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비는 용골, 각골, 생기미, 우비, 대밭골을 포함하는 마을로 청호3리에 해당하며 ‘소코 마을’로 불리기도 한다. 용골은 회관이 있는 마을이고, 각골은 소뿔을 의미하고 갑등이라고도 한다. 생기미는 생금밭으로 돈이 생기는 (生金). 우비는 소의 코에 해당하는 부위이고 대밭골은 못난이 미술관 자리이다.
지명유래
소코마을은 마을을 에워싼 지형이 소의 코와 흡사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형성(입향조)
마을유래지에는 ‘나주 정씨 정용옥이 나주에서 1626년경에 이곳에 이주하여 정착해 어업을 주로 하였으며 그 후 차츰 황씨 김씨 등이 이주해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주민들은 오래 전에 황씨들이 생기미[生金] 주변의 대밭골이라는 곳에서 80여 호가 넘게 정착하여 살았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대밭골 남자들이 서해바다로 고기 잡으러 갔다가 풍랑을 만나 대부분이 죽고 난 후에는 남아있는 가족들도 뿔뿔히 흩어져 현재는 황씨들이 한 가구도 살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나서 들어온 사람들이 나주 정씨를 비롯하여 여러 성씨의 사람들이 이주해왔다고 한다. 현재는 정씨만 몇호 남았다고 한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마을을 에워싼 지형이 소의 코와 흡사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이곳에 집터를 잘 잡으면 부자가 된다는 속설이 있다.
지도를 놓고 보면 우비 마을은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적 지세다. 영산강가에 있는 대부분의 마을들은 뻘이 있어서 직접 영산강과 접해 있지는 않는데 이 마을은 바로 영산강과 접해 있다. 해서 영산강이 막히기 전까지는 농지가 없어 대부분이 어업을 주생활로 하며 가난하게 살았다. 이후 1980년대에 영산강이 막히면서많은 농토가 형성되어 나름대로 부를 형성하여 살고 있다. 복조리 형국으로 강을 막기 전 돈을 버는 형국인데 마을에 처음 들어온 사람이 돈을 벌었다고 하였다.
마을성씨
현재 복합 성씨가 산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이 마을의이름은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나오나 1912년의 지방행정지명 일람이나 1914년을 거쳐 1917년에 작성된 朝鮮面里洞 일람에는 우비라는 마을명은 나오지 않고 용동으로 나온다.
행정구역 변경
1789년 호구총수때는 마을 이름이 우비였고
1917년 조선면리동에는 용동이라고 했으나
현재는 일로읍 청호리 우비마을이라 한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우비 마을을 포함한 주룡 마을 아래의 경작할 수 있는 땅들은 대부분 나주 정씨와 연안차씨 소유였다고 한다. 나주정씨는 주룡마을 입향조인 소포 나덕명의 수행원이었다. 소포공이 나주 정씨의 성실함과 열성에 고마워 주룡 마을 아래의 토지들을 정씨에게 물려준 데서 비롯된다.
그런데 연안차씨 소유의 땅이 많은 것은 일제강점기 이후부터다. 일제말 일본인회사의 서사로 일하던 차남진씨의 아버지는 광복이 되면서 일본인들이 허겁지겁 일본으로 돌아갈 때 그들이 소유하고 있던 토지를 자신의 명의로 돌려놓았다. 해서 청호리 일대만이 아니라 무안 곳곳에 차씨 소유의 땅이 많게 된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이러한 토지 소유에 대한 재판이 많이 벌어져 상당부분 원소유자들이 차씨로부터 땅을 되찾았다고 한다.
영산호 축조 이전에는 대부분 어업이었으나
40년전 부터 농업으로 변화하였고 가물치양식
과 무화과 생산지였으나 지금은 가물치 양식
은 하지 않는다.
가물치 양식은 1983년 최복진 어르신이 시작하여 마을사람들 10여 농가가 가물치양식을 하였다. 약 20여년간 양식업을 하였고 평택 이남의 가물치를 부화하여 치어를 분양하였다고 한다. 영산호가 오염되어 알이 부화되지 않고 기형고기가 생기게 되어 그만두게 되었다고 한다. 양식된 가물치는 가물치 회와 매운탕으로 먹었다고 한다.
주요시설
생기미(生金)나루터는 영암과 연결되며 영산
포와 목포 오가는 배들의 중간기착지였으며
생기미 샘은 어장을 나가는 사람들의 중요한
식수원이었다.
영암 학산 독천장에서 일로 장으로 소를 가져올 때 생기미 나루를건넜다. 화물(철선)이 ‘소배’를 운영해서 가능했는데 소를 5-6마리를 묶어서 다녔다고 한다.
생기미나루터는 집이 있었는데 방독 아래서 물이 났다. 석수라서 보약이었다고 하며 목포에서 오는 배들이(풍선) 겨울 북풍에(앞바람) 생기미에서 묵어간다. 물 때(한물)에 갈 수 있는거리가 목포에서 생기미나루까지여서 꼭 쉬어갈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식수로 물을 떠갔다. 해파리 저장 당꼬가 있었다고 한다.
마을변화
영산호 축조전엔 어업을 주업으로 하신분들이
많았지만 지금은 논농사및 무화과 재배하며
못난이 미술관과 자전거길이 있다.
간척 전 어업은 고기반 물반이었으나 고기잡는 기술이 발달되지 않아서 많이 잡지 못했다고 한다. 조기도 잡혔고 황복은 산란터였다. 숭어와 농어는 임금님께 진상하였고 어란은 장과 참기름을 발라서 말렸다. 명산에서 업으로 어란을 만들었다고 한다. 칠게와 조개, 백합, 맛이 잡혔다.
간척 후 바닷물이 담수로 우러내면서 농사를 지었고 간기를 내려보내는 방식으로 영산강이 담수역할을 해서 염해에 대해 신경쓰지 않고 농사를 지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노인회와 청년회 부녀회가 있고 동계를 지낸다.
공동이용시설
생기미 나루에는 샘이 있는데 특이한 구조이다. 샘 위에는 가옥이 들어서 있으며 물은 방 구들 아래에 있는 바위 틈에서 난다. 예전에 이 물은 먼 바다로 고기잡이 하러 나가는 어부들에겐 굉장히 중요한 샘이었다. 왜냐하면 다른 물은 가져가면 뜨거운 햇볕 아래서 3일을 넘기기 어려운데 이 샘물은 보름이 지나도 물맛이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도 생기미 물은 통에 받아 놓은 지 두 달이 넘어도 이끼가 끼지 않는다고 한다.
생기미라는 이름은 한자 ‘生金’에서 변화된 지명으로 볼 수도 있으나 어학적으로는 해안선이 오목하게 들어간 곳의 지명을 지칭하기도 한다. 이 생기미 샘 위는 영산강이 막히기 전까지는 주막이 자리하고 있었으나 이어 기도하는 사람이 기도처로 사용하고 있다가 현재는 일반인이 거주하고 있다. (참고로 영산강 건너 마주 보이는 영암군 학산면에도 생기미 나루가 있다.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청호리에는 두 개의 나루터가 있다. 주룡나루와 생기미[生金]나루가 그것인데 이곳은 영암과 연결되는 길목이며 영산포로 오고가는 각종 배들의 중간 기착지였다.주룡나루는 역사적 의미를 갖는 나루이지만 생기미 나루는 온갖 배들이 드나들던 황금나루였다. 특히 이 나루는 영산강 뱃길에서 썰물과 밀물이 마주치는 중간지점에 해당되어 수송배나 고깃배들은 대부분 이 나루에서 일박을 한 다음 물때를 보아오고갔던 것이다. 장날에는 영암 독천장에서 소를 사서 이 나루를 건너 일로장에 팔면 많은 이문을 남길 수 있었다고도 한다. 해서 이 나루는 돈이 모여들었고 사람들이 찾아왔다. 이렇게 생기미가 흥했던 것은 주민들의 말처럼 ‘생기미라는 말 자체가 돈을 뜻하는 것이어서 이곳에 들어가면 돈을 벌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풍수적으로도 이 나루는 소코에 해당된다.
동/식물
상괭이.칠게. 백합.맛.숭어.서대등 식재료등
이 영산호 담수로 없어지고 숭어는 있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이러한 지리적 여건 때문인지는 몰라도 우비 마을 주변에는 장골 또는 장재라부르는 지명이 남아있다. 현재 죽산 분교와 주룡 저수지 주변으로 절골 밑 지역을 말하는데 예전에 장시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학자들 사이에는 우리나라 장시의 출발을 나주와 무안으로 보고 있다. 그중에서도 영산강 주변 특히 일로에서찾고 있는데 ‘장골’ ‘장재’라는 지명으로 인하여 이 지역이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형성된 장시가 아닌가 여겨진다
생금밭(생기미샘)을 의미하며.용골(경로당)
은.경로당이 있는 곳이며 대밭골은 못난이미
술관이 있고 먼생기미는 길 끝부분으로 현재
샘이 있다. 싸짓끝(밀물곶이) 봉두막산.소가
마등의 명칭이 있다.
생기미샘은 논과 밭 사이의 샘으로 식수로 사용하였고 가뭄에도 마르지 않았다. 싸지끝은 생기미터 위에 네모난 곳으로 썰물이 매우 싸게(빨리) 든다고 해서 밀물곶이라 불렀으며 물이 싸게 간다는 의미이다.
봉두산(봉두막)은 봉화의 역할을 했는데 마을 윗 봉우리를 말한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용진명소: 상사바위에 있는 곳으로 조선 세종
때 지정되어 국가 재난이나 자연재해시 祭(제
사)를 지냈다, 상사바위에서 바다에서 죽은
영혼을 달래는 굿을 하기도 했다
유물, 유적
미기재
설화
이 마을에는 남녀간의 승화된 사랑이 얽혀있는 상사바위 전설이 있다. 상사바위는 마을 옆 영산강변에 있는 바위이다. 우리나라 전역에서 마주 보고 있는 바위가 있으면 대체로 형성된 설화가 이루지 못하는 남녀간의 비극적인 사랑을 소재로 한 상사바위 전설이다. 그런데 우비 마을의 황씨 처녀와 각골 마을의 추씨 총각이 엮어가는 이 마을의 상사바위 전설은 사랑이 비극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승리하는 사랑이다. 이는 다른 지역의 전설과는 다른 발전된 형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없는 자의 설움을 각설이 타령으로 승화시킨 품바와 함께 일로만이 갖는 소중한 문화적 자산이기도 하다.
일로읍 청호리 우비마을 강변쪽으로 우뚝 서
있는 바위 한쌍이 있다. 이 마을에는 황씨 80
여호가 자작일촌을 이루며 살고 있었다. 제일
부잣집 황씨 슬하에는 외동딸이 있었는데 미
모가 뛰어나고 얌전하여 소문이 자자했다. 어
느 봄날 황낭자는 영산강변에 굴을 따러 갔다
가 바위에 미끄러져 빠져버리고 말았다. 이
모습을 본 각골마을 추씨 총각이 낭자를 구하
게 되었고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지게되었다. 얼마후 추씨총각은 황낭자에게 장례를 약속하고 서해바다로 조업을 나갔으나 큰태풍에 배가 뒤집혀 죽게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낭자는 식음을 전폐하고 매일같이 강변바위에 나가 울며 지냈다. 그러던 어느날 하늘이 갑자기 검은 구름으로 덮이고 낭자가 서있는 바위밑에서 섬광이 비치고 천둥이 울리더니 강물에서 큰구렁이가 나타나 황남자를 감고 유유히 물속으로 사라졌다. 이 소식을 들은 황낭자의 부모님이 강변에 이르자 두 마리의 큰구렁이가 물속에서 나타나 연신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하며 눈물을 흘렸다. 사람들은 두남녀의 혼신임을 알고 혼레식을 거행하니 두 마리의 구렁이는 인사를 한 후 물 속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그때부터 마을 사람들은 못다 이룬 두 남녀의 사랑을 애틋하게 여겨 이 바위를 상사바위라 부르고 있다.
기록물, 문헌
상사바위의 용진명소는 조선 세종때 지정되었다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김판삼 조각가(현):못난이 미술관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미기재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한국전쟁 때는 주민들이 상사바위 위에다 수숫대로 초소를 만들어 만약을 대비했다. 당시 영암에는 좌익들이 많아 저녁이면 영산강을 건너와 마을의 식량을 털어가곤 했다. 그때 주민들이 상사바위 이 초소에서 망을 보고 있다가 좌익들이 넘어오면 싸이렌을 울려 주민들을 피난가게 하였던 것이다.
한국전쟁시 상사바위에 초소가 있었고 토벌하
러 갔다가 사망하신 분도 계시고 적군을 바
다로 수장시켰다고 한다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이 마을 주민들의 단합심은 다른 마을이 부러워할 정도이다. 한 집에서 궂은 일을 당하면 주민 모두가 나서서 내일처럼 거들었다고 한다. 지금도 그러한 풍경은변화가 없다고 한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느냐고 묻자 한 주민은 가난해서 그런다고 한다. 가난했기 때문에 배고픔을 줄이기 위해서 모두 모여 함께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또한 여러 성씨들이 모여 살다보니까 자기주장 대신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이 형성되었다고 한
상사바위에서 내려다 본 주룡협곡과 물돌이는
장관이었고 배를 타야만 볼 수 있었던 적벽의
기암괴석도 멋진 풍경이었다. 현재 강변 데크길
조성 중이며 옛 대밭골엔 못난이 미술관 공원
이 있다.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마을 주 도로와 자전거길을 함께 이용하다 보
니 크고 작은 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난다. 빨리
자전거전용도로가 완공되길 바라고 있다.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미기재
기타사항
이 바위는 어업을 주로 하고 있는 주민들에게는 중요한 터이기도 했다. 영산강의 지리적인 여건이 상사바위가 있는 이곳을 지나면 바로 큰 바다로 나가는 길목이기 때문이다. 해서 예전에는 이곳에 서해바다로 어업을 나가는 어민들의 무사귀환과 풍어를 기원하는 사당이 있었으며 생기미 나루에서 식량과 식수를 가득 실은 배들이 큰 바다로 나가기 전 다시 한번 되돌아보고 가는 바위이기도 하다.
각골 위에 있는 상사바위 벽에 김삿갓 김병연의 시가 음각되어 있다는 구전을 듣고 배를 빌려 상사바위 주변을 살펴보았으나 음각된 글씨는 찾지 못했다. 예전에는 이 상사바위 정상이 지역 주민들의 사랑을 받았던 쉼터였다. 풍광이 좋아서 시인묵객들이 즐겨 찾았던 명소이기도 하였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떨어진 바위라고 부르는 곳에 바둑판이 그려진 큰 돌이 있었는데 50여년 전에 주변 마을 주민이힘자랑을 하다 영산강 빠뜨렸다고 한다. 바둑판은 주룡마을 입향조 나덕명과 영암으로 귀양왔던 홍의장군 곽재우가 바둑을 둘 때 사용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요즘 들어서는 아이들의 소풍지는 물론 농사가 끝나고 주민들이 마을 행사를 할 때도 찾아와 즐기는 곳이다.
생기미나루터는 화물선 정박지라 할 정도로 큰 배들이
1982년에 간척을 하였고 영산강을 막으면서 호당 한필지를 불하하였는데 어업권이 있으신 분이 우선순위가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