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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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정2리 해제면 신흥 작성
  • 신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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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브 정보

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30세대, 총50명(남26, 여24) / 2024.5.기준.
자연마을 구성
이 마을은 봉대산을 주산으로 신흥, 웃골, 신흥동(新興東) 등 세 개 마을로 이루어졌다. 처음 들어온 사람은 나씨였다고 말한다. 나씨들은 마을 뒤 광쥐골과 신흥마을의 동쪽에 있다고 해서 신흥동이라 부르는 곳에 자리를 잡았는데 지금은 한 가구도 살고 있지 않다. 하지만 그들이 살았던 곳에서 기왓장과 생활용기들이 발견되어 나씨들이 부자촌을 형성하며 광범위한 세력을 이루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지명유래
이 마을의 「신흥(新興)」이라는 지명에 대하여 《마을 유래지》에 의하면 입향조(羅氏?)가 처음 짓기를 「신흥동(新興洞)」이라 하였다는 설과 나씨 다음에 들어온 밀약박씨가 새로이 조성한 마을이라 하여 새로울 ‘신(新)’자에 일어날 ‘흥(興)’자를 따서 「신흥(新興)」이라 불렀다는 설이 전해오고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듯이 「신흥」이라는 지명은 새로 부흥할 것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의 최초 입향성씨는 나씨(羅氏)였다고 전하고 있으나 확실한 전거(典據)는 없다. 그후 1630년경 전남 장흥에서 세거하던 밀양박씨(朴鳳文)가 과거에 급제하기 위하여 사방으로 공부하러 다니다 자연환경이 좋은 이곳에 터를 잡고 정착하였다고 전해오고 있다.’라고 무안의 《마을 유래지》에서는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이와 관련하여 박봉문(朴鳳文, 자-행중, 호-송암, 1680~1722)과 그의 문중 기록인 《밀양박씨규정공파 족보》와 해제면 관련 자료를 보면 ‘계해년의 화로 남하해서 장흥에 살고 있었는데, 일족인 박봉문이 과거시험 준비를 하면서 각지로 공부하러 다니다 1700년을 전후해서 자연환경이 좋은 이곳에 터를 잡고 정착하였다’라고 거의 유사하게 기록하고 있다. 공은 문장력이 뛰어났으며 행실이 방정했는데, 이후 공의 아들이 분가해서 정착한 곳이 임수리 「임치」마을이라고 한다.
풍수지리(마을형국)
이 마을은 쥐(서-鼠)하고 관련이 깊은 마을이다.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마을을 쥐 형국이라고도 하는데 주변의 지명을 보면 쥐가 들어간 이름이 많다. 마을의 주산인 ‘만서(鼠)당’이라 부르는 지명이 있으며 쥐가 많이 살았다는 광쥐골이 있고 또 만서당 뒤에는 꿩방이라 부르는 지명이 있다. 광쥐골은 광에 쥐가 있는 형국의 골짜기이고 꿩방은 꿩이 많이 살았다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옆 마을인 덕산리에도 서두산(鼠頭山/쥐머 리산)이 있다.
마을성씨
혼합성씨 마을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신흥」이라는 지명처럼 역사적으로 근래에 생긴 이마을의 지명은 함평현 해제면에 속했던 1789년의 《호구총수》에서 나오지 않다가, 1912년 자료에서 해제면 신흥리로 처음 나온다. 이후 1917년의 자료에서 해제면 신천리(新川里) 「신흥」으로 나오다가 1987년 이후 해제면 신정리 「신흥」마을로 나온다.
행정구역 변경
이 지역은 백제시대 도제현에서 시작해 고려시대 해제현, 조선 태조 9년(1390년) 함평현에 병합되었다가, 고종 3년(1866년)에 함평군에서 무안군으로 편입되었다. 이후 1914년 행정구역 폐합으로 해제면으로 재편되어 오늘날 신정2리 「신흥」마을로 이어지고 있다. 이를 문헌으로 살펴보면, 1789년의 《호구총수》에 함평현 해제면 고읍내리, 중촌리, 가여백리, 정촌리로 나온다. 이어 1912년의 자료에는 신흥리, 고읍내리로 나오며 1917년의 자료에는 무안군 해제면 신천리, 응양동, 신흥리, 고읍내, 정동으로 나온다. 여기에서 신흥리와 정동의 이름 첫 자를 따서 신정리(新井里)라 부르게 되었으며, 이어 1987년의 자료에서 해제면 신정리에 속한 응양, 신흥, 고읍으로 나온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이 마을은 자랑거리가 많다. 봉대산하 고읍, 신흥, 응양의 삼촌(三村) 마을 중 가장 중심된 마을로 저부장 터를 이루고 있다. 저부장이란 좌청룡 우백호의 형상이 두 번 거듭 나타나는 곳을 말한다. 두 번째는 장수마을이다. 주민들이 얼마 살지 않은 작은 마을이지만 90살 이상 고령자 네 분을 포함하여 80세 이상자가 13명이나 된다. 이는 봉대산 물이 좋아 모두가 건강하다고 한다. 실제로 노인들 중 병원에 다니시는 분은 한두 분에 그친다고 한다. 세 번째는 인물을 많이 배출했다. 부자 2대에 걸친 면장을 포함하여 면장만 5명이 배출되었다. 하지만 예부터 ‘물 좋은 곳에는 부자가 없다’라는 말이 있듯이 부자는 없다고 한다. 네 번째는 마을주민들이 빚이 없다. 그렇다고 부자마을이란 것이 아니라 그만큼 욕심내지 않고 자족하며 살고 있다는 것이다.
주요시설
마을 바로 아래 서래산 기슭에는 일제 강점기 때 면사무소가 들어섰던 곳이다. 해제면사무소는 이곳을 거쳐 순복음교회 터로 옮겼다가 현재의 자리인 또뜨래미로 이동했다. 마을 뒤 봉대산 중턱에는 함평노씨 제각이 있었으나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마을변화
미기재

생활환경

마을조직
노인회, 부녀회, 어촌계
공동이용시설
마을회관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해제면소재지에서 신정로를 따라 올라가다 산이고랑을 사이에 두고 오른쪽에 백제시대 현치(縣治)였던 고읍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왼쪽에는 남양홍씨의 집성촌인 응양마을이 있으며 뒤에는 만서당이 앞에는 서래산(鼠來山)이 자리하고 있다. 산이고랑은 봉대산 기슭에 있었던 함평노씨 제각 아래의 골짜기에 물이 흘러내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고랑 주변에는 녹차나무가 산재해 있다. 전하는 말로는 제각 옆에 사찰이 있었으나 빈대 때문에 살지 못하고 강산으로 옮겼다고 한다. 옮긴 사찰이 현재의 원갑사 인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마을 옆에 당산뫼라고 부르는 동산이 있고 그곳에 둘레가 3m 70cm가 넘는 크기의 당산나무가 있다. 수형이 잘 잡혀져 있으며 입향조가 심었으리라 추정되는 나무이다.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미기재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당산뫼 당산나무 앞에는 상석이 놓여 있으며 매년 2월 1일에 거리굿을 겸한 당산제를 지낸다.
유물, 유적
마을 입구에 1970년에 세워 양재희를 기리는 만취양공유적비가 있으며 1993년에 세운 밀양박씨열부비가 있다.
설화
예전부터 전해오는 이야기로 이 마을에 처음 들어온 나씨들 촌에 홍씨가 들어오면 나씨들이 살지 못할 것이라는 말이 있었다. 그런데 나씨들 집에 일꾼으로 들어온 사람이 홍씨여서 결국은 나씨들이 이 마을에서 살지 못하고 모두 떠나갔다는 전설 아닌 전설이 있다. 마을 뒤에 쌍둥이 바위라 일컫는 두 개의 넓다란 바위가 있었다.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었던 바위인데 일부주민은 그 바위가 쥐 형상을 하고 있었다고도 한다. 그런데 어느 해 마을에 소년죽음이라 여기는 젊은 사람들이 변을 당하는 등 마을에 우환이 자주 발생했다. 마침 그 때에 봉대산에 올라가던 한 보살이 마을을 둘러보고는 마을 뒤에 자리 잡고 있는 쌍둥이 바위가 보이지 않아야 마을이 평안해진다고 이야기 했다. 그러자 마을 청년회를 중심으로 주민들이 몰려가 바위를 깨뜨리거나 묻어버려 현재 쌍둥이 바위는 주민들의 기억으로만 남아 있다. 주민들은 당산뫼가 사형장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언제 어느 시대에서 사용했던 사형장인지는 모르고 있었다. ‘해벌대통’이라는 말과 관련되었다고 하나 더 이상은 알 수가 없다.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허민(전 목포시의원), 박상필(은행지점장)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미기재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해제면소재지에서 신정로를 따라 올라가다 산이고랑을 사이에 두고 오른쪽에 백제시대 현치(縣治)였던 고읍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왼쪽에는 남양홍씨의 집성촌인 응양마을이 있으며 뒤에는 만서당이 앞에는 서래산(鼠來山)이 자리하고 있다.
기타사항
미기재

출처

각주
미기재
참고문헌
미기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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