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풍5리에 속하는 심양마을은 길 건너 아랫마을인 염전마을을 포함하고 있으며 1994년 신만 마을과 행정 구역이 분리되었다. 이 마을은 니성산의 맥을 이은 한복산을 뒤로 하고 해제면의 주산인 봉대산을 마주하고 있다. 간척지에 조성된 염전마을은 마을 앞 갯벌이 1967년 간척이 되고 나서 형성되었다. 현재는 9세대가 살고 있으나 대부분 외지인이다.
지명유래
심양(潯陽)은 두 가지 지명유래가 있다. 하나는 중국 상인(筆商)과 관련이 있다. 오래전 이 마을에 붓이나 벼루, 종이 등 공부하는데 필요한 물품을 팔러 다니는 중국 상인이 들어왔었다. 그 상인은 이 마을의 지형을 보고 마치 중국 심양(瀋陽)의 축소판처럼 생겼다하여 ‘물가에 있는 따뜻한 지역’이란 뜻인 심양으로 이름 짓기를 권해서 현재의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두 번째는 마을의 주산인 한복산에서 흐르는 물소리가 맑고 햇빛이 잘 드는 지역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란 것이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에 처음 들어와 살았던 성씨는 신만 마을의 입향조인 김해김씨였으나, 200여 년 전에 인동장씨가 들어오면서 현재는 김해김씨가 없고 인동 장씨들의 동족 마을이 되었다. 인동장씨의 입향조는 장경추(1760~1810, 자-설칠, 호-일당)로 함평 양림에서 세거하다, 1700년대 후반에 살기 좋은 곳을 찾아 이 마을에 들어왔다. 함평에서 무안으로 들어올 때 3형제가 들어왔는데 이곳 심양을 포함하여 각각 용학리 도성과 오류리 오류마을에 들어가서 자리를 잡았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미기재
마을성씨
장씨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마을유래지》에 의하면 ‘옆 마을인 신만이 처음 이루어질 때는 마을 북쪽에 있는 ‘심양’과 함께 형성되어 ‘시만동’이라 부르다가 이후 자연 마을인 심양, 비성굴, 염전마을을 합하여 행정구역 이름을 ‘신만’이라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행정구역 변경
1789년 《호구총수》에는 마을이름이 나오지 않으나 1917년 자료에는 나온다. 하지만 그 이후의 자료에는 이 마을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만풍5리에 속하는 심양마을은 길 건너 아랫마을인 염전마을을 포함하고 있으며 1994년 신만마을과 행정구역이 분리되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이 마을은 무안에서 유일하게 매월 반상회가 개최되고 있는 마을이었으나 지금은 주민들이 모두 노령화되어 안하고 있다. 1976년 정부에 의해서 정례 반상회의 날(매월 25일)이 정해지면서부터 한 번도 빠뜨린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 이유인지 몰라도 주민들이 단합이 잘 되어 마을의 대소사는 물론 좋은 일이나 궂은일도 모두 회의를 통해서 논의되고 해결점을 찾는다고 한다. 염전마을은 9세대가 살고 있으나 대부분 외지인이다. 예전엔 화염(火鹽)도 생산했으나 현재는 천일염만 생산하고 있다.
주요시설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는 만풍염전이 있다.
마을변화
이 마을은 지명처럼 원래는 따뜻한 마을이었으나 해제면소재지의 낮은 지역 매립을 위해 마을 주변의 바람막이를 해주었던 토산(土山)을 깎아버린 후부터는 바람이 많고 예전의 아늑한 분위기가 없어졌다고 한다. 주민들은 이때부터 마을의 성세가 어려움을 겪었다고도 한다. 니성산은 정상의 일부분에 성을 쌓았던 흔적이 남아있다. 또한 일제강점기 금광 개발을 위한 동굴이 여러 개 있으며 그 속에 황금박쥐가 서식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해제 동초등학교 쪽으로 나 있는 니성산의 앞 굴은 몇 년 전 행정기관에서 콘크리트로 막아버려 통행이 금지되었다. 그리고 그 주변에 탐진댐 물을 끌어와 식수로 쓰기위해 정수장을 설치했는데 주민들은 굴의 입구를 다시 원상복구하기를 바라고 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노인회, 부녀회, 어촌계
공동이용시설
미기재
전통식품/특산품
천일염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이 마을은 니성산의 맥을 이은 한복산을 뒤로 하고 해제면의 주산인 봉대산을 마주하고 있다. 간척지에 조성된 염전마을은 마을 앞 갯벌이 1967년 간척이 되고 나서 형성되었다.
동/식물
니성산 동굴에 황금박쥐가 서식하고 있다. 마을 입구에는 김해김씨 김봉순이 심었다고 전해지는 당산나무가 있는데, 둘레가 5ⅿ 넘는 나무로 인근에서는 보기 드물게 수형(樹形)이 잘 잡혀 있다. 당산나무 아래에는 주민들이 각기 힘자랑을 했던 ‘들독’이 오래전부터 놓여 있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남아 있는 지명으로 매산등(매장등, 송장등), 개금질, 한아자(한아치), 망골, 장승백이, 젖샘이, 서랑쟁이(합쟁이) 등이 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마을 당산나무에서 매년 정월 보름에 마을의 평안과 무사고를 기원하는 당산제를 지내는데 다른 마을처럼 마을기금으로 지내는 것이 아니라 마을의 네 가구가 유사가 되어 순번제로 돌아가며 지낸다고 한다.
유물, 유적
이 마을에는 곳곳에서 유물이 나온다. 2003년도 《목포대박물관》 조사에서도 현재 밭으로 경작되고 있는 곳에서 적갈색연질토기편, 회백색연질토기편, 회청색연질토기편 등이 나왔다고 했으나 주민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주전자를 포함한 각종 자기들이 많이 나왔다고 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시꾼이라 부르는 도굴꾼들이 빈번히 마을에 드나들면서 도굴을 해갔다고 한다. 특히 마을의 오른편에 있는 서당 터 주변의 묘지나 집터에서 생활 자기들을 발견했고, 큰 돌들이 마치 계단처럼 쌓여진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에서도 7~8개의 자기들을 건져냈다고 한다. 지금은 밭으로 변했지만 서당 터 주변에는 상당히 많은 고총(古冢)들이 있었는데 여기서 조금 더 올라간 지점의 기슭에서는 발을 구르면 텅텅 울리는 소리가 난다고 한다. 주민들은 이곳에서 가져온 돌로 빨래판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서당 터가 개발되기 전에는 아름드리의 소나무가 많이 있었다. 1988년에 세운 장광표기적비와 그 옆에 인동장씨세덕비가 있다.
설화
마을 당산나무는 호랑이의 피해를 막아주었다는 전설이 있어 주민들의 사랑을 더 받고 있다. 이 나무에 공덕을 지성으로 드린 한 가정은 아들을 얻기도 했다.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고시합격자를 비롯하여 한 때는 30여명이 넘는 주민들이 공공기관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이 마을에서는 구체적으로 이름과 행적을 알 수 있는 동학농민혁명군이 있었다. 장필서(1869~1953, 본명-서택, 자-필서, 호-청헌)라는 분으로 동학농민혁명 때 농민군으로 참여해 구사일생으로 관헌의 추적을 피해 살아남았으며 당시에 사용했던 총을 집에 보관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의병으로 참여했던 분도 있다. 장인택(1879~1959, 자-학선, 호-죽사)으로 면암 최익현선생의 문하생이었으며 독립의군부 참모국 참모관을 역임하기도 했다. 현재(2023.12.28.) 리비아 대사로 나가 있는 장재학씨를 비롯하여 경찰 총경으로 퇴직한 장계사, 장형관씨도 기억할 만한 이 마을 출신자 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