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은 이 넘어(이너매) 저 넘어(저너매) 노랑섬 장자등 농장 새언안 등의 마을로 이루어졌다. 뒷갓뫼라 불리는 언덕을 뒤로 하고 走狗山이라 부르는 장흥고씨 선산을 왼쪽으로, 오른쪽은 영산강 뻘등이 있다. 마을 앞은 건네 밭이 가로 막고 있으나 그 너머에는 간척지가 조성되어있다. 하지만 달롱개산이라고도 부르는 주구산에서 살펴보면 영산강을 향해서 힘차게 뻗어내린 한 맥으로 보인다. 예전엔 이 마을이 섬이었을 것으로 여겨지며 농장이 개 밥그릇 역할을 하였다
지명유래
양지촌은 죽산2리에 속한 마을로 주변에 지초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형성(입향조)
장흥고씨 입향조는 고처대(자-만중, 호-죽포, 1651-1692)이다. 공은 기우가 청수하고 학문이 높았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고 이곳에 은거하여 자연을 벗 삼아 일생을보냈다. 마을에 공을 모신 재각이 있다. 마을유래지에는 ‘400여년 전 광산에서 살던장흥고씨 고처대에게 어명을 내려 지금의 이곳 陽芝村이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니 사방 30리를 다스리라는 명을 받고 정착하게 되었다’ 고 기록하고 있다.
나주나씨 입향조는 나흥경(자-희원, 1711-1771)이다. 청호리 소포 나덕명의 후예로서 보성에서 이 마을 장흥고씨에게 장가를 오면서 이주한 것으로 여겨진다.
탐진최씨 입향조는 최용흠(1813-1893)이다. 탐진 최씨들은 마을 앞에 간척지가 형성되면서 이주해온 사람들이다. 마을회관 앞 와비에는 양지촌 마을 유래를 ‘조선시대 고씨나씨 최씨 선비가 입향하여 의형제를 맺고 살면서 마을 언덕에 지초를 심고 서로를 선인과 군자 사이로 의롭게 살아오면서 마을이 시작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달리는 개 형국이다.
마을성씨
이 마을엔 원래 장수황씨가 살았다. 주민들은 마을 뒤 연고 없는 고총들은 대부분이 황씨 묘라고 한다. 하지만 마을엔 황씨들이 한 가구도 없다. 현재는 장흥고씨 나주나씨 등 여러 성받이가 살고 있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하지만 자료로 살펴 본 마을 이름의 한자가 시대마다 다르게 표기되어 있다.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무안현 노촌면 陽之村으로 나오고 1912년의 자료엔 무안군 일로면 良芝村으로 그리고 1917년의 자료엔 일로면 죽산리 良支村으로 나온다. 최근의 자료인1987년엔 일로읍 죽산리 陽芝村으로 나온다. 하지만 주민들은 良芝村의 표기가 맞다고 한다. 마을 입구의 표지석에도 良芝村으로 나온다.
참고로 장흥고씨 입향조를모시는 경모재 옆에 있는 묘의 비문에는 이 마을을 遊島로 표기하고 있다.
행정구역 변경
미기재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주민들은 이 마을을 우렁막음창골창이라 불렀다. 그만큼 외지고 구석진 곳에 있다는 말이다. 지도로 보아도 일로의 변두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간척이 되기 전에는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형의 지세였다. 하지만 지금은 들판 건너에 도청이 들어서면서 상전이 벽해 되고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는 말이 실감 나는 마을이 되었다고 한다.
주로 벼농사를 짓는다. 천년초농장이 500평 있다.
간척전에는 칠게, 맛, 대가이, 운저리, 망둥어, 새우, 모치, 농어, 우력 등이 잡혔다. 낙지는 많이 없었다. 이는 강을 따라 민물이 내려오면 낙지가 없다고 한다.
칠게는 목포로 팔러가기도 하고 장사가 와서 가져가기도 하였다. 맛을 밤새 까서 새벽에 목포까지 청호시장, 동부시장에 팔러다니셨다. 7월에 잡은 맛이 가장 맛있는데 회로 먹기도 하고 삶아서 죽을 쑤기도 하였다.
주요시설
미기재
마을변화
마을 오른쪽에 있는 장자등은 포구였다. 일제강점기 때는 일본인들이 주민들의 식량을 강제로 뺏어 자기 나라로 보냈던 수탈 창구였으며 50년대 60년대에는 주민들이 수산물을 잡아서 또는 짚으로 마람을 엮어서 목포로 팔러나갔던 경제통로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어려웠던 시절 목포시민들의 인분이나 퇴비 등을 실어와 거름으로 활용해 다른 마을보다 농사를 기름지게 경작해 아이들을 교육시키게 만들었던 고마운 포구이기도 하였다. 당시 길 옆에는 인분을 숙성시키기 위한 구덩이들이 많이 있었다. 현재는 이 포구 앞에 택지가 조성되고 있다.
노랑섬은 黃島라고도 한다. 누런 소나무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는데예전에는 아름드리의 소나무가 많이 있었다고 한다. 다른 기록엔 누리섬이라고도 표기되었다.
이 마을이 생활고에서 벗어나게 된 것은 마을 앞에 간척지가 형성되고서 부터이다. 조선시대 중기 이후 망월리의 전주이씨와 광산에서 이사 온 장흥고씨들이 마을앞 바다인 장호를 조금씩 매립하다가 더욱 확대하여 제방을 쌓았다. 사양동에서 주구산까지 매립하여 만든 땅은 70여 정보 되는데 새로 제방을 막아서 생긴 땅이라는의미로 지금도 새언안들이라 칭한다. 새언안들은 도장포 영화정 앞의 간척지들이다.이후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에는 목포에 사는 미야끼가 오오까상에게 마을 앞뻘밭을 인수 받아 장자등과 망월리 사양동의 긴섬(장도)를 연결하여 제방을 쌓고30여 정보 규모의 봉곡농장을 형성했다. 당시 소작 농가는 180여호였는데 광복 후300평 규모의 2필지씩 주민들에게 불하되었으며 ‘농장’이란 지명이 지금도 남아있다. 농장은 일제 강점기 때 간이학교가 있었는데 해방 이후 죽산분교에 통합되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미기재
공동이용시설
샘이 있었으나 물이 잘 안나왔다.
한해때 저수지를 만들었다.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오룡지구의 땅은 자율경작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동/식물
마을 잔등에는 입향조가 이주 당시 심었다는 동백 나무 두 그루가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남아있는 지명으로 큰밤나무골 작은밤나무골 동각잔등 건네밭 뒷묏갓 솔각끔 새언안 나리가리 큰애기묏등 아골 노랑섬 갱골 그리고 승달산의 끝자락으로 여겨지는 끝밭밑 등이 남아 있다. 당너매는 당월촌 너머 가는 길이다. 갱골은 도장포와 양지촌 사이의 골이 있는 곳을 말한다. 끝반밑은 끝에 있는데 튀어나와서 붙여진 이름이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마을 뒤 나주나씨 소유의 동각잔등이라 부르는 곳에는 고분이 많이 있었다. 밭주인이 밭을 경작하면서 뻥 뚫린 구덩이에 많이 빠졌다고 한다. 구덩이의 내부를 자세히 살펴보면 해골들이 많이 있는 것으로 보아 무덤일 것으로 추정되는데 주인은 무서워서 다시 구덩이를 메꿔버렸다고 한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일제강점기 때는 이 마을 나주나씨 가문에 유명한 학자가 있어 서당을 열었다.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광암리에서도 배우러 올 정도로 널리 알려진 훈장이었다. 아쉽게도 그 분이 남긴 문집 같은 것을 볼 수가 없어 그분의 학문적 역량을 구전으로만 들을 뿐이다
거처/생가/묘소
마을 입구 주구산 아래에 장흥고씨세장비와 열부함평이씨기행비가 있고 마을회관 앞에 1980년에 세운 열부무안박씨절행비가 서 있다. 주구산 기슭에는 장흥고씨제각인 경모재가 있다. 1962년에 세운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다. 입향조인 고처대 공을 모셨으며 현판도 하나 걸려있다. 경모재의 제는 음력 3월 5일에 지내고 예전에는 50여명이 참석하였으나 최근에는 15분정도 참석한다.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이렇게 지리적으로 외지다보니 한국전쟁 때는 피난지였다. 목포에서만이 아니라 북쪽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다. 주민들은 그때를 회상하면서 세대별로 번갈아 가며 피난민들에게 밥을 해주었다고 한다.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미기재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미기재
기타사항
청호리 망월리도 그렇지만 이 마을도 바닥이 바위층이어서 물이 귀했다. 해서조금만 가물면 물 때문에 곤욕을 치러야 했다. 물 때문에 이 마을에서는 축산을 하거나 원예작물을 재배하기가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