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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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죽산3리 일로읍 당월촌 작성
  • 당월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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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34세대 65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예전에는 50호 이상이 살았다.
자연마을 구성
남창천을 사이에 두고 삼향면과 인접해 있는 이 마을은 일로읍에서 영산강 쪽 3㎞ 지점에 있다. 특히 남창천은 용포, 맥포, 장항포, 자방포 등 네 개의 포구를 안고 있어 이곳 주민들의 생활이 바닷길을 이용해서 이루어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옛날에는 섬이었다.
지명유래
당월촌은 마을의 형상이 반달 모양을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행정구역명으로는 인근의 호암동과 자방포를 합쳐서 일로읍 죽산3리에 해당된다. 마을의 역사는 이 마을의 토박이라는 주민이 4대조까지 있었다는 것을 봤을 때 200여년 안팎의 역사를 갖고 있다고 추정된다. 그러나 1789년에 나온 호구총수에는무안군 노촌면 唐村里로 나온다. 1912년과 1917년의 자료에는 일로면 堂月村으로나온다. 주민들에게 唐村이란 말을 들어봤느냐고 물어봤으나 아는 사람이 없었다. 앞으로 唐村의 의미를 찾아야겠다는 숙제를 안았다
마을형성(입향조)
여러 성씨가 살다보니 어느 성씨가 먼저 들어왔는지 확인할 수 없다. 그중에서장흥고씨는 高碩柱(1878-1953) 옹이 양지촌에서 100여년 전에 이 마을로 들어왔으며 이어 나주나씨 나선균(1858-1938) 옹도 양지촌에서 이 마을로 들어왔다. 또한 압해정씨 정도삼옹이 광암리 광암마을에서 妻鄕으로
풍수지리(마을형국)
마을은 범바위가 있는 호암산을 주산으로 하고 중매봉을 안산으로 하고 있다. 호암산의 호랑이는 암호랑이로 노루목의 노루를 바라보고 있는 형국이다. 자방포가 막히기 전에 마을 앞 뻘밭이 간척이 되었다. 지금도 그 둑을 ‘중진’이라 부른다.
마을성씨
이 마을은 19세기 말 자방포 간척이 시작되면서 전국에서 사람이 몰려들었다.이어 포구의 특성과 늘어난 인구로 이곳에 시장이 개설되고 일로면사무소가 설치되면서 급격히 마을이 번창하였으며 마을유래지의 기록으로는 이 때에 18개 성씨들이 이곳에 정착하였다 한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미기재
행정구역 변경
미기재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당시 이 둑이 막아짐으로서 형성된 광활한 농토는 이 지역에 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으나 주민들은 얼마 되지 않아 커다란 고통을 맛봐야 했다. 이 간척지에서 농사짓는 농민들을 대상으로 매겨지는 세금은 인근 소작농과 비교할 때턱없이 비쌌으며 이의 부당함을 해소하려 官에다 신고를 해도 왕실에서 행하는 제도라 소용이 없었다. 조선시대 말기의 궁장토는 주민들이 세금을 제대로 내지 못해 대부분 일제강점기 때 동양척식회사로 넘어가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농민들은 철저하게 소외되어 이후 농민항쟁의 주요 원인이 된다. 농민들은 땅을 되찾기 위해 법정 투쟁을 하지만 되찾지 못하고 수많은 고통과 수난을 당해야 했다. 그러다 광복이 되어서야 다시 돈을 지불하고 땅을 사야 했던 역사를 안고 있는 아픔의 땅이 궁장토이다. 벼농사를 주업으로 하고 있다.
주요시설
당월촌에서 최초의 일로시장이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은 좀 더 고증해보아야 하지만 주민들의 일관된 주장과 당시의 환경이 시장 형성의 조건은 갖췄다고 본다. 일단 이곳에서 출발한 시장은 지장리 송태 (세명장 -삼향장을 이르는 말)로 그리고 월암5구 강남산으로 옮겨 현재 월암2구 황소 마을에서 형성되고 있다.
마을변화
마을 앞에는 서남해 지역 산업의 축인 L자형(무안 - 광양) 도로가 지나가고 있으며, 이곳과 노리목(장항포)간의 간척공사가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농지가 없어 이 마을의 주민들이 궁벽한 생활을 하지 않았을까 여겨질 정도로 마을의 지리적 여건이 궁색하다. 간척전에는 짱뚱어와 벚굴 등이 잡혔다. 수문에서도 장어도 많이 잡혔다. 이곳의 뻘등이 제일 크다. 도막강은 도막으로 잘라서 도막강이라고 불렀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부녀회와 노인회가 있다. 청년회는 없으나 청년들이 귀향하고 있다.
공동이용시설
미기재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이 마을에서 유념해 보아야 할 사항이 ‘자방포’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방포를 건너편 노리목인 장항포를 발음하다 와전되어 자방포라 한다지만 실지로 자방포는 두가구가 살고 있는 일로읍 죽산 3리의 마을 이름이다. 삼향면의 장항둑은 ‘노리목’을한자로 표현한 것이고 이곳의 자방둑은 마을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둑을 막을 때자꾸 둑이 터지니까 이를 해결하기 위해 당시 거지였던 ‘자방’이라는 사람을 제물로해 둑을 완성시켰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 것이다. 즉 인신공양의 결과물로서 얻어진 마을 이름이라는 것이다. 장항둑과 자방둑 전체를 포함해서 자방포라 한다.
동/식물
은행나무는 아버지로 소나무는 할아버지 이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이 마을은 여러 성씨가 살지만 단합과 협조가 잘 이뤄진다. 또한 주민들간 다툼으로 주민들의 소리가 마을 밖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주민들의 협조와 단결이 있어서 새마을 사업으로 세 차례나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하였다. 마을에서 뚜렷이 이름을 날린 사람은 없지만 한때는 일로읍에서 가장 많은 공무원을배출시키기도 하였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명절에는 어르신댁에 음식을 해서 다니며 인사를 다녔다. 마을에는 제사가 없고 예전에는 마을 회관(동각)에 상여를 보관하였는데 현재는 소막 근처로 옮겼다고 한다.
유물, 유적
마을회관 옆에는 세 개의 비석이 있다. 1903년(고종 광무7년. 주민들은 1902년으로 알고 있다)에 세워진 영친왕궁언장비와 1904년(고종광무8년)에 세워진 군수 조진규의 비다. 그리고 1907년(정미년)에 세워진 경선궁혁폐선정불망비가 그것이다.비문이 없는 영친왕궁언장비는 장항포 둑을 축조하여 궁장토를 만든 기념으로세워진 것이다. 궁방전이란 궁장토(宮庄土)라고도 하며 왕궁의 경비 조달을 목적으로 한 토지를 말한다. 이러한 궁방전을 획득하는 방법은 권력을 이용한 여러 가지 방법이 있었으나 그 중에서 많이 이용된 것이 바다를 막아 간척지를 조성하거나 산림을 개간하여 농토를 만드는 방법이다.또 하나의 비는 군수 조진규의 비인데 조진규는 무안에서 1902. 06 - 1906. 07월까지 근무했던 자로 그 당시에 나름대로 선정을 해서 주민들이 세운 것(1904년 -고종 광무8년)이 아닌가 여겨진다. 비석이 오래되고 石質이 좋지 않아 글씨가 심하게 훼손되어서 읽을 수가 없다. 영친왕궁장토가 경선궁장토로 이속되면서 주민들의 심각한 민원이 계속해서 제기되자 경선궁에서는 두 명의 사정관을 현지로 내려 보내 사태를 파악케 했다. 사정관이 일로에 와서 사정을 들어본 즉, 심하게 세금을 부과했으므로 이를 시정하고적정한 세금을 내도록 조치하였다. 이에 주민들이 경선궁의 조치에 감사하여 세운비가 경성궁혁폐선정불망비다. 경선궁은 영친왕의 생모인 순빈 엄씨가 있는 궁을말한다. 이 비들은 자방포 수문이 있는 민가 옆에 세워졌었는데 농로를 개설하면서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이어 2013년에 주민들이 성금을 모으고 무안군의 지원을 받아각을 세우고 주변을 정비하였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미기재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해방 이후 마을에 남로당 전남도당 책임자급에 해당하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이름이 나종길이라는 사람으로 많이 배우고 담력이 셌다고 한다. 일로읍 곳곳에서좌우익 싸움으로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했는데 이 사람 덕분에 이 마을에서는 이념분쟁의 피해가 없었다고 한다.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이 마을은 여러 성씨가 살지만 단합과 협조가 잘 이뤄진다. 또한 주민들간 다툼으로 주민들의 소리가 마을 밖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주민들의 협조와 단결이 있어서 새마을 사업으로 세 차례나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하였다. 마을에서 뚜렷이 이름을 날린 사람은 없지만 한때는 일로읍에서 가장 많은 공무원을 배출시키기도 하였다. 2022년 수련마을로 선정되어 가로수로 홍천 돌배나무를 심었고 회관을 다시 짓기로 하였다.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영친황의 수문이 있으니 돛단배 띄우는 사업을 해보고 싶다고 한다.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미기재
기타사항
마을 노래가 있다. 마을찬가 인데 마을이 만들어진 이야기 이고 어르신들이 모여서 마을 노래를 불러주셔서 녹음하여 자료로 보관할 수 있었다. 예전에는 야학이 있어 동각에서 글을 배웠다고 한다. 현재의 은행나무 집터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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