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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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덕산1리 해제면 슬산 작성
  • 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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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59세대, 총 92명(남44, 여48), 2024.5. 기준
자연마을 구성
해제반도의 위쪽으로 「슬산」, 「내분」, 「사야」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진 덕산리는 해제면소재지에서 북쪽으로 1.5km 지점에 위치한 봉대산(197.1m) 기슭에서 칠산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며 쥐머리산(鼠頭山, 69m)을 주산으로 하고 있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슬산리, 덕림리, 내분리, 매곡동 일부를 병합하여 「덕림」과 「슬산」의 이름을 따서 덕산리라 했으며, 덕산1리에 속하는 슬산마을은 덕림과 슬산을 포함하는 자연마을로 봉대산의 맥을 이은 옥녀봉을 주산으로 하고 있다.
지명유래
슬산마을」의 지명은 주산으로 하는 옥녀봉에서 비롯된다. 옥녀봉의 오른쪽에는 서당골」이 있는 안개산이 있으며, 마을 앞에는 참등이라고도 부르는 거문고산이 있다. 거문고산 옆에는 총각산이라고도 부르는 「가장골」이 있으며, 또한 옆에는 옥녀가 화장을 했던 분산등이라는 곳이 있다. 그리하여 마을 이름을 옥녀가 거문고를 탄다는 큰 거문고 슬(瑟)자와 뫼 산(山)자를 따서 「슬산」이라고 했다. 참고로 옛 《무안군지》에 해제의 가장 높은 산인 봉대산을 또한 「슬산」이라고 기록한 내용이 있다.
마을형성(입향조)
마을의 처음 입향조는 임씨로 알려졌으나 흔적이나 후손들이 없어 확인할 수 없었다. 주민들의 이야기와 문헌을 살펴보면 입향조는 함평이씨 지평공파 이검손<(李儉遜, 1489-1566, 자-사공(士恭)>이다. 원래 경기도 수원에서 세거하다가 선조들이 함평으로 옮겼고, 공에 이르러 이곳 해제 「슬산」으로 이거했다. 공은 기상이 뛰어나고 학업을 일찍 이루어 문명을 주변에 떨쳤으나, 찰방 벼슬을 끝으로 시절이 아님을 깨닫고 자연에 묻혀 생활하며 후손들을 가르치며 살았다고 한다.
풍수지리(마을형국)
슬산마을은 봉대산의 맥을 이은 옥녀봉을 주산으로 여러 산봉우리 가운데 분지처럼 와우형(臥牛形)의 형태로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지리적인 형국과 풍수적인 해석으로 이 마을이 해제면의 8명당 중 하나인 옥녀탄금(玉女彈琴)의 명당이라고 불렸다. 실제로 지형을 자세히 살펴보면 봉대산에서 발원한 시냇물이 마을 앞을 흐르고 있어서 마치 거문고 줄에 해당하는 모습으로 보인다.
마을성씨
복합성씨 마을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지명의 변화를 문헌으로 살펴보면 1789년의 《호구총수》에서 함평현 해제면 「슬산리」로 나온 이후에 1912년의 자료에서 무안군 해제면 「슬산동」으로 표기되었다. 1917년의 자료에는 해제면 덕산리 ‘슬산동’으로 나왔다가 1987년의 자료에서 현재의 지명인 「슬산」으로 표기되었다. 하지만 주민들은 「안돔」, 「밖돔」, 「쇳돔」 등으로 부르기도 하며, 마을이 이루어질 당시에는 길산동(吉山洞)이라고도 했다고 하며, 실제로 길산동이라고 각이 된 표지석이 조각난 채 버려져 있을 뿐이었다고 했지만 확인할 수는 없었다.
행정구역 변경
원래 이 지역은 함평현으로 1789년의 《호구총수》에 함평현 해제면 내분매와 슬산리로 나온다. 하지만 1912년의 자료에 무안군 해제면 내분매동, 덕림리, 슬산동으로 표기되어 무안군으로 변경되었다. 이후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슬산리, 덕림리, 내분리, 매곡동 일부를 병합하여 덕림과 슬산의 이름을 따서 덕산리가 되었다. 1917년의 자료에서 해제면 덕산리 슬산동, 내분매, 매곡동 일부가 포함되었다. 1987년의 자료에서 현재와 같이 슬산, 내분, 사야 등으로 나와서 현재에 이른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칠산바다와 함평만으로 이어지는 중간 지점의 해안과 뒤로는 봉대산 자락에서 비롯된 구릉지대에 있는 비교적 안온한 어촌마을이다. 더구나 칠산 바다와 함평만으로 이어지는 중간 지점에 있는 해안을 갖고 있는 이 마을을 중심으로 닭머리(대사동), 솔머리(소머리. 닭머리에서 슬산으로 가는 기슭), 오리머리(슬산), 쥐머리(내분) 등의 이름을 갖는 지명이 있다. 해안에는 전막금이라 부르는 곳이 있는데 그곳은 젓갈을 저장하거나 칠산바다에서 잡은 각종 수산물을 사고 팔기도 하던 곳이다. 전막금에서 오리머리로 가는 곳에 싯돌나무 코뺑이라 부르는 곳이 있다. 그곳에서 나는 바위가 반질반질하나 싯돌 같은 모습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튀어나온 형국이 코뺑이처럼 보여서 부르는 지명이다. 또 그 옆에는 주민들이 귀미(구미. 만)라 부르는 곳이 있다. 그 앞에는 뻘밭이어서 주민들이 각종 어패류와 해조류를 잡을 수 있어 주민들에게 주요한 소득원이 되기도 한다.
주요시설
마을 뒤쪽 바닷가 사구를 이용하여 만든 슬산마을공원이 있다.
마을변화
해제면 소재지에서 북쪽으로 1.5㎞ 지점에 위치한 덕산리는 쥐머리산(鼠頭山)을 주산으로 자리하고 있다. 슬산, 내분, 사야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진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노인회와 부녀회가 운영되고 있다.
공동이용시설
예전에는 마을 앞 공터에는 커다란 당산나무와 정짓등이라는 공동 우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둘 다 없어지고 이후에 심은 느티나무가 자라고 있다. 공동샘이 있을 때 마을 어른들은 아녀자들이 오후에는 빨래를 못하게 했다. 뿐만 아니라 마을이 옥녀형국의 지형이어서 방망이질도 못하게 했다. 지금도 음력 2월 1일에는 당산제를 지내 마을의 평안과 한 해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고 있다. 농악기구도 일체가 준비 되어 있다.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칠산 바다와 함평만으로 이어지는 중간 지점에 있는 해안을 갖고 있는 이 마을을 중심으로 닭머리(대사동), 솔머리(소머리. 닭머리에서 슬산으로 가는 기슭), 오리머리(슬산), 쥐머리(내분) 등의 이름을 갖는 지명이 있다. 해안에는 전막금이라 부르는 곳이 있는데 그곳은 젓갈을 저장하거나 칠산바다에서 잡은 각종 수산물을 사고 팔기도 하던 곳이다. 전막금에서 오리머리로 가는 곳에 싯돌나무 코뺑이라 부르는 곳이 있다. 그곳에서 나는 바위가 반질반질하나 싯돌 같은 모습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튀어나온 형국이 코뺑이처럼 보여서 부르는 지명이다. 또 그 옆에는 주민들이 귀미(구미. 만)라 부르는 곳이 있다. 그 앞에는 갯뻘밭이어서 주민들이 각종 어패류와 해조류를 잡을 수 있어 주민들에게 주요한 소득원이 되기도 한다. 또한 마을 앞에는 옥녀와 관계되는 공동샘이 있었으나 지금은 주차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시멘트로 바닥 정리를 해 샘은 메워지고 없다. 마을이 이루어질 당시에는 ‘길산동(吉山洞)’이라 했다고 하나 확인할 수 없다. 단지 길산동이라고 각이 된 표지석이 조각 난 채 버려져 있었던 것을 노만중 선생이 집안들에 세워 놓고 있다.
동/식물
갯뻘은 약 1㎞ 가량 펼쳐지는데 물이 빠지면 완전 뻘밭이 된다. 이곳은 황새와 저어새, 노랑부리 백로와 검은머리물떼새 도요새류 등 각종 철새들이 찾아오는 중간 기착지로 청정 지역이다. 또한 이 해안의 지형적인 이유와 조류의 영향으로 중국은 물론 북한의 쓰레기도 밀려들어 쓰레기 치우기에 주민들이 애를 쓴다고 한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가장골 너머에 기밋들,이라는 지명이, 그리고 살개, 진걸시 등의 지명이 남아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매년 2월 초하루에 당산제를 지낸다.
유물, 유적
마을에는 함평이씨효열비<(효자 이유진(李儒鎭), 이유택, 열부 함평노씨, 1967년에 세움)>와 김재덕여사 효열비가 있고 입향조인 이검손을 모시는 영모재가 있다. 또한 1965년에 세운 것으로 함평 노씨 노 동의 재실인 동일재(東一齋)가 있다. 나주정씨효열비와 나주정씨절효비가 있다. 함평이씨 종가(종손 이사범)에 교지 등 많은 유물이 있다.
설화
예전에 붉은 황토산이었던 마을 앞 가장골에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마을에 원인모를 불이 자주 났다. 원인을 몰라 애를 태우던 주민들은 마침 지나가는 중을 붙잡고 물어보니 스님은 주변을 돌아보고 ‘가장골에 숲이 없어서 화기가 들어와 불이 난다’고 했다. 해서 주민들은 가장골에 숲을 가꾸고 나무를 베어내지 못하게 했다. 그 이후로는 불이나지 않았다고 한다. 전막금 앞에는 ‘개바위’라는 바위가 있다. 좁은 면적의 바위산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바위에는 몇 그루의 소나무가 자라고 있다. 개바위에는 중을 깨우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이 바위에서 바라보면 대사리 쪽으로 머리를 돌린 듯한 ‘중머리’라는 지명이 있는데, 슬산 마을과 대사리 신사마을 사이에 놓여있다. 후에 이 마을 주민들은 마을의 규모나 역사에서 신사마을보다 더 크고 나은 마을인데도 인물이 적게 난 것은, 중머리의 ‘중의 시선’이 대사리로 향했기 때문이라고 여기고 있다.
기록물, 문헌
마을 입구에 쪽박배미라고도 부르는 솔대라는 곳에 이홍복 선생의 비석이 서 있다. 이는 함평이씨 이홍복(李弘福, 1590-1666. 자-자유. 임란 4등공신)이 과거시험에 합격한 내용 등을 기록하고 있다. 공은 임진왜란의 공신으로 쥐머리산 일대를 사패지로 하사받기도 하였다. 공의 후손인 이사범 전 노인회장 댁에는 많은 교지와 호구단자 그리고 1718년에 함평이씨 문중이 씨족계를 조직하고 1740년에 작성한 계안 등이 잘 보존되고 있다.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이 마을에는 우리 지역의 유명한 학자인 경당(警堂) 노일상(魯一相, 1842~1912) 선생을 기리는 비각이 있다. 1923년에 세워진 비각으로 안에는 공을 기리는 비가 서 있다. 공은 어려서부터 학문이 뛰어나 11세 때에 해(日) 는 제목으로 운외토진광문명일천지(雲外土眞光文明一天地) “구름 밖으로 참 빛을 토해내니 문명이 천지에 가득하다.”라는 시를 지어 주위뿐 아니라 스승을 놀라게 하였다고 한다. 이후 주위의 뛰어난 문사들과 교류하여 학문을 높이니 글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고 한다. 공이 지은 ‘채기신편’과 ‘송록정요’ 그리고 ‘마양록’ 등은 많은 학자들이 즐겨 찾는 저서이다. 1971년에 향론에 따라 신사마을에 있는 학산사에 배향하고 지역의 유림이 제사를 받들고 있다. 비각 옆으로 궁개라는 지명이 있는데 예전에 함평이씨 사당과 아름드리의 동백나무가 있었으나 지금은 둘 다 없다. 또한 해안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입구에 깨어진 표지석이 뒹굴고 있었다. 그 돌에는 동(洞)이라 쓰여 있어 주민들의 이야기로는 예전의 마을이름인 길산동(吉山洞)을 나타내는 이정표였다고 한다. 1918년에 제작된 것으로 여겨지는 이 돌의 나머지 윗부분이 노만중선생 마당에 있다.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북한의 김일성 주석 사진이 떠내려 온 적도 있어 당시초등학교 학생이 발견해 경찰서에 신고한 적도 있다고 한다.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이 마을에는 농악이 성했으며 지금도 웃어른을 모시고 예절을 지켜가는 몇 안 되는 마을이다. 마을 중간에 있는 함평노씨 고가에 ‘성이통(誠而通)-정성을 다하면 이루어진다’라는 가훈석이 마당에 있었다. 8칸 집 고가로 100여 년 전에 지은 집인데 각종 유물들이 보관되어 있으며 드물게 보이는 토기와와 창살무늬가 특이하다. 2023년에 무안군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미기재
기타사항
현재마을 주민 박경배씨는 서울에서 공직을 정년퇴임하고 이곳 슬산마을의 경치와 마을 인심 등 모든 것이 너무 좋아 말년을 보내고자 이사를 와서 지금 10여년을 살고 있으며 매우 만족해하고 있다.

출처

각주
미기재
참고문헌
미기재

본문

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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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26.10.19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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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26.03.25 16: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