다 한다. 또한 바닷길에서 마을을 보면 한 폭의 그림 같았다고 한다. 마을 앞에 효지도가 있는데 15가구 정도가 거주하며, 주민들은 도원항을 통해 배로 왕래한다.
지명유래
「도원」마을은 도연명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서 비롯되었다. ‘이상향’, ‘별천지’로 비유되는 ‘무릉도원’을 줄여 ‘도원’이라 하였으며, 또한 산수가 좋고 복숭아꽃이 많아 도원(桃源)이라 하였다고도 한다.
마을형성(입향조)
원래 이 마을은 장흥고씨와 당악(해남)김씨의 터였으나 현재는 한 세대도 살지 않는다. 다만 마을 주변에 그들의 무덤이 남아 있어 예전에 그들이 살았음을 추정할 수 있다 도원마을 입향조는 《입향시조와 성씨자료》(1996) <기종헌(奇宗獻)>조 및 《무안지망집》(1997)의 <행원군 수허당 기공 묘도비명 병서 망운면 도원촌 행주기씨 입향조(幸原君 守虛堂 奇公 墓道碑銘 並書 望雲面 桃源村 幸州奇氏 入鄕祖)>에 따르면, 기종헌(생몰년 미상, 자–경유(景猷))은 혼조(昏朝: 광해년간(1608~1623)의 어지러운 시국)에 벼슬을 버리고 망운면 도원촌에 정착하였다 한다. 기종헌은 임란공신으로 사과(司果) 기대유(奇大有)의 손자이고, 개백군(皆伯君) 기효근(奇孝謹)의 아들이다. 1592년(선조 25년) 당시 남해현령(南海縣令)이었던 부친을 따라 왜구 토벌에 큰 전공이 있어 훈련원정(訓練院正)에 제수되었고, 1605년(선조 38년) 11월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이 되어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으며 행원군(幸原君)의 작위를 받았다. 선조가 공신지(功臣地)로 하사한 무안군 운남면 성내리 원성내마을에는 기효근(奇孝謹), 기자헌(奇自獻), 기종헌을 기리는 <도산사>가 건립되어 매년 음력 2월 15일에 제를 올리고 있다. 한편 《마을유래지》(1987)에 따르면, 기효근이 임진왜란 때 남촌 앞바다에서 순직하였으나 시신을 못 찾고 혼령(魂靈)만 남촌에 묻게 되자, 기효근의 후손 중 장성에서 살던 기성연이 묘를 지키기 위해 이곳에 이주해오면서부터라고 한다.(제보자 기순도(奇順度)). 또 《마을역사자료조사》(2017)에는 행주기씨의 무안 입향조는 기종헌이며, 그가 나주 다시면 초동(草洞)에서 살다 무안읍 매곡리 수반마을에 정착하였고, 이후 1700년대를 전후 기종헌의 증손 기종주(奇挺宙, 1665~1716, 자 여수(汝壽))가 대박산에 잠시 머물다가 도원마을에 정착하였다 한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미기재
마을성씨
얼마 전까지 이 마을은 행주기씨 집성촌이었으나, 외지에서 유입된 성씨와 섞여 요즈음은 복합성씨를 이룬다. 주민들은 선조의 뛰어난 업적을 안고 있으면서도 후손들이 기대에 못 미쳐 ‘비단 할아버지에 거적 자손’이라며 부끄러워 한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미기재
행정구역 변경
조선시대 《호구총수》(1789)에 「도원」마을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영광군 망운면 「다경진성내(多慶鎭城內)」와 「다경진성외(多慶鎭城外)」로 되어 있으며, 현재 위치로 보면 다경진성외에 해당된다. 이후 1910년에 목포부에 잠시 편입되었다가, 일제강점기에 무안군 관할로 편재되었다. 《신구대조조선전도부군면리동칭일람》(조선총독부, 1917)에는 무안군 망운면 성내리 현화면(玄化面) 「도원촌(桃源村)」으로 편성되어 있다. 1983년 망운면에서 운남면이 분면(分面)되면서 「도원」마을은 운남면 성내4리로 재편되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마을 주민은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지만 정작 농지면적은 넓지 않아 자가 수요할 정도이며, 대부분을 차지하는 벼 경작지는 외지인들이 짓고 있다. 마을주민의 주요 농작물은 배추, 콩 정도이다.
주요시설
염광교회, 도원항
마을변화
예전 마을에는 자랑거리가 많았고, 여러 성씨가 모여 사는데도 서로 얼굴 붉히는 일이 없었다. 마을의 각종 대소사는 협의와 협조를 통해서 처리하였고, 특히 제사나 대사를 치른 가정에서는 식이 끝난 후에 집집마다 음식을 돌리며 서로의 정을 확인했다. 또 범죄 없는 마을로 지정되었으며, 119 시범 마을로 선정되기도 했다. 여기에 다른 마을과는 달리 부부가 함께 해로하는 가정이 많아 홀로 된 노인이 많은 마을로부터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사람 수도 줄고 상황도 달라졌으며 예전의 미담이 줄어서 아쉬워한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체계적인 조직은 아니지만 마을회관을 중심으로 동계와 부녀회(1973년 창립)가 활동하고 있다.
공동이용시설
도원마을회관, 마을누정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마을 앞에 넓게 펼쳐진 농경지는 두 차례의 간척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첫 번째 간척은 조선시대에 이루어졌으며, 두 번째 간척은 1960년대에 이루어졌다. 마을이 지리적으로 무안의 변방으로 상대적인 소외감이 있었지만 김대중대교가 개통되면서 마을의 입지여건이 향상되었다.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울바우’는 남해안에서 해남의 울돌목 다음으로 물살이 빨라 바위가 소리를 낼 정도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지금은 간척 등 주변 환경변화로 예전처럼 물살이 세지 않다. ‘가능골’은 마을입구 쪽의 저수지 주변을 가리킨다. ‘절터골’은 도원마을 뒷산 넘어 보이는 영해마을 방향의 공간으로 예전에는 사람들이 살았으나 지금은 경작지로만 활용되고 있다. ‘목넘(망넘)마루’ 또는 ‘나루갓’은 도원선착장을 가리킨다. ‘불당고지(뿔땅꼬지)’는 대박산마을에도 남아있는 지명으로 지형이 돌출된 바닷가 지점이다. ‘조리섬’은 항장마을 부근의 조리모양의 섬이다. ‘독점(독섬)’은 항장마을 방향의 바닷가 섬 이름이다. 이외에도 이름은 있지만 위치나 의미를 확정할 수 없는 ‘구터’, ‘바칠나루(貢津)’, ‘이날리’, ‘애기등’ 등의 지명이 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도원」마을의 부조묘를 중심으로 행주기씨 문중기제가 이루어지고 있다. 예전에는 마을 앞에 두 그루의 당산나무가 있었으며, 당산나무를 중심으로 당산제를 지냈다. 하지만 나무가 고사하면서 당산제는 폐지되었고, 대대로 전래되던 농악놀이도 사라져버렸다.
유물, 유적
마을에 있는 <부조묘(不祧廟)>는 본래 4대가 넘는 조상의 신주는 사당에서 꺼내 묻어야 하지만, 나라에 공훈이 있는 사람의 신위는 옮기지 않아도 된다는 왕의 윤허를 받은, 즉 불천지위(不遷之位)의 묘를 말한다. 따라서 불천지위가 된 대상은 사당에 계속 두면서 기제사를 지낼 수 있는데, 이 부조묘가 도원마을회관 뒤에 있다. <충열묘(忠烈廟)>라는 현판이 걸린 이 부조묘는 개백군 기효근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1604년에 세워졌으나 종손의 잦은 이사로 여러 차례 옮겨지다가, 1997년 나주 다시 초동에서 이곳에 세워진 것이다. 기제사는 매년 9월 20일이다. 기효근과 기종헌, 두 분의 충신과 영의정을 지냈던 덕평부원군 기자헌을 모신 곳이 <도산사>이다. 1930년에 세워진 <도산사>는 도원마을 입구의 ‘도’와 도산사가 위치하고 있는 개당산의 ‘산’을 따서 붙인 이름이다. <도산사> 입구에는 <쌍전문(雙全門)>이라는 삼문(三門)이 있다. 쌍전문의 의미는 사당에 문관(文官)과 무관(武官)을 함께 모신다 해서 붙인 이름이다. 사우 위에는 광해 8년 예장치제 천장한 개백군의 산소와 그 후 매위한 행원군의 산소가 있다. 옆에는 신도비가 있으며 제실로 매년 2월 15일에 제사를 지내는 <다경재(多慶齋)>가 있다. 신도비는 오랜 세월에 글씨를 알아볼 수 없어 1971년에 옆에 새로 세웠다. <효열부장흥고씨기행비>는 마을 앞에 세워진 장흥고씨 비각이다. 장씨는 17세에 무안읍 상동에서 이 마을로 시집와서 24세에 부군의 가출로 홀로 되어, 80세를 일기로 죽을 때까지 부군의 생사를 모른 채 ‘송백 같은 지조’와 ‘빙옥같은 정절’로 집안을 일으켜 세운 인물이다. 1963년 이 지역 선비와 유림의 추천을 받아 전국포상위원회에서 효열포상을 받았다. 또한 지역 유림의 발의로 양자인 기노일이 1980년 이 비와 비각을 세웠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이 마을은 충절촌이다. 입향조의 선대(先代)인 개백군 기효근과 아들 행원군 기종헌 모두 나라로부터 군봉(君封)을 책봉받은 충신들이다. 개백군 기효근(1542~1597, 자-숙흠)은 기상이 늠름하고 서예에 능하였으며 성질이 호방하였다. 1579년 무과에 합격하여 선전관을 지냈다. 무관으로서는 드물게 암행어사가 되어 선치(善治)하였으며, 주민들의 진정으로 남해현령으로서는 드물게 한 지역에서 7년간이나 목민관으로 재임하였다. 1590년 남해현령으로 재임 중 임진왜란을 만나 수군대장 원균의 선봉장이 되어 사천, 옥포, 당항포 등의 해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임란선무십팔공신이 되었고, 아울러 병조판서 증직에 개백군(皆伯君)의 봉군과 부조위(不祧位)의 특전을 받았다. 또한 아들 기종헌(1576~1643, 자-경헌, 호-수허당)도 행원군(幸原君)을 책봉받았다.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때 아버지와 함께 왜적을 맞서 싸웠고, 파주목사 재임 시에는 병자호란을 맞아 오랑캐를 물리치고 인조를 남한산성까지 호위하기도 해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에 기록된 충신이다.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미기재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미기재
기타사항
미기재

출처

각주
미기재
참고문헌
1. 《마을유래지》(무안군, 1987) 2. 《마을역사자료조사》(무안문화원, 2017) 3. 《입향시조와 성씨자료》(무안문화원, 1996) 4. 《무안지망집》(무안문화원,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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