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장」마을은 대박산 혜운사 앞으로 놓인 도로 맞은편의 오른쪽에 있다. 마을 앞의 간척지를 사이로 「원성내」마을이 보인다. 표지석을 따라 들어가면 오른쪽에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폐축사와 경작지가 나타난다. 마을길을 중심으로 한 방향으로 마을이 일렬을 이루며, 다른 방향은 경작지를 이룬다. 원래 「원성내」마을과 한 마을이었으나 주민들이 늘어나면서 분리(分里)되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마을길을 따라서 일본인이 지어 놓은 농장의 노무자들을 위한 숙소가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현재의 마을 구조도 그때 지은 노무자 숙소가 놓였던 형태로 형성된 것이다. 마을 옆으로 바닷가 근접한 곳에 넓은 간척지(성내염전)가 있었는데, 최근 몇 년 사이 <태양광에너지발전소>가 대단위로 조성되어 있다.
지명유래
간척으로 농장이 들어서면서 마을이 생긴 이 마을은 처음에 「언안(원안)」 또는 「새언안(새원안)」으로 불렸다. 이후 일본인이 농장을 관리하면서 「마츠나가(송영(松永))농장」으로 불리다가, 다시 「농장」마을로 마을 이름이 바뀌었다. 한편 주변에서는 이 마을을 ‘이민촌’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주민 대부분이 농장일을 하기 위해서 모여든 사람들로 일을 마치면 정착하지 않고 떠나버려서 붙은 별칭이다.
마을형성(입향조)
「농장」마을이 형성된 것은 1909년경이다. 당시 이곳은 주변 사람들에 의해 수통산과 우항(牛項) 끝을 잇는 간척사업이 시도되고 있어서 전국에서 일꾼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이곳에 들어와 처음으로 자리잡은 사람은 제주양씨 양내서(梁乃瑞)의 부인인 장신례였다. 장신례는 장성에서 의병활동을 하던 양내서가 죽자, 일제의 시달림을 피해 아들 양삼재(梁三才)를 데리고 이곳으로 피신해 정착했다고 한다. 장신례는 처음에 무안읍 성내리로 왔다가 지리적으로 깊숙한 운남면 성내리(803번지)에 정착하고, 간척지에서 일하는 일꾼들을 상대로 주막을 열어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미기재
마을성씨
마을성씨는 압해정씨, 진주강씨 외에 여러 복합성씨로 구성되어 있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농장」마을은 마을 앞에 제방을 쌓고 「언안(원안)」으로 부르다가 다시 「새원안」으로 고쳐 불렀다. 그런데 제방을 쌓아 농경지가 늘어나면서 이주민이 모였고, 마을이름도 「송영농장」이 되었다가 이후 「농장(農場)」으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
행정구역 변경
마을형성이 늦고 원래 「원성내」마을에 속했던 「농장」마을은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1912)이나 《신구대조조선전도부군면리동칭일람》(1917)에는 나오지 않으며, 1987년 《마을유래지》에서야 비로소 등장하는 무안군 망운면 성내7리에 속한 마을이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농장」마을주민들은 간척사업 이후 확보된 넓은 농지를 기반으로 농업에 종사하며, 주요작물은 벼농사이지만 황토토양을 활용하여 양파, 배추, 마늘, 고구마 같은 특산 작물도 재배하고 있다. 최근 무안국제공항이 열리면서 도로망이 좋아져 일부 주민들은 농산물 직거래, 소규모 가공판매를 하기도 한다.
주요시설
태양광에너지발전소
마을변화
마을 앞 갯벌의 간척은 처음 조선인이 막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지막 단계에서 자꾸 터져서 완성하지 못하고 일본인 마츠나가우타로우(松永卯太郞)에게 넘겼다. 일본인이 인수하여 관리하면서 마을 이름도 「송영농장」이 되었다. 송영은 일제강점기 때 우리나라 전역에 걸쳐 농장을 많이 가지고 있었으며 목포에는 커다란 정미소를 갖고 있기도 했다. 주로 농업을 주업으로 삼던 농장마을은 전통적인 농촌공동체 마을이었으나, 최근 무안국제공항의 개항과 함께 도시생활이 맞물리면서 농촌과 도시가 혼재된 복합생활권 마을로 변화하고 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10여 년 전만 해도 마을에는 지금보다 주민이 많았다. 그 사이 노인들은 세상을 떠났고, 새로운 인구 유입은 없다 보니 지금은 이렇다 할 마을조직도 없다. 마을회관의 예전의 활기찬 주민사진들만이 그때를 추억하고 있다.
공동이용시설
마을주민회관, 마을누정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농장」마을은 왼쪽으로 대박산, 오른쪽으로 간척지 둑을 두고 그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그리하여 산과 들, 강과 갯벌, 그리고 이를 넘나드는 다양한 생물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는 복합생태환경을 구성하고 있다.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농장」마을의 옛 지명으로는 ‘뒷동산’은 마을 뒤에 있는 작은 등성이다. ‘앞산’은 마을 앞에 있는 야트막한 야산이다. ‘수문통’은 농장마을 북쪽으로 난 좁고 긴 바닷길 입구로 지금은 둑으로 막아놓았다. 이외에도 ‘중바위’, ‘우항 끝’, ‘젖당산’, ‘수통산’ 등의 지명이 있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미기재
설화
이곳을 간척할 때 간척회사 대표였던 일본인 마츠나가우타로우(松永卯太郞)는 짐을 실어 나를 수 있는 철로를 설치하고 바위들을 실어다가 부었다. 하지만 자꾸 둑이 터지자 고민에 잠겼다. 그런데 마침 지나가는 사람이 이러한 마츠나가의 고민을 듣고 사람을 제물로 바치면 둑을 완성시킬 수 있다는 말을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송영은 제물로 삼을 사람을 수소문하였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그때 마을 앞으로 중이 지나가고 있었는데, 중 옆에는 시동인 듯한 어린아이가 있었다. 마츠나가는 중을 불러 돈은 달라는 대로 줄테니 “시동을 나에게 팔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중은 얼마를 주면 넘기겠다고 했다. 당시 중이 부른 금액은 거액이었으나 마츠나가는 둑을 막는 일이 시급해 원하는 대로 주었다. 중은 그 돈을 받고 데리고 다니던 시동을 내주고 황급히 자리를 떴다. 그러고 나서 마을 뒤 바위에 앉아 돈을 세다가 벼락 맞아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고 한다. 주민들은 중이 앉아서 돈을 세었던 바위를 ‘중바위’라 불렀다. 한편 마츠나가는 시동을 제물 삼아 둑을 완성하였다고 한다.
무안군에는 간척지가 많다. 일로의 자방포, 삼향의 중등포, 해제의 내분 제방 등이다. 또한 간척을 위한 둑 쌓기가 얼마나 어려운 공사였는지 알 수 있는 인신공양 전설이 곳곳에서 채록된다. 이 마을의 인신공양 전설도 마을 뒤에 있었던 중바위와 함께 오랫동안 주민들 사이에 오르내린 전설이다.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미기재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6.25 한국전쟁 당시 운남 · 망운지역은 운남과 운북으로 갈리어 동족상잔의 비극이 극심했었다. 이 마을에서도 6.25 한국전쟁 때 피해를 봤다. 마을에 경찰가족이 있었는데, 그 가족 6명 중 4명이 희생당한 것이다.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미기재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예전의 염전자리에는 대규모 태양광발전소가 단지를 조성하고 있다.
주민요구사항
예전에는 마을에 물 사정이 좋지 않아 길게 늘어선 마을 중 일부 지역의 주민들은 도시처럼 생수를 사 먹어야 했다. 개발된 지하수의 물이 오염되었기 때문인데, 지금은 잘 해결되어 주민들은 물 걱정 없이 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