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청천은 홑목(한국지명총람에는호밋갱변으로나온다)
과 아랫서당 야등 그리고 안고랑으로 이루어졌다
예전 홑목은 바로 밑에까지 창포만의 물이 들어와서 자갈들이 많이 있었는데 주민들은 그와 관련된 지명이라고 하지민 알수가 없다 야등과 안고장은 마을에서 대곡마을로 가는 중간에 있다
마을은 지봉을 주산으로 하고 있으며 앞에는 나분돌들이 펼쳐져있다 지봉은 지초봉 또는 뒤동산이라고도 부르는데 옆마을인 화설당에서는 주치봉이라 부르기도 한다. 마을 앞으로는 무안읍의 대곡마을 물맞이 고랑에서 발원한 하천이 흐르고 있다 이하천은 물길이 좋아 나분돌들 뿐아니라 창포만 간척지의 농사에도 이용하고 있다
지명유래
하청천은 청천2리에 속하는 마을로 처음에는 연화동이라 하였다가 큰 서당이 있었던 관계로 허당 아랫서당으로 불리기도 했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의 입향조는 무안박씨 박동양(자-기보,호-낙재,1616-1672)이다 무안군에서 발행한 마을유래지에는 “이마을 입향조는 달성배씨 배명으로 왕조가 1618년 정월대비의 호를 삭거하여 서궁이라 칭하자 이에 부당함을 상소했다 공은 이에 왕조의 미움을 사 호남일대를 방랑하다가 이곳에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하고 후학들을 양성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무안박씨족보를 보면 배명은 박동양의 할아버지인 박임(자-여중,호-지봉,1570-1648)과같이 광해군의 패륜적인 행위에 안타까워 하였으며 둘은 사돈 관계로 이마을에서 외손봉사를 받았던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마을뒤 무안박씨 문중산에 배명위 묘가 있다 박임은 이마을로 낙향하여 서당을 열고 후학들을 가르쳐다고 한다 사실 여러가지 기록이나 상황으로 보아 qkrdela이 입향조일 것으로 추정이 되나 주민들은 그의 손자인 박동양을 입향조로 여기고 있다 이마을은 대대로 무안박씨 집성촌이었다 그러다 70여년 전부터 타성받이가 들어와 살면서 현재는 복합성씨의 마을이 되었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미기재
마을성씨
박씨집성촌. 80년전 강,전 한세대입주
김,권,오,배,주씨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연화동(연방죽이있어서 연화동)이라 불리다가 새마을운동이 흐지부지 되자 하청천으로 다시불림
행정구역 변경
문헌으로 지명의 유래를 보면 1789년 호구총수에는 무안현 이서면 청천리와 하청천으로 나온다. 이 후 1912년 자료에는 무안군 이서면 상청천과 하청천으로 1917년의 자료에는 청계면 사마리하청천으로 나온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바이오 에너지 작물 연구소에서 주민들의 땅을 현 시세보다 3배가격으로 매입하고 주민들의 일자리를 우선 제공했는데 65세 퇴직으로 인해 지금은 고령이라서 농사는 짓지 않고 여과생활을 하고 있다
주요시설
마을 앞에는 1980년에 목포에서 무안 청계면으로 옮겨 세워진 바이오 에너지작물연구소(농천진흥청작물시험장)이 있다.원래 이자리는 일제강점기부터 목화를 재배해왔던 곳으로 조그마한 창고가 있었던 자리이다.
마을변화
마을입구에 하청천교라는 다리가 있다 이다리 옆에는 무안박씨세장비와 지암공 효행비가 서 있다. 다리를 건너면 배롱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 있다
예전에는 여러그루의 배롱나무가 하천을 중심으로 해서 자라고 있었으나 모두 고사되고 지금은 한 그루만 남아 있다. 주민들은이 배롱나무를 매우 귀하게여기고 있었다. 배롱나무는 약효가 널리 아려져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주변 마을사람들이 나무에 제물을 차려놓고
치성을 드리기도 하였으면 아이를 낳지 못하는 아녀자가 이나무를 다려 먹으면 소원을 이룰 수 있다고도 한다. 수령이 300여년이 넘고 둘레는 120cm에 높이는 8m이다 마을 뒤 무안박씨들의 문중 묘에도 수백년이 됐음직한 배롱나무 한 그루가 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부녀회,노인회
공동이용시설
마을회관
전통식품/특산품
마늘, 양파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배롱나무 밑에는 주민들이 이구동성으로 자랑하는 샘이 있었다. 참새암이라고도 하고 쪼빡샘이라고도 했다. 이샘은 여름에는 차갑고 겨울에는 따뜻해 물맛이 좋기로 주변에 널리 알려진 샘이었다.전해 내려오는 말에 따르면 앉은뱅이가 이 물을 맞고는 일어섰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피부병에 효험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하천 정비할때 메워져 버려 그 물을 마실 수 가 없다 마을 앞으로 나 있는 길은
구로리, 강정리, 서호리에 사는 사람들이 무안장에 갈때 다니는 길이다 해서 참새암은 길손들에게 많은사랑을 받았던 샘이기도 하다
창포에서 모래찜하고 무안사람들은 쪽박샘에서 목욕을하고 갔다 수도가 온뒤 73년도 간이상수도 물탱크를 만들어 마셨다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하천에는 5개의 보가 있었다. 수마이보-각씨보-참새암보-불이보-창개보(창포고)
간척지를 막으면서 창개보(창포고)는 없어짐
예전에 이하천에는 은어와 장어등이 많이 있었다. 남아있는 지명으로 장팻골,진고랑,안고랑,비석골,촉갓 등이 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주민들은 마을 앞들을 나분돌이라고 한다. 나분돌들은 넓은들 즉 광석에서 비롯된 말이다. 청천리는 지형상 창포만 주변이라서 고인돌이 많다.
실지로 예전에는 대곡마을 앞 나매미라는 곳에서 시작하여 청천리를 지나 청계북초등학교를 거쳐 서호리까지 고인돌라인이 형성되어 있었다.수십기가 넘는 지석묘가 늘어져 있어 주민들은 넒은돌이라 불렀는데 이것이 변하여 나분돌들로 바뀐것이다.정확히 말하면 너분돌 들이라 해야한다.지금도 나매미와 청계북초등학교 뒤에는 여러 기의 고인돌이 남아 있으며 서호리에도 많은 고인돌이 남아있다. 물론 상천천 마을에는 수십 기의 고인돌이 정리되어 있다.
무안박씨 입향조 박동양과 배명은 사돈간 전라교수시 딸을 따라 들어옴(배명묘 문중산에 있다).제각인 영락재가 있다 영락재는 1991년에 세워졌는데 이마을 입향조인 박동양을 모시고 있다
삼문이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봉이다.
지암공 효행비.
설화
주치봉 굴이 무안교촌리로 뚫어졌다는 전설
기록물, 문헌
이장님(박종덕)의4대조 박종수(고조부)교지가 제실에 있었으나 (종손이 가져가 사진을 못찍음)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주금순:무안음식 명인(도지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裵蓂:자는 요단(堯端)이고 호는 희암이다 입무시조 증암공 회의 증손이며,문명과 덕행이 일세에 관하였다.선조 13년(1580년) 전라교수관에 제수 되었다. 곤재 정개청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선조22년 기축(1589년)옥사에 상서하여 정개청 나사침 나덕명 등의
억울함을 상소하여 왕의 윤허함을 얻었다.선조25년 임진년(1592년)에 왜란을 당하여 아우 효우당 협 등과 창의하여 의병을 이끌고 진주전에 부전하였으며 광해 10년 무오(1618)정월 대비의 호를 삭거하여 서궁이라 칭하게 됨에 따라 이에 부당함을 상소하는데 호남열읍에서 선생의 절의에 따르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폐모론을 주장하는 무리들을 뽑아 없애 버리라는 뜻을 현감에게 강조하고 북을 치며 큰 소리로 그 일당들을 현 밖으로 쫏아내신 분이다.그 높은 절의를 기려 청천사에 배향하고 9월9일(중구)에 유림향사하고 있다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이마을에는 지하에 거대한 물줄기가 지나고 있다 무안읍 못샘과 연결된 물줄기는 충분한 수량을 주민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주민 중 한사람이 이물을 이용하기 위해서 지하수 개발을 하였는데 물을 많이 쓰자 어느날 갑자기 관정 주변이 함몰되어 침하현상이 일어나자 바로 메꾸어 버린 일도 있었다.현재 감나무 단지가 조성되어 있는 비석골에는 이씨들 묘가 있었다 .이곳에는 문인석을 포함한 여러기의 비석과 장군묘처럼 커다란 봉분이 많이 있었다고 하며 60-70년대에 이 골짜기에는많은 도굴꾼들이 다녔다고 한다. 특히 이씨 묘를 팔때는 상당량의 (생활도구와 자기들)이 나왔다고 한다,
청계면 이장단장을 역임한 정홍연님 면허증를 빌려주고 양파사건이나 자살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마을입구 수령300년이 넘은 배롱나무 1그루있으며
문중묘에도 수백년이 넘은 배롱나무1그루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