住龍은 청호1리에 속하는 마을로 옛 이름은 주변의 산세가 용과 같고 영산강의 맑은 물을 상징하여 ‘龍湖’라 하였다.
용이 승천한다고 해서 주룡이라 부른다.
마을의 주산인 望母山은 나덕명이 이곳에 모시지 못한 어머니를 그리워 하며 날마다 나주를 향하여 拜哭하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위에는 하나의 기암이 있는데 그 바위를 望父라 부르기도 한다. 또한 간룡산을 어머니 산이라 하여 어머니산을 바라보는 산이라 하여 망모산이라 부른다는 異見도 있다.
마을형성(입향조)
마을의 형성은 소포 나덕명(1551-1611, 자-극지, 호-소포)에 의해서다. 그는 유년시절부터 기상이 늠름하고 기골이 장대하였으며 학문에도 뛰어났다. 후일 곤재정개청의 제자로 수학하다가 기축옥사(1589)에 연루되어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되었다. 그곳에서 임진왜란을 맞게 되었는데 국난을 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의병을 규합하여 공을 세우니 그 공을 인정 받아 유배길에서 풀려 고향인 나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마을은 한눈에 보아도 좋은 위치에 있었다. 큰 망모산과 작은 망모산을 주산으로 하고 있으며 앞에는 안산이 자리 잡고 있다. 마을 앞으로는 주룡나루로 통하는 일로로가 지나고 있다. 마을 뒤에는 이 마을의 입향조인 소포공 묘를 비롯한 나주나씨 집안의 묘들이 있다. 망모산과 마주보고 있는 길 건너에는 간룡산이 있다.
마을성씨
나씨 집성촌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용호-주변의 산세가 용과 같고 영산강의 맑은 물을 상징하여 용호라 함
* ‘마을의 조산인 간룡산이 굽이치는 용처럼 마을을 향하고 마을의 지형이 용이 깃들어 있다 해서 주룡’이라 했다
행정구역 변경
문헌에도 1789년에 조선왕조에서 펴낸 호구총수에는 노촌면 용호리로 나온다.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일로면 龍湖洞, 1917년에 조선면리동일람에는 일로면 청호리 注龍洞으로 나오다 이후에는 청호리住龍이라 나온다. 실지로 무안지망집과 입향시조 그리고 성씨자료에도 注龍이라 나오지만 마을 탐방시 확인했던 소포공의 묘비에서는 住龍이라 나온다. 또한 대동여지도에 망모산을 住龍山으로 표기하기도 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이 마을은 전형적인 반촌이었다. 주민들은 바닷가에 살면서도 갯것을 잡아본 적이 없을 정도로 위세를 부렸으며 마을에 힘든 일이 있으면 주변 마을에서 사람들을 불러 일을 처리하게 했다. 일제강점기까지도 일반 주민들이 마을 앞을 지나갈 때면 옷을 단정히 하는 것은 물론 발소리도 죽이면서 지나가야 했을 정도다. 특히 나씨 문중은 우비 청호 마을 등 주민들이 나씨 문중 땅을 밟지 않고는 나들이를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토지를 갖고 있었다. 현재도 이 마을 주민들은 문중 땅을 경작하고 있다. 개인별 사유지가 별로 없고 대부분 문중 땅이어서 주민들은 경작권만 갖고 생활하고 있다.
반촌이어서 일을 하러 다니지 않고 품앗이로 서로 일을 도와주어 일을 했다. 문토가 많아서 시제를 지냈다.
벼농사를 주로 하고 깨, 고추 등을 재배하는데 밭이 많지 않다. 고라니의 피해로 다른 작물을 재배하지 못한다.
목화재배는 일꾼을 다른 곳에서 데려와서 일을 했다.
주요시설
마을에서 조금만 나가면 볼 수 있는 주룡나루는 교통망이 발달하기 전 영암 해남 등에서 무안으로 올 때 사용하는 주된 나루였다. 현재 이 나루 아래인 주룡협곡이라 부르는 곳에 서해안과 남해안 고속도로를 이어주는 다리가 있다. 무안과 영암의 한 글자씩 따 ‘무영대교’라 명명된 이름인데 ‘주룡대교’라 했으면 더 좋았을 것으로 여겨지는 다리 이름이다. 맞은편 영암에도 주룡이라는 지명이 있다.
마을변화
큰 망모산과 작은 망모산이 주산이며
마을 앞으로는 주룡나루로 통하는 도로와 2012년 개통된 영암-부산간 남해고속도로, 청호교차로, 자전거도로가 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노인회와 부녀회가 운영되고 있다. 동계와 초복날 복달임 행사를 한다.
공동이용시설
미기재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마을에 통샘 들샘 등 두 개의 샘이 있다. 통샘은 여자의 성기를 닮은 샘으로 소포사 아래 바위틈에서 나는 물의 질량이 무거운 물이다.
들샘은 들 가운데 있는 샘으로 비로촌 사양동 등 12마을이 이 마을 물로 생활했다고 한다. 특히 가뭄이들때는 이 마을 사람들에게 물 배급을 하기도 했다.
마을 앞 들샘은 한해 때에도 물을 먹던 곳으로 인근 군부대에서 물을 길러갔다. 청호 3구랑 열두개 마을이 물을 길어 먹었다.
동/식물
마을회관 앞에는 입향조가 심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5미터 90이 넘는 느티나무를 비롯하여 여러 그루의 나무들이 마치 방풍림처럼 배열해 있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남아있는 지명들이 많다. 당재는 당을 모시는 터라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사람들이 오가면서 솔가지를 놓고 간 것이 쌓여 산봉우리가 되어 형성된 것이다. 주룡마을에서 죽산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지금은 길이 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장골 아래에 있는 골짜기를 말하는 가는골이 있다. 마을 앞에 있는 산을 안산이라 하며 장골 위에 절골이 있다. 예전에 절이 있었다는 골짜기다. 그 골짜기 아래에 저수지인 주룡제가 있다. 음산골, 태자골, 배다골, 서당골, 서당골 등의 이름이 남아있다.
절골은 저수지 안쪽의 장소로 절골에 절이 있었는데 빈대가 많아서 태워버렸다고 한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마을에는 주민들의 화합과 친목을 도모하기 위한 常盛契가 있었다. 해년마다 봄철에 열리는데 이때는 어린아이에서 노인까지 청호리의 전 주민이 모여 잔치를 벌였다. 하지만 광복 이후 없어졌다. 뿐만 아니라 마을에서 주민들이 공동으로 경작했던 밭이 광복 전까지 있었다.
유물, 유적
간룡산에는 최초의 무안현감이었던 나자강과 그의 선조와 후손의 묘가 있으며 이를 제사 지내기 위해서 경모재라는 재각이 있다
망모산 아래 나주나씨 묘 아래에 있었던 소포사는 1803년에 건립하여 소포 나덕명을 배향하였으나 대원군의 서원훼철령 때 없어진 사당이다. 이후 아래쪽에다 소포사 강당으로 중건하였는데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주변에서는 드물게 보는 독특한 방위를 접하고 있다. 즉 두 개의 방 사이에 마루가 있는 역ㄷ자형으로 무덤을 바라보고 있으며 안에는 소포사강당중수기와 중수헌성기 편액이 있다.또한 두 개의 방 앞에는 각각 누마루가 있다.
마을 앞 길 건너에는 충신정려각과 유허비가 있는 나덕명의 유적이 있다. 충열각 안에는 편액이 있으며 충열각의 문살에는 독특한 문양의 음각 판화가 한 점 걸려있다. 나덕명이 정유재란 때 공을 세운 것을 기념하여 1803년에 세운것으로1996년에 후손들이 다시 건립한 것이다. 간룡산 밑의 경모재는 정면 4칸 측면 1칸의 시멘트 구조물로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주룡강 적벽암 위에 적벽정을 짓고 영산강의 풍취를 사랑하며 비둘기를 기르니 그곳을 구암이라 부르기도 한다.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마을의 지형적인 이점 때문인지 몰라도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다. 국회의원을 지냈던 나판수씨를 비롯하여 정관계 및 학계에 많은 인물이 진출해 활동하고 있다.
*조선시대 3대에 걸쳐 2충 2효 4열의 정려를 받음
2충: 나덕명. 나덕헌
2효:나사침. 나득소
4열: 나사침 딸. 나덕준 딸. 나덕헌 처. 나수소 처
*나판수: 국회의원. 사회복지법인 소전원 설립자
거처/생가/묘소
묘소: 무안군 초대 현감 나자강. 부친 녹사공 나집. 금호공 나사침. 소포 나덕명. 소전 나판수등등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상사바위. 주룡나루 공원. 적벽정. 영산호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미기재
기타사항
일부 학자는 주룡나루 주변을 우리나라 장시의 출발지로 보기도 한다. 실지로이 마을에 ‘장골’이라는 지명이 있어 일각에서는 장시가 있었던 곳이라 보기도 했으나 주민들은 장시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긴 골짜기[長谷]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도장포에 ‘초장골’이라는 지명이 있는데 그곳이 처음으로 시장이 형성된 곳이라 한다. 주민들은 인근 탄골에서 숯을 구워 초장골에서 팔아 생계를 유지하기도 했다고 구체적으로 알고 있었다
*도로옆 간룡산에 입향조인 소포공 묘를 비롯한 나주나씨 집안의 묘들이 있다.
최초의 무안현감이었던 나자강과 그의 선조와 후손의 묘가 있으며 이를 제사 지내기 위해서 경모재라는 재각이 있다.
주룡나루는 교통망이 발달하기 전 영암군과 무안군을 뱃길로 이어주던 나루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