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리는 청계면 소재지로부터 무안읍쪽으로 6Km 떨어진 광-목간 국도1호선 주변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을 중심으로 좌로는 국도1호선, 우로는 무안읍 우회도로가 지나고 있으며 화설당,사마동,절리등 3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졌다.
지명유래
화설당은 사마1리에 속하는 마을로 창포만 쪽에 접해있다.호구총수는 물론이고 1917년 문헌인 조선면리동 일람까지 청천리의 아랫마을이란 뜻인 “하청천”이라불렸다.화설당이란 이 마을 입향조인 류 자의 손자인 류 운이 지은 정자의 당호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에는 원래 광산이씨들이 살고 있었다
그러다 나주 다시면의 문암리에서 세거하던 문화류씨 류자가 아내의 고향인 이곳에 정착하면서 현재의 마을이 형성 되었다 류자(1522-1607, 호-만포,훈련원 주부역임)는 염결하고 정직하여 문필로 일찍이 세상에 문명을 떨쳤으며 의를 사모하고 예를 좋아하여 자연에 묻혀 살면서 덕을 길렀다.
임진왜란때는 친척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우기도 했다. 아들은 류수경,손자는 류운이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미기재
마을성씨
문화류씨,처가살이로 들어온 나씨,서,강,김,,문,
박,배,송,이,조,천,최씨등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하청천-사마리화설당
행정구역 변경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무안군 이서면 사마리와 하청천 절리로 나온다 이후 1912년의 자료에는 절리를 제외하고 무안군 이서면 사마리와 하청천으로 표기 되었다가 1917년 자료에는 청계면 사마리 사마동, 남계동,하청천 삼노동으로 나온다. 이어 1987년의 자료에는 청계면 사마리화설당, 사마동,절리로 나온다.여기에서 하청천은 화설당의 옛이름이다
삼노동은 무안읍 평용리에 편입되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미기재
주요시설
호남농산,영진농산,청계석재,여울농장,동성냉장고,목조주택사무실,폐차장, 해태타이어,정미소
마을변화
마을은 화설당과 서당골로 이루어졌다.
화설당은 국도1호선 아래에 위치하고 있으며 마을아래 바다쪽에는 해풍을 막아주는 숲이 조성되어 있어 그 숲을 숲거리라 부른다. 숲거리 너머에는 “족판머리”라 부르는데 족판머리란 발“足”자에 판자“板”자를 써서 옛날에는 여기까지 배가 들어와 족판을 딛고 배에 올랐다고 붙여진 이름이다.그 주변을 주민들은 창포라 부르고 있다.서당골은 국도 1호선 너머 화설당 맞은편애 위치하고 있다.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지명에 유독 말(馬)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우선 마을을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마협봉이 있으며 그아래 암구마봉,숫구마봉 이 있고 마을의 주산에 갈마봉이 있다. 또한 현재의 회관자리를 말매미라 하고 그 앞에는 다박솔과 하마석(마을입구)이 있었다.
지금도 마을에는 목마른 말이 물을 마셨다는 갈마봉 아래에 통샘이 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부녀회,노인회
공동이용시설
마을회관,방앗간,동각아래통샘
전통식품/특산품
류준선식초(2024년 식용,농약으로사용)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미기재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선독, 막음독,앞당산, 하네당산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동계,대문중계(1년에 한번 문화류씨)
유물, 유적
류 운 (1580-1643,자-건숙,호-화설당)은 학문과시에 능통하였으며문명과 덕이 주변에 떨쳤다. 특히 말년에 화설당이란 정자를 건립하고 당대의 석학이었던 우암송시열, 수은강항,남곽박동열,시남유계등과 교류하며 학문을 논하고 후학들을 양성하였다. 화설당은 특이한 건축양식과 구조로 우리지역에서 유일하게 조선시대 정자의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특히 화설당이란 정자 이름은 당시 나주목사였던 박동열이 이마을에 들렸을때 마침 눈속에 피어 있는 동백꽃을 보고 지은 것이다. 뿐만 아니라 화설당이란 편액의 글씨는 송시열이 칡뿌리로 쓴 갈필휘호이다.
정자 화설당에는 3가지 보물이 있다고 전해진다.그것은 동백나무와 용침 그리고 괴석을 말한다. 이중 동백나무와 용침은 없어졌지만 아직까지 300여년 이상의 시간을 정자와 함께 해온 괴석은 화설당 옆에 지금도 자리하고있다. 주민들 사이에는 문화류 씨 출가외인의 욕심을 경계하는 괴석에 대한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화계정 :화계거사 류기순의 정자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다.정자내에는 화계정기등 10여개의 편액이 걸려있다. 후손인 재업이 1951년 신묘년에 중건했다. 화계거사는 당신에 문명이 높았으며 부귀를 뜬구름 같이 여기고 선조인 화설당공과 청계공을 사모하여 이 두 사람의 글자를 하나씩 따서 화계정이라 이름 짓고숭배하였다고 한다.
농작물시험장(바이오센터)속에 있지만 예전에는 주민들이 배를 매기도 하고 당산제를 지내기도 하였던 입석이 있다. 입석은 석주형으로 당산나무에 박혀있는데 마을에서는 일년에 한번씩 이곳에서 당산제를 지낸다.
입석은 자연석으로 사람이 서있는 형태를 하고 있으며 높이 170cm,둘레 32cm크기다. 광목간 길건너에 2개의 효열각이 있다. 효자 류재성비와 열부이천서씨비를 각각세운 효열각과 류준선의 모친 효열부무안박씨비가 있는 효열각이 있다. 마을회관옆에는 류호풍표성비(2004)가 있으며,화계정안에 남계류공화열 효행비와 후계류공재업 선행비가 있다.
한때는 이마을이 광목간 도로 주변 마울 중에서 기와집이 가장 많았던 마을이다.
-청기와3점(없어짐),동백나무용침(없어짐),괴석
설화
문화류씨 선산인 주치봉의 전설이 있디. 임진애란 때 왜구들이 쳐들어 온다는 소문에 너나없이 피난을 가는데 문화류씨 문중에서도 예외가 아니여서 모든 식솔들이 남부여대하고 피난을 가게 되었다. 급히 문중회의를 열었으나 걱정만 할뿐 뾰족한 수가 나오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미 마을엔 왜구들이 들어와 있을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이때 옆에서 듣고 있던 하인인 할멈이 자기가 가겠다고 하며 나섰다.
할멈은 동네 돌아와서 족보는 찾았으나 이미 마을에는 왜구가 들어와 있어서 앞에간 일행과는 합류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마을 옆이 있는 주치봉에 들어가 석굴에 숨어 있었다. 숨어 지내면서 먹을 식량이 없어 주변에 있는 열매를 따 먹으며 연명했다. 그러다 왜구가 물러간 후 문중사람들이 들어와 주치봉 석굴에 들어가 살피던 중 종 할멈의 가슴에는 족보가 안겨져 있었으나 종 할멈은 이미 죽은 뒤였다.후에 문중에서는 종 할멈의 죽음을 가상히 여겨 그 시체를 문중의 선산에 묻고 제사를 지내며 충선스러운 종의 넋을 기려다. 예전에는 종 할멈제사를 음력 10월16일 마을에서 모셨으나 현재는 월선리에 있는 문중 재각에서 다른 선조들과 함께 모신다.
전설2- 괴석이 된 출가외인
결혼을 한 류씨 따님이 친정은 잘 살고 자기는 어렵게 사니까 친정을 못살게 하려고 큰삿갓을 쓰고
마을에 나타나 류 운 손자 류재 할아버지 묘를 옮기지 않으면 큰 변고가 생길거라고 소문을 내고 다니니까 집안사람들이 무슨 큰일이라도 날까봐 묘를 파는데 짐이 터져나오고 송아지가 앞발을 꿇고 나와서 겁이나 그냥 다시 덮었는데 그후로 친정은 망해버리고그드 딸은 바위가 되어버렸다는 전설
기록물, 문헌
화설당지 류종현(2016. 11월)발족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류준선(`단감식초/92세 :30년 이상됨)
식초로 농약만들어 사용함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류자(입향조) 류운(손자) 류제(손자, 자- 雲路,호-창주처사(1652-1727)공이 주치봉자락에 우암 송시열을 모시는 사당을 1704년에 세웠다. 이 사당은 우암송시열선생이 화설당에서 기거하다 가신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긴 이 지방 선비들의 논의에 의해서 세워졌다. 우암과 주자학과의 관계를 중요시하여 주자를 주벽으로 모시고 우암선생을 배향하여 하마비를 세웠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모두 폐허가 되고 지금은 이름만 전할 뿐이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일제강점기때 없어졌다고 한다. 창주처사는 우암 송시열 선생을 사숙하고 흠모했던 선비였다.
화계거사 류기순, 동학운동 류재득 현재 마을에는 그의 손부가 살고 있으나 구체적인 사실은 확인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재득은 인물이 걸출하고 힘이 세 주변에서 함부로 할 수가 없었으며 동학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고 한다. 동학이 진정된 후 헌병대에 잡혀가 곤욕을 치뤘다고 한다.
-류재성(향교정교), 류재능(일제강점기때 면장도 오래했다. 일본말은 모르지만 일본인들이 물어보면 무조건 하이라고 대답을 해서 하이면장으로 유명했다고함), 류길선(행정고시 사법고시 양과합격)
류상현(초대도의원) 류연선(부산수산대교수)
서상기,류광열,류학선(면장)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화계정(류길선) 청계면에서 제일 큰부자
류길남 : 1년에 한번씩 추수하면 가난한 이들에게
베품, 류재엽 1950년 창건자 재실기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