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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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용산2리 일로읍 농장 작성
  • 농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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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45세대 6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예전에 100호정도가 살아서 일로에서 두 번째로 큰 동네였다.
자연마을 구성
미기재
지명유래
농장 마을은 용산2리에 속한 마을로 공동산을 주산으로 하고 있으며 진등이라부르는 둔덕에 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진등의 양 옆으로는 큰공수몰 작은공수몰이라는 골짜기가 놓여있다. 무안군에서 발행한 마을유래지나 주민들은 ‘마을 형성 당시 마을의 형상이 지네 머리 모양 같다 하여 공수동이라 불러 왔으나 일제강점기때 일본인에 의해서 간척된 영화농장이 들어서면서 마을 이름도 농장이라 했다’고말하고 있다. 농장 마을의 유래는 맞지만 마을의 지형이 지네머리를 닮아 공수동으로 했다는것은 아니다. 공수동은 지형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 아니라 조선시대 공수전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기 때문이다. 공수전이란 관아의 접대비나 역(驛)의 경비를 충당하게 하기 위하여 지급하던 토지를 말한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에 처음 들어온 사람은 이천서씨 서상추(자-용집,1655-1710)이다. 공은 몽탄 대치리에서 살다가 살기 좋은 곳을 찾아 이 마을로 이주한 것이다. 이어서 나주정씨와 김해김씨가 들어왔다. 마을이 처음 형성될 때는 공동산 밑 공수동이라 부르는 곳에서 시작되었다. 공동산에서 영산강을 향해 뻗은 진등은 초기에는 야산으로 무덤이 많았었다. 이후 일제강점기 때는 일본인들에 의해서 뽕나무가 많이 재배되었다. 그러다1920년대 간척으로 인한 영화농장이 들어서면서 각지에서 이주민들이 들어오기 시작하여 점차 마을을 형성하였던 것이다. 해서 주민들은 지금도 마을을 이민촌이라 부르기도 한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미기재
마을성씨
미기재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문헌으로 보면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공수동이 나오지 않는다. 1912년의 자료에 비로소 일로면 公水洞으로 나오며 1917년의 자료에는 일로면 용산리 公水洞으로나온다. 이후에는 일로면 농장 마을로 나온다.
행정구역 변경
미기재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진등을 사이에 두고 큰 공수물과 작은 공수물이 있다. 모두 조선조에 간척으로이루어진 농지인데 토지가 없었던 지역 주민들의 생활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등기부상으로 마을 전체가 주식회사 영화농장 소유의 터였다. 광복이 되었어도 토지가 주민들에게 불하가 되지 않아 발생한 일이었다. 이후 우여곡절을 겪으며 토지가 부분적으로 주민들에게 돌아갔지만 아직도 마을에는 무안군 자산관리공사 기획재정부 소유의 땅들이 많이 남아 있다.
주요시설
미기재
마을변화
마을에 두 군데의 학교 관련 흔적이 있다. 하나는 지금도 학교터라 부르는 곳으로 간립학교가 있었던 곳이다. 김시라의 아버지가 교사가 되어 가르쳤던 학교이다.다른 하나는 일본인들이 세운 동신학교(1회-6회까지 공부했다)라고도 불리는데 마을 앞에 자리 잡은 것으로 학교가 일로동초(당시는 일로남국민학교)로 옮기면서 지명만 남아있다. 또한 광복 이후 농장에서 사용했던 창고를 이용해 공부했던 흔적이남아있다.(3거리 위쪽에 스라브집 창고) 이 마을과 송암 마을 사이에 질그릇을 구웠던 옹기 가마터가 있다. 지금은 밭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조금만 파면 수많은 접시조각과 그릇 파편들이 발견되곤 한다.일제강점기 때 농장 마을은 영화농장을 운영하였던 히또미(人見鹿太郞)의 집이 김시라 집 옆에 있었을 뿐 아니라 진등은 거대한 뽕 밭이었다. 지금도 히또미가 살았던 집의 주변에는 방공호로 팠던 세 개의 큰 굴이 남아있다. 굴은 150m정도 이며 입구랑 끝이 막혀 있었다. 당시의 자료에 따르면 주막이 한군데 있었고 정미소 농장사무실 3동의 대형 창고가 있었으며 마을 앞으로는 협궤 철로가 지나고 있었다. 가을철에 영화농장에서 거둬들인 수확물을 농장 마을 창고로 집결시킨 뒤 철로를 이용하여 돈도리 포구를 이용하여 목포로 이송한 것이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미기재
공동이용시설
미기재
전통식품/특산품
농한기에 병집을 만들었는데 기계로 새끼줄을 꼬아 보해소주 2L대병을 쌀 수 있는 병집을 만들어 말구루마로 싣고 목포까지 갔다고 한다. 현재는 새끼줄을 꼬는 곳이 한곳만 운영된다.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미기재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미기재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미기재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장승명인 정덕근씨의 고향으로 마을 입구의 장승을 기증하였다.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이 마을은 두 사람의 뛰어난 예술가를 배출했다. 품바의 김시라와 설북의 서창순이다. 김시라는 1980년 광주민주화 운동의 참혹성을 바탕으로《품바》를 만들어세계적으로 알린 극작가이자 시인이다. 품바는 없는 자들의 恨을 타령으로 승화시킨 대중 예술의 결정판이다. 김시라의 先代는 이웃 마을 진사동에 살았다. 그의 할아버지 대에 학교터라 부르는 곳으로 이주하였다가 현재의 터로 옮겨 자리를 잡은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남아있는 김시라의 생가가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가 철거되었다. 지자체나 지역민들의 관심이 요구되는 사항이다. 또한 주식회사 세고비아 사장이 이 마을 출신이기도 하다. 김시라는 주민들에게 많은 추억을 남긴 작가이다. 60년대 계몽연극을 할 때는 마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연출을 했다.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고 시를 지어 주민들과 함께 공유했다. 또한 마을에서 품바 연습을 많이 해 나이드신 주민들은 대부분 품바를 부를 수 있으며 마을에서 준비한 품바가 일로공회당에서 첫 공연을 한 것이다. 주민들은 그를 순동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너무 착하고 정열적이었을 뿐 아니라 주민들에게 친절하게 대해줘 좋은 추억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창순은 설북(농악대에서 큰북을 치는 사람의 우두머리)의 대가였다. 1992년 광주시 지정 인간문화재가 되었던 사람으로 농악대에서 영향이 큰 사람이었다. 이 사람 덕분에 60년대 70년대 농악놀이에서 이 마을 농악이 크게 두각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또한 당시에는 신영희 조상현 같은 많은 선후배 국악인들이 마을을 찾아오기도 하였다. 서창순씨는 광산농악단에서 북을 치셨다.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한국전쟁 때는 좌우익의갈등이 신해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 주민인 서영관씨는많은 사람을 구해내기도 했다. 당시 서영관씨는 철도청에 근무했다고 하며 깽메기라는 별병을 가졌고 6·25때 상이용사로 국가보훈처에 등록되어있다고 한다.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주민들은 예전에는 가난하게 살았지만 지금은 근면함과 검소함으로 어느 마을못지않게 경제적으로 안정되었다고 말한다. 또한 농한기 부업으로 시작한 ‘새끼꼬기’사업은 여유시간을 즐길 수 있고 소득도 올릴 수 있어 만족해 하고 있다. 특히60년대 보해소주나 삼학소주의 짚으로 만든 병집은 이 마을을 포함한 주변마을에서독점적으로 제공했다.거대한 농장이 있다 보니 곡식이 넘쳤다. 마을 인심도 넉넉했다. 해서 천사촌의천장근을 비롯한 많은 걸인들이 마을에서 많이 생활했다. 67·68 한해 때는 당시 정일권 국무총리가 마을을 방문하기도 했다. 마을에 협동과 협조가 잘 이뤄져 주민들의 목소리가 마을을 벗어난 적이 없음을 자랑하고 있다.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미기재
기타사항
마을에 밀가루사업을 진행했는데 마을단위로 준설작업을 할 때 삽으로 파서 일을 하고 밀가루를 타왔다고 한다. 영산강을 막기 전에는 기와 맛을 잡아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이 많았다. 영산강을 막으면서 연화동과 산정리는 논을 불하받았다. 다매를 이용하여 장어를 잡으러 다니는 분이 6농가 정도였다. 연 농사는 연방죽에서 연꽃축제를 이제헌군수때 1회를 진행했고 연방죽 주위 논이 깊어서 1년씩 임대를 해서 3년 정도 농사를 짓다가 그만두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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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24.03.03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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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24.03.03 19: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