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안」마을은 「원성내」마을과 「이기촌」마을이 통합된 곳으로 성내6리에 해당한다. 「원성내」마을은 남촌마을 방향에서 오른쪽 갈림길로 가면 바다 끝에서 만나는 마을이다. 바닷가를 따라 왼쪽으로 가다보면 남촌마을이 나오며, 마을 입구의 <홍대중영세불망비> 옆으로 난 언덕을 넘으면 「이기촌마을」에 닿는다. 「이기촌」마을은 항장마을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남촌마을에 닿기 전에 만나는 마을이다. 도로의 오른쪽으로 마을전경이 펼쳐지며, 마을표지석 옆에는 팽나무가 자라고 있다. 마을 앞에 여러 필지의 농지가 있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모두 4번의 둑막이를 통해서 마련한 농지라고 한다. 남촌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모퉁이를 ‘도래장’(돌아간다 해서)이라 한다. 또한 ‘망매’라는 지명이 있는데 망한 마을이 있었던 의미를 지닌다고 한다. 이는 우스갯소리이고 그보다 마을 왼쪽에 있는 망매산(望梅山)에서 따온 명칭이 아닌가 한다. 마을 뒤쪽 원성내마을로 이어지는 도로는 오래전부터 나 있던 길을 나중에 넓히고 정비한 것이다.
지명유래
「원성내」마을은 고려시대 종4품 만호가 성을 쌓아 해안을 지키던 성터로 조선시대 수군만호가 성을 높이 쌓은 후 「성안」이라 불렀다가 「원성내(元城內)」로 개칭했다.(《마을유래지》, 1987) 마을 이름이 「원성내」인 것은 <다경포진성>의 안에 마을이 있기 때문이다. 이 진은 중국과의 교역과 한양으로 곡물 수송을 할 때 거쳐가는 영산강-목포진-다경포진-임치진을 잇는 관방유적으로서 서해 항로의 지킴이 역할을 했다. 현재는 무안군에 속해 있지만 이 성이 설치될 당시에는 영광군에 속해 있었으며 정확한 설치 연대는 알 수 없다.
「이기촌」마을은 마을이 위치하는 주변 형세가 사람의 귀와 같이 생겼다 하여 ‘귀미’라고 불렀다. 그러나 지금의 「이기촌」이라 한 시기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귀의 형태를 닮은 지형으로 생긴 지명은 분명하다고 한다. 「이기촌」마을의 한자표기가 각각 달라,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1912)에서는 ‘耳基村’ 《신구대조조선전도부군면리동칭일람》(1917)에는 ‘耳機村’으로 각각 표기되어 있다.
마을형성(입향조)
「원성내」마을의 입향조는 진주강씨(晉州姜氏)로 강주진(姜柱震, 자는 태숙(太叔) 호는 남강(南崗)이다)으로 인조년간(1678~1733)에 고창(高敞) 성송면(星松面) 암치(岩峙)에서 살기좋은 곳을 찾아 정착하였다 한다.(《입향시조와 성씨자료》, 1996) 또 주민 다수를 차지하는 밀양박씨(密陽朴氏)는 신임사화(辛壬士禍, 1721~1722)를 피해 박호월(朴湖月, 1678~1733)이 가족을 데리고 망운면 월악(月岳)으로 이주했다 다시 현재의 마을로 옮겨왔다 한다.(《무안향토문화자료 제4책-무안지망집-》, <호월박공묘표 망운면 성내리 밀양박씨 입향조(湖月朴公墓表 望雲面 城內里 密陽朴氏 入鄕祖)>, 1997)
「이기촌」마을은 한때 남촌마을에 속해있었다. 때문에 이기촌마을의 시작도 남촌과 같다고 하는데 자세한 유래는 알 수 없다. 「이기촌」마을이 「원성내」마을과 합병된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40~50여 년 전이라 한다.(제보: 성안마을 노인회장) 《마을역사자원조사》(2017)에 따르면, 이 마을 입향조는 광산김씨 김헌문(金憲文, 1555~1592, 자 공칙(公則), 호 지당(智堂))이다. 공은 임진왜란 때 김천일 장군과 함께 의병활동을 했으며 금산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얼마 전까지 마을에 광산김씨 종가가 보존되어 있었으나 70년대의 태풍으로 쓰러져 후손들이 철거해버렸다. 이어 창녕성씨(昌寧成氏)와 전주이씨가 들어왔다고 한다. 한편 《입향시조와 성씨자료》(1996)에는 창령성씨 성기인(成己仁, 1584~1645, 호-기은(箕隱). 진사를 지냈다)이 광산김씨와 혼인하여 나주에서 살다가 그의 후손인 성몽령(成夢龍, 자-일수(一秀))이 「이기촌(耳機村)」으로 들어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풍수지리(마을형국)
「성안」 마을을 이루고 있는 「이기촌」은 오른쪽에 계당산, 왼쪽에 망매산을 사이에 둔 조리형 지형인데, 이를 풍수지리적으로 보면 좌청룡 우백호의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 형국으로 두 산 사이의 포곡지(包谷地)에 자리 잡은 ‘혈처(穴處)’라고 하겠다. 이는 비바람을 막아주고(藏風), 앞으로는 탁 트인 들판과 물길을 바라볼 수 있어서 기운이 모이는 곳이다. 따라서 「성안」 마을의 조리형 형국은 풍수지리적으로 ‘이상적인 혈자리에 자리 잡아 보호받으며 생기가 모여서 안정된 마을’로 해석된다.
마을성씨
진주강씨, 밀양박씨, 광산김씨, 최씨 등 복합성씨 마을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호구총수》(1789)에 남촌마을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다경진성내(多慶鎭城內)」와 「다경진성외(多慶鎭城外)」가 있어 현재의 성내리 일대를 위의 지명으로 구분해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 이후 「성안」이라 부르다가 「원성내」로 바뀌어 오늘에 이른다.
행정구역 변경
운남면 성내리는 조선시대 《호구총수》(1789)에서 영광군 망운면에 속해 「다경진성내」 · 「다경진성외」로 불렀으나, 1910년 목포부(木浦府) 망운면(望雲面) 성내리(城內里)로 편성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다시 무안군에 편입되었다. 당시의 성내리 마을은 「성내리(城內里)」 · 「이기촌(耳機村)」 · 「남촌(南村)」 · 「항장리일부(項場里一部)」 · 「현화면 도원촌(玄化面 桃源村)」 · 「대박산동(大朴山洞)」 · 「학례동(學禮洞)」 7개 마을이었으며, 이중 「성내리(城內里)」가 지금의 「성안」(원성내)으로 보인다.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다시 무안군 망운면에 편입되었다. 그리고 1983년에 망운면에서 운남이 분면(分面)하면서 운남면 성내리 「성안」마을로 편재되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성안」마을은 농업을 주업으로 하는 전통 농촌마을이면서도, 무안국제공항을 비롯하여 목포 생활권과 연결된 복합적 성격을 지닌 곳이다. 주민들은 벼농사와 양파, 배추 등 황토작물 재배를 통해 생계를 이어가면서, 일부는 근교농업·상업·관광 관련 활동으로 생활을 다변화하고 있다. 따라서 성안마을은 농업공동체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도시와 연결되는 새로운 생활권으로 변모하는 마을이라고 할 수 있다.
주요시설
미기재
마을변화
「성안」마을은 최근 마을미관 개선, 벽화 꾸미기 사업, 공항 이전 계획에 따른 환경 변화 등으로 큰 변화를 겪고 있다. 마을의 미관을 개선하기 위하여 ‘청정전남으뜸마을만들기’ 사업의 일환으로 성내리 일대에서 벽화꾸미기 사업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광주군공항과 민간공항의 무안국제공항 통합 이전이 본격적 추진되면서 운남면 성내리 일대와 함께 직접적인 영향을 받고 있다. 성내리 일부 지역이 소음 영향권 및 군사시설 보호구역으로 지정될 가능성이 있어서 건축 제한·고도 제한 등 생활 제약이 예상된다. 물론 이에 따라 보상금 지급, 방음시설 설치, 마을회관 리모델링 등 생활 개선 지원이 병행될 예정으로 주민들의 생활환경이 크게 달라질 전망이다. 따라서 과거 농업 중심의 마을에서 오늘날에는 주민 참여형 공동체 사업과 개발 압력 속의 생활환경 변화가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부녀회(1980년 창립)
공동이용시설
「이기촌」마을회관, 마을누정이 있으며, 이 시설들은 「원성내」마을과 공용으로 사용하고 있다.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원성내」마을 입구에 있는 요즈음 보기 드문 당산목인 홰나무(팽나무, 괴목) 두 그루가 마을의 안위를 지켰다 하는데. 지금은 입구 왼쪽에 한 그루의 팽나무가 있으며, 당산제를 지낼 정도의 규모로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다경포진 성문터 오른쪽에 있는 두 그루 아름드리 당산나무가 있는데, 모두 족히 수 백년은 됨직하며, 이중 한 그루는 연리지를 이루고 있다. 이 나무들은 무안군에서 보호수로 지정하고 있다.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미기재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원성내」마을의 당산제는 당명이 안박당산, 신명은 영감, 할매이며, 정월 1일 새벽에 지냈다. 이때 즐겼던 민속놀이는 절궁과 줄다리기였다. 일제강점기 폐지되었다 한다.(목포대학교박물관, 《무안군의 문화유적》, 1986)
‘이기촌마을 팽나무’는 마을 입구에 있는 당산나무로 백중날(음력 칠월 보름) 당산제를 지냈다. 이때가 되면 주변의 마을주민 모두가 모였다고 하는데 지금은 제를 지내지 않는다. 농약살포 등 환경오염으로 나무의 줄기가 고사되었고 쇠파이프로 가지를 지탱해 겨우 형체를 보존하고 있다. 무안군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유물, 유적
<다경포진성(多慶浦鎭城)>: 원성내마을에는 1895년에 폐진된 수군만호성(水軍萬戶城)이었던 다경포진성지가 남아있다. 이곳의 최초 설치시기는 알 수 없다. 다경포진은 1432년 관찬기록(세종실록 권57, 1432년 8월 5일 신묘조)에 처음 등장한다. 당시 다경포진은 임치진에 소속된 만호진(萬戶鎭)이었다. 이후 《동국여지승람》(1481년) 영광군 관방조에 ‘다경포진은 군의 남쪽 150리에 있고, 목장이 있으며 수군만호 1명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의 석성은 1515년(중종 10년)에 쌓은 것으로, 《해동지도》(1821) 무안현의 <다경포진지도(多慶浦鎭地圖)>를 참고하면 평면형태는 대략 북동-남서의 타원형에 가깝고 성문은 동 ‧ 서 2개 문이 있었다. 《다경진지(多慶鎭誌)》(1871)에 따르면, 규모는 둘레 980척, 높이 12척의 돌로 쌓은 성으로 중선 4척 별선 4척 병사 479명이 배치되어 진성의 규모에 비해 많은 군사가 있었다. 건물로는 객사 · 동헌 · 내아 · 사령청 · 장교청과 군기고 등의 창고가 성안에 있었고, 전선(戰船)은 서문밖에 정박처가 있었으며, 고림산봉수(高林山烽燧)를 관할 봉수로 거느렸다. 1895년에 폐진(廢鎭)되어 현재의 다경포진성 모습에서 옛날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다. 이곳은 길이 320m의 작은 성으로 전체적인 지형은 해발 65m의 계당산 봉우리 북사면 말단부에 위치해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은 분지형이다. 특히 해안에 면한 북동벽은 높이 10m 정도의 낭떠러지로 부분부분 돌로 쌓은 흔적은 있으나 대체로 자연 방어벽을 형성하고 있으며, 성벽의 축조형식은 밖은 돌, 안은 흙으로 채웠다. 또한 동쪽 성벽의 50여m를 제외한 다른 성벽은 윤곽선만 확인되고 있다.
주민들의 기억으로는 1950년대까지도 성(城)의 풍모가 남아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점차 주변에서 간척사업이 이뤄지고 집들이 들어서면서 성벽의 돌들이 사라졌다. 특히 「이기촌」 마을에 돌쟁이(石手)가 들어오면서 커다란 돌들이 전부 잘려져 팔리거나 간척지를 메웠다고 한다. 현재는 높이 2m, 길이 100여m의 성곽 잔재만 남아있다. 성지에서는 배를 만들고 나서 바다로 내보내기 위한 미끄럼목으로 추정되는 나무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나란히 배열되어 있었으며, 주변에는 수많은 생활자기 파편과 군소 말목들이 흩어져 있었다. 접안시설로 추정되는 말목들은 장보고 장군의 진성이었던 완도 청해진의 말목보다도 더 굵고 큰 말목이라 하며, 고대 다경포진성이 서해안 지역에서 중요한 기능을 했던 곳으로 학계에서 추정하고 있다. 또한 다경포는 면암 최익현이 흑산도로 유배 갈 때와 우이도의 어상 문순득이 오키나와와 필리핀, 그리고 중국을 전전하는 3년의 표류생활을 경험하고 귀국하여 우이도로 귀환할 때, 다경포에서 배를 타고 갔다고 한다. 이로 보아, 다경포는 서남해 도서지역으로 통하는 주요 포구였음을 알 수 있다.
‘홍대중영세불망비’: 마을입구 이기촌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군수홍후대중영세불망비(郡守洪候大重永世不忘碑)>라 새긴 비가 서 있다. 홍대중은 1878년~1881년 사이에 영광군수를 지낸 인물로 조선시대 「성안」마을이 영광군에 속했음을 전해주는 역사자료이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미기재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미기재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미기재
기타사항
「원성내」마을에는 다경포진의 성터 외에도 바닷가를 따라 예전에 축조한 석축이 여전히 남아있고, 밭두렁에는 청자 · 백자 · 옹기 등 각종 자기류편과 기와류편이 쉽게 눈에 띈다. 마을의 민가에는 성터에서 수습한 듯한 돌들로 집 벽이나 담장을 쌓아 이곳 유적지의 특성이 고스란히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