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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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천1리 청계면 청천리 작성
  • 청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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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107세대, 193명
자연마을 구성
淸川里를 말하는 “맑으내”는 청천을 한글로 풀어 쓴 이름이다. 맑은물이 골짜기에서 쉬지않고 흐른다고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본래 무안군 이서면 지역으로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에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상청천 일부와 외읍면의 대동리 일부를 합하여 청천리 라해서 청계면에 편입되었다.상천전과 하청천으로 이루어졌으며 국도 1호선이 마을 앞을 지나고 있다 아마을은 시루봉이 주산이고 조산은 승봉이다 매봉과 말뫼봉으로 둘러싸인 마을은 와우형의 지형을 갖고있다 길건너 보이는 하청천의 봉우리는 주치봉이다.
지명유래
상청 천은 청천1리이 속하는 마을로 원래 이씨와 박씨가 살았다 15세기 중반에 배씨들이 들어오면서 그들은 점차 다른 마을로 이주해 갔지만 아직도 마을 주변에 그들의 흔적이 남아있다. 현재는 달성배씨의 집성촌이다. 청천리라는 지명의 유래는 샘자가 들어있는 세개의 지명에서 비롯된다 마을을 가르고 흐르는 맑은물의 원류인 빈대정골과 마협봉의 동쪽에 있는 점지정골 그리고 마협봉의 서쪽에 있는 왜가리정골인데 이골짜기에서 나오는 물들이 전부 마을 앞으로 지나고 있다.이처럼 청천은 사시사철 맑은 물이 흐른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명의 변화를 보면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청천동으로 나온다. 이후 호구총수에는 이서면 청천리로 1912년 이서면 상청천리로 1917년 이후엔 청계면 상청천으로 나온다.
마을형성(입향조)
달성배씨 입향조인 증암배회공이 경상도 대구에서 살다가 세조때 충신들의 거사인 단종복위운동이 실패로 끝나자 1456년 벼슬을 버리고 은거할 곳을 찾아 이곳 맑으내로 들어와 후학들을 가르치며 여생을 마친곳이다.특히 증암공은 무안박씨 박익경(호-애한정, 고절리 입향조)의 동서였다.세조가 천륜을 버리고 왕위찬탈을 할때 이의 부당함을 눈물로 호소하며 만류했으나 듣지않자 벼슬등 모든것을 버리고 동서를 따라 이마을로 들어온 것이다.마을 앞에는 국도1호선을 따라 열을 지어 나무들이 서 있는데 팽나무66, 개서나무20, 느티나무3그루가 있다 대부분 500년이 넘은 오래된 나무들인데 천연기념물 제82호로 지정되었다 배회공이 마을의 땅기운은 흡족한데 서해 창포에서 불어오는 해풍 때문에 가옥은 물론 농작물이 많은 피해를 입고 있어 고민하다 마침내 지나가는 나그네의 말을 듣게 되어 심게 된 나무들 이라고 한다 .이나무들을 심은 후 부터는 건해풍(서북쪽에서 부는 바람)을 막을 수 있어 자손이 번창해지고 마을도 경제적으로 넉넉해졌다고 한다.또한 마을뒤에는 이른바 무안에서는 제일의 명당이라는 금구도니형(금거북이가 뻘밭을 넘어오는 형국)의 무덤자리에 증암공부인인 강산이씨를 모셔 후손들이 발복하는 좋은 일을 가져왔다고도 한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무안에서 제일 명당자리 금구도니형(금거북이가 밭을 넘어오는 형국)
마을성씨
배씨,이씨,나씨,고씨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미기재
행정구역 변경
문헌으로 살펴본 지명의 변화는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무안현,이서면,상청천,하청천.삼도동과 청천리상청천으로 나온다.이어 1987년 자료에는 현재와 같이 청계면 청천리 ,상청천,하청천으로 나온다. 상청천은 달성배씨 하청천은 무안박씨 집성촌이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이 마을에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동학의 집강소가 남아있다.이른바 청천재집소 이마을은 1894년 농민들의 변혁운동인 무안동학의 중심지였다.배상옥장군을 중심으로 뭉쳐진 무안의 동학군들은 이마을 달성배씨 사당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농민이 중심이 되는 대동세상을 구현하려고 했다 .배상옥장군은 당시 청계접주인 배정기의 잠실(청천재옆에 있었다)에서 기거하면서 동학군들을 지휘했다.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마을에는 동학과 관련해서 찬과반 두 부류의 흐름이 있어 주민들의 생각도 갈라질 수 밖에 없었다 .이런한 흐름때문에 역설적이게도 집강소가 토포군들에 의해서 불 질러지지 않고 보존될 수 있게 된것이다. 한국전쟁때도 이마을은 모스크바로 불릴 정도로 좌익사상이 드세었다.인민군 무안군당 총무가 이마을에서 살았을뿐 아니라 주민들의 의식이 진보적이었다 그러니 만큼 주민들의 피해도 많았다.
주요시설
미기재
마을변화
마을에서 몽탄으로 넘어가는 길을 좁은골재라 한다..일제강정시절 몽탄역에서 기차를 타려고 할때 서호리,남안리, 무안읍 일부등 지역사람들이 기차역을 가기위해 자주 드나들었던 재이다.이 외에도 외얏등,세난골등의 지명이 남아있다. 마을 뒤에는 폭포수가 떨어질때 맑은 옥구슬 소리를 낸다는 명옥폭포(삼바실폭포라고도한다)가 있다. 한때 이폭포는 불치병 환자에게 영험하다는 소문이 나 전국에서 환자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앉은뱅이었던 환자는 이폭포수를 맞고 걸어 나오기도 하였으며 피부병이 걸린 환자는 단 한번의 물맞이로 10년의 고질병이 깨끗이 나았다고 한다.그러나 부정한 사람이 이폭포수를 맞으면 오히려 화를 입어 멀쩡한 사람도 변을 당했다고 한다.또한 폭포옆에는 동굴이 있는데 굴에 돌을 던지면 그돌이 일로의 주룡나루에서 발견되기도하고 몽탄강에서도 볼 수 있다고 할 정도로 영산강과 연결된 깊은굴이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새마을부녀회,노인회
공동이용시설
마을회관,유산각,희망교회,마곡사
전통식품/특산품
양파,마늘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빈대정골,점지정골,왜가리정골,선돌, 장승거리(고인돌11기)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좁은골재(마을에서 몽탄으로 넘어가는 길)왜얏등 세난골(몽탄역으로 기차타러 가는고개) 명옥폭포(삼바실폭포라고도 불렀다) 한재(일로 기차역 1시간정도 넘어가는 고개) 비가오는 날 기차소리도 들렸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1956년-70년대까지 굿,농악놀이 많이하였으나 보유자가 돌아가시자 중단되었다(외국인둘도 사진을 많이 찍어 갔다한다)
유물, 유적
이 마을에는 청천사와 청천재가 있다. 청천사는 1812년 달성배씨의 명병조들을 배향하기 위해 창건하였으나 1868년에 훼철되었고 이어 1872년에 다시 창건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이곳에는 무열공배현경(고려개국공신)과 정절공배극렴(조선개국공신)배운룡(달성배씨시조)배연지, 배균,배회(이마을 입향조)배명, 청절당배상옥등 여덟분의신위를 모신 사당이다.청절당배상옥 신위는 근년에 모셨다.조선시대 한때 이곳 배씨들은 무열공배현경과 정절공배극렴때문에 병역이 면제된때도 있었다한다.무열공배현경을 모신 사당은 전국달성배씨 문중에서 청천사가 최초이다.그러나 훨씬 늦게 무열공을 모신 사당을 지은 나주의 무열사는 이미 오래전에 문화재로 지정받아 국가에서 관리에 관심을 보여주고 있는 반면 역사나 건물에 있어서 훨씬 오래되었고 깊은 이곳은 국가로부터 외면 당하고 있어 마을 주민의 아쉬움으로 남아있다.청천사 앞에는 흑산도로 귀양갈때 이곳에서 일주일이나 머물렀던 면암최익현의 글을 새긴 유허비가 있다. 청천사밑에는 재각인 청천재가 있는데 조정으로부터 받은 청기와 두개가 지붕위에 있어 문중의 자랑으로 내려왔으나 진품여부가 의심스럽다.(여기에는 곡절이 있다. 오래전에 마을의 한 친족이 청기와를 욕심을 내 머슴을 시켜 팔았다가 머슴의 폭로로 훔친사실이 알려졌다.마을에서는 문중 회의를 열어 다시 찾아서 원상회복을 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여 새로 갖다놨으나 과연 그 기와가 예전의 그 기와인지는 알 길이 없기때문이다).마을앞에는 역사와 전통을 가진 마을임을 보여주는 두개의 효자각이 있다. 배규한효자각과 배병의효자각이다.배규한(자-덕보, 호-사모재 1824-?)은 부친이 오랫동안 병으로 신음 하실때 손수 약을 달이고 부친의대변을 맛보며 간호하였다.부친이 돌아가셨을때는 3년동안 시묘살이를 하면서 머리도 안감고 손톱도 자르지 않았으며 옷도 갈아입지 않았다고 한다.이어 모친도 돌아가시자 부친과 똑같이 시묘살이를 하며 자신의 불효를 가슴 아파 했다고 한다. 배명의(자-석린,호-촌심당1863-?)천성이 바른사람으로 부친에 이어 모친마저 앓아눕자 한시도 곁을 떠나지 않고 간호를 하였다. 부친의 임종시에는 손가락을 잘라 피를내어 부친의 입에 넣어 드렸으며 돌아가시자 3년간의 시묘살이를 흐트러짐없이 하여 마을주민들 모두가 그의 효성에 감탄하였다고 한다.효자비각은 1927년 세웠고 1980년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고인돌이 11기나 있다 마을앞 2기와4기 그리고 냉동창고뒤5기 5기중 큰것은 4미터10 넓이가3미터30이나 될정도로 크다 . 또한 마을에서 무안읍쪽으로 100여미타 가면 삼정농수산 맞은편에지석묘1기가 있다. 예전엔 많이 있었으나 길을 내거나 밭을 경작하면서 많이 묻거나 깨버렸다고 한다.
설화
명옥폭포옆 굴속에 있는 호랑이를 잡았다는 전설 달성배씨족보(배태율종손보관) 숙종때 효교지를 받았는데 모든책 자료를 벽지 불쏘시기로 사라져버림.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가수배철수(어렸을 때 부모님이 살았다)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고려 개국공신(배현경) 조선개국공신(배극렴) 동학접주(배정기) 배상옥(장군) 배종무(국립목포대총장, 국회의원) 배태일(미국교수) 향교전교(배규환,배이기) 배종대(청계북교, 면성중 설립기여) 배영훈(조대교수) 배석유,배순선(제일교포 마을회관기금 기증이 마중물되어 주민들의 십시일반 마을회관이 지어졌다)
거처/생가/묘소
입향조 배회부부합장묘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제사때 사용했던 병품 없어짐 임금이내려준 청기와 2개, 화재시 사용했던 큰종,작은종(1965년까지사용)작은종이 아름다웠다함.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천연기념물제82호(팽나무,개서나무,느티나무)지정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이마을엔 두개의 정려가 있다.하나는 고절리에 있는 여산송씨 정려다.여산송씨는 임진왜란당시 무안박씨 박제 장군의 부인이 왜군에게 희롱을 당했다해서 스스로 목숨을 버린 열녀였다. 후일 왕조에서 그의 절개가 가상하다해서 정려를 내린 것인데 원래 그 정려각이 이마을에 있었다.지금도 정문거리라는 지명과 정려를 위한 위토탑이 남아있는것을 볼때 주민들은 어느때 정려가 고절리로 옮긴지는 모르지만 이곳에 있었던 것만은 틀림없다고 한다. 또하나는 함평옥동(당시 무안현)에 있는 이마을출신 배광언의 무남독녀로 당시 의병장이었던 윤함 부인의 정려다. 또한 배명의 따님도 현경면 양학리로 출가아였는데 남편의 간호를 위해 저신의허벅지 살을 베어 간호 할정도로 지극하여 마을사람들이 “달성배씨 열부비”를 세워 후손들에게 교훈 삼게 하였다고 한다.
기타사항
-희망교회 (60년말 –70년 중순)배순기씨 설립,학교를 가지 못하는 인근학생들(서호,기동)까지 중학교 과정 15명정도를 공부시킨곳 -시루봉 흙속에 있는 황철광(산 골)을 캐서 한약방(구리)를섞어 가루로 단방약을 만들어서 먹었다 탈골된 뼈가 붙었다함(비상악으로 사용) -회관옆자리 종대위에 큰종은(두사람이상이 들어야 움직임) 작은종은(아름다웠다) 종머리는 용모양으로 만들어졌음.종을 치면 저음이면서 아름다운 소리가 날씨가 흐리면 무안까지 들렸다 함. -팽나무가 두 줄이었는데 일제강점기때 한줄은 베어버렸다 전언 *배영찬 (43년) 어르신기록문 -조선 세종지리지에 무안 현서 청천동 주동도자기 요업지 있다/품질은 중품 -입향조 배회는 대구칠곡출신 부인이 광산 이씨 무안박씨 박익경의 큰동서 단종복위 운동에 동서와 같이 하였다.세조의 박해를 피하여 동서따라 무안박씨촌 청천동에 살게되었다. 광산이씨는 궁예왕의 후손으로 장자는 광산에 둘째는 대구칠곡에서 살았고 삼자는 경기도 남양주에 살았다.선조때 정요임역모사건 당시 정여임동인이요 영의정이산해도 동인, 영수는 이발의부인 파평윤씨로 고산 윤선도의 친고모 이때 서인인 송강 정철에 의하여 심한고문에 아우 이문과 함께 죽임을 당하였다. 광산이씨 멸문의 화를 당하였다. 음역2월초하루는 콩볶는 날. 흉년이(한해,수해,풍해,충해)라서 광산이씨여인들은 콩을볶으면서 “콩볶자콩볶자 벌레볶자벌레볶자 송강볶자송강볶자 정송강볶아먹자“ 이렇게 노래를 부르면서 원성이 높았다. -청천리산58번지 23정보 산봉오리가 빈대정골. 골짜기8부능선에 땅에서 물이 샘솟는 곳에 일년내내 소진드기가 살고 있어서 빈대정골,지금도 소진드기는 신발위로 슬금슬금 올라온다.개와 동행시에는 개몸에도 많이 붙어 있어서 반드시 구충을 해줘야한다 어느 해는 진드기가 무한히 번식하여 산에 있는 모든 짐승에 다닥다닥 붙어 있어 몸집이 작은 산토끼등은 죽어 있기도 하다. 그해는 집에 있는 개나 소에게도 많이 기생하고 있다. 소는 기르는 닭들이 쪼아먹어 일부는 제거되어도 소닭보듯 닭소보듯 무관심하다는 뜻이 아니라 서로가 기다린다는 말이다. 반갑다는 암묵적인 표현이다. 정부는 반드시 곤충학자를 통하여 진드기성장사를 규명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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