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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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월5리 해제면 월암 작성
  • 월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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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브 정보

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30세대, 총44명(남25, 여19) / 2024. 5. 기준.
자연마을 구성
미기재
지명유래
주민들이 바우백이라고 부르는 마을 뒤에는 원래 7개의 바위가 있어 칠암으로 불려졌으나 1980여년 경, 도굴꾼에 의해 산 속에 있는 두 개의 바위가 없어지자 남은 다섯 개의 바위 중 가장 큰바위(마을 뒤 '바우백이'로 불리는 곳에 있었음)의 생김새가 달을 맞는 형태로 생겨서 ‘월암(月巖)’이라 했다. 달바위라 할 수 있는 바위는 1990년 경에 농지로 개간하면서 두 개로 쪼개져 한동안 방치되다가 지금은 없어졌다. 지명과 관련되어 전해오는 전설이 있다. 마을 뒤편에 여러 개 반달 모양의 바위가 있었다. 어느 날 이곳을 지나던 한 스님이 마을 전체를 조망하고 바위들을 보면서 마을 이름을 월암이라 부르면 마을에 귀인과 큰 부자가 나올 것이라 예언하여 월암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은 전주이씨 집성촌으로 입향조는 전주이씨 이장길(1568-1638, 자-志遠, 호-漁隱)로 알려졌다. 이장길은 경기도 포천 운담에서 대대로 세거하였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의하여 왜군과 싸워 전공을 세웠다. 그 전공으로 통훈대부 행 전의(全義)현감을 지냈다. 조정에서는 그 공을 높이 사 선무원종공신에 봉하고 원훈(原勳)에 기록하였다. 그러나 계속해서 나라가 어지러움에 처하자 벼슬을 버리고 남하하여 이 마을에 터를 정하고 니성산(尼城山) 아래에 강학소를 지어 마을 사람들을 가르치고 주변의 선비들과 더불어 경전을 읽고 토론을 하며 세월을 보냈다. 특히 병자호란 때는 남한산성에서 굴욕적인 화친이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신하된 도리를 다하지 못하였다 하여 밤낮을 통곡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마을의 지형이 달월(月)자 모양이다.
마을성씨
전주이씨 집성촌 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유월리(柳月里)는 니성산을 주산으로 각 마을이 자리 잡고 있으며 해제면 소재지로부터 현경면 방면으로 2㎞ 정도 떨어져 있다. 남으로 현경-해제를 잇는 24번 지방도로가 지나고 있다. 본래 유월리는 조선시대에는 함평현에 속했다가 조선조 말에는 목포부 해제면에 속한 지역이었다. 이후 1914년 오류동, 물암리, 월암리, 어은동을 합하여 무안군 해제면에 편입되었다. 오류와 월암의 이름을 따서 유월리라 불렀으며 지금은 월암마을로 이루어졌다.
행정구역 변경
문헌으로 본 마을이름 변천을 보면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함평형 해제면 암리(巖里)라 나오고 1912년의 자료에는 무안군 해제면 월암으로 나온다. 1917년의 자료엔 무안군 해제면 유월리 월암으로 나온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당시에는 마을에 하마석을 둘 정도로 이 마을 주민들의 위세가 대단했으며 양반촌으로 명당이었다고 한다. 실지로 산림이 우거져 있을 때는 니성산을 주산으로 하고 앞에는 서해바다가 펼쳐져 있어 어느 마을 못지않은 좋은 터였으리라 보인다. 이런 지형적인 영향인지 한국전쟁 등 여러 차례의 변란에도 이 마을은 아무런 피해가 없어 주민들은 마을을 피난촌이라 부르기도 했다. 마을의 주요 생산물은 마늘, 양파와 양배추이다.
주요시설
미기재
마을변화
예전에는 마을 주변에 산림이 우거져 있어 지형이 아늑하고 살기 좋은 마을이었다고 하나 현재는 주변이 모두 밭으로 개간되어 황량하고 삭막해 보인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노인회, 부녀회, 어촌계가 있다.
공동이용시설
마을회관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주민들은 마을의 주산인 니성산을 이성산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씨 소유의 산이라는 것이다. 실지로 예전에는 니성산 주변의 땅이 모두 전주이씨들 소유라 할 정도로 넓은 땅을 가지고 있었다. 전주이씨 영풍군파와 관계된 마을도 이 마을을 포함하여 오류동 언창 마을들을 들 수 있다.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미기재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전주이씨 영풍군파 제각인 영모재가 오류촌마을 뒤 니성산 아래에 있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의 건물로 기둥에는 4개의 주련이 걸려있다. 삼문이 있으며 제각 뒤에는 11개의 묘비와 12개의 망주석을 모아놓았다. 제각 뒤에는 납골당이 있는데 납골당으로 봐서 무안에서 제일 큰 규모로 안에는 890기의 유골을 모시고 있다. 또한 제일 위에는 세종대왕의 아드님인 영풍군의 단이 있으며 그 옆에는 며느리인 순천 박씨의 묘가 있다. 순천박씨는 사육신 중의 한분인 박팽년의 따님이다. 마을에 전주이씨삼강문이 있다. 이 마을 입향조일 뿐 아니라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워 신하의 도리를 다한 충신 이장길, 부모의 초상에 6년간 시묘살이를 해 주변을 감동시킨 효자 이천정(1548-1642), 시부모에게 남다른 효성을 바치고 남편(이상익)이 병을 얻자 백방으로 약을 구해 먹게 했으나 효험이 없어 급기야는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한 후 그 정성으로 3일간을 더 살게 하였고 사후에는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해 하늘도 감동케 한 열부 여양진씨(1862-1913)를 모신 삼강문이다. 비각은 ‘전주이씨충효열각’이라는 현판이 걸렸으며 안에는 정려 3개에 현판이 4개가 있다. 1929년에 지역의 유림들이 뜻을 모아 건립(마을유래지에서는 1921년 건립했다고 기록)하였다고 한다. 삼강문 좌우로 전주이씨 삼강비와 1914년에 세운 지암이공절의 실적비(이제풍)와 1979년에 세운 월성거사 이공유적비(이영대)가 있다. 마을 앞들을 신선들이라 부르며 마을 뒤 바우백이에는 바위 두 개가 놓여 있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왕족마을이다 보니 여러 가지 서류와 문헌 문집들이 전해왔으나 보관하지 못해 전부 유실되거나 잃어버려 아쉬움이 매우 크다. 13개의 교지와 다수의 문집 특히 함평현 관련 문서는 매우 보기 드문 것으로 앞으로 그 가치를 더 연구하여야 할 소중한 것으로 사료 된다. 전주이씨 장손(이선재)이 살고 있어 많은 문헌기록이 남아있을 것으로 추측되나 확인하지 못했다.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배용보(1871`1944, 동학참여자), 이여명(1590~1679,유학자), , 이제풍(1843`1901, 유학자), 이근식(1864`1946,의병활동)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미기재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미기재
기타사항
미기재

출처

각주
미기재
참고문헌
미기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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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26.11.03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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