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작성자 정보

  • 용산4리 일로읍 백호동 작성
  • 백호동

  • 작성일

컨텐츠 정보

아카이브 정보

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27세대 4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1970년대 초에는 60호 정도가 살아서 가장 인구가 많았다.
자연마을 구성
미기재
지명유래
백호동은 황새밥통으로도 불렸는데 용산4리에 속하는 마을이다. 백호동의 지명유래는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자연적인 환경에서 비롯되었다. 간척이 이루어지기전 이 마을은 영산강 물이 마을 앞까지 들어오는 강가로 백사장에 하얀 물결이 굽이치는 전형적인 어촌 마을이었다. 해서 흰 白 물 湖를 써서 백호동이라 하였다. 다른 하나는 한자의 표기가 틀리지만 앞으로 백 세대가 살 정도로 살기 좋은 마을이라 해서 百戶洞이라 하였다 한다. 세 번째는 마을 형국이 황새모양이라는 풍수적 지형에서 비롯되었다. 이웃 마을 학두리가 학의 머리이고 이 마을은 황새밥통에 해당된다고 본 것이다. 해서 입향조가 이곳에 터를 잡으면서 황새는 물을 좋아한다하여 白湖洞이라 이름 한 것이다. 이번 마을 조사를 통해 황새는 물을 좋아한다하여 白湖洞이라 이름 한 것이다. 는 잘못된 것으로 수정을 요구하셨다. 백호동 마을은 마을을 100호로 만들겠다는 의미라고 하셨다.
마을형성(입향조)
입향조는경주정씨鄭達鎬(자-달선,호-죽사, 1894-1966)다. 공은 1920년대 이곳에 영화농장이 조성되면서 상신기리에서 이주하였다. 상신기리는 경주정씨 동족마을이다. 공은 건장한 신체에 독서를 즐겨하였으며 형제간의 우애와 효성이 지극하였다고 한다. 60년대에는 수원백씨들이 청계면 동암마을에서 이 마을로 이주하였다. 마을 주민들은 최씨가 죽산리에서 이주 한 이후로 정씨가 마을에 들어왔다고 한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마을 형국이 황새모양이라는 풍수적 지형에서 비롯되었다. 이웃 마을 학두리가 학의 머리이고 이 마을은 황새밥통에 해당된다고 본 것이다. 해서 입향조가 이곳에 터를 잡으면서 황새는 물을 좋아한다하여 白湖洞이라 이름 한 것이다.
마을성씨
미기재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이 마을의 변천사를 보면 1789년의 자료인 호구총수나 일제강점기인1912년 1917년의 자료에는 마을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1987년의 자료에서 비로소 무안군 일로읍 용산리 백호동으로 나온다.
행정구역 변경
미기재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미기재
주요시설
미기재
마을변화
이 마을은 일제강점기 때 영화농장이 조성되면서 형성되었다. 영화농장은 1925년 인의산 돈도리에서 회도를 잇는 방조제가 완공되어 갯벌이 뭍으로 변하면서 만들어졌다. 거의 5리(2㏎)나 되는 둑을 축조한 사람은 일본인 히또미로쿠타로(人見鹿太郞)였다. 그는 5천 두락 크기의 에이와(榮和)농장을 만들었다. 이때 조성된 마을이이 마을을 포함하여 의산리 돈도리와 농장 연화동 마을 등이다.히또미는 의산리와 용산리 주민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그가 일본으로 물러갈 때 했던 행위가 관심을 갖게 한다. 해방이 되면서 일본이 몰리자 히또미는 그동안에 관공서나 주민들과 주고 받았던 모든 서류를 두레미 마을 앞에 있었던 수문주변에 묻었다고 한다. 지금은 돈도리에 수문이 나면서 그 수문이 없어졌지만 주민들은 그때 히또미가 묻는 것을 주위 사람들로부터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찾을 수가 없다.간척으로 농장이 만들어졌지만 주민들은 물 때문에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이농장에 물을 댔던 저수지는 몽탄 당호저수지와 지금은 백련 단지가 된 백련저수지였다. 두 개의 저수지가 있었어도 물이 모자라 조금만 날이 가물면 물 때문에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 마을은 물 가까이에 자리하고 있어서 크게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 영산강이 막히면서 비로소 제대로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부녀외와 노인회가 있다. 마을협의회가 있다.
공동이용시설
마을에 샘이 3개 있었는데 한해때 물을 주변마을에서 길러갔다. 물이 맑고 간기가 없다. 현재는 마을 샘 자리에 회관을 지었다.
전통식품/특산품
마을의 주 소득원은 과수원이다. 1960년대 초에 복숭아 밭이 있었다. 꽃이 피면 예뻤다고 한다. 나무의 연령이 차러 배나무로 교체했닥 한다. 무안에서 가장 많이 배를 수확하고 있는데 마을 뒤가 대부분 배 밭이다. 마을의 과수원은 오래 전 목포에서 온 주행용씨라는 사람이 최초로 가꾸기 시작하였다. 기후가 따뜻하고 과실을 재배하기 좋은 조건을 갖고 있어 점차 배의 주산지가 되었다. 이곳의 배는 빛깔도 좋고 당도도 높아 많은사람이 찾는다고 한다. 한창 때는 모든 농가가 배를 재배했으나 지금은 인력의 부족으로 몇 농가가 재배할 뿐이다. 배나무도 고목이 되어 10여년 전부터 농사를 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마을에는 주민들이 즐겨 먹는 梨下酒가 있다. 이하주를 만들때는 배를 삶아서 체에 밭쳐서 만들었는데 찬밥과 누룩을 섞어 만들었다고 한다. 뜻이 맞은 친구끼리 어울려 배꽃이 핀 과수원에서 술판을 벌리고 술잔에 배꽃이 떨어지면 마시는 낭만적인 풍습이다. 이러한 풍습은 배 밭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그만큼 이 마을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기에 즐길 수 있는 멋이었다.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마을은 공동산을 주산으로 하고 앞에는 농장이 펼쳐져 있고 안산으로는 인의산이 있다. 마을은 공동산을 주산으로 하고 앞에는 넓은 간척지 농장이 펼쳐져 있다. 해서주민들은 문을 열면 넓은 들판을 대할 수 있어 이 마을 아이들에게 높은 꿈을 꿀수 있게 해준 좋은 터였다고 한다. 공동산은 공동묘지 산이라고도 하는데 일제강점기 때 영화농장의 주인이었던 히또미가 농장 주변 사람들이 죽으면 묘지로 쓸려고샀던 산이다. 지금은 군유지가 되었으며 날이 궂거나 비가 오는 때는 사람들이 산주변에 지나가는 것을 꺼리기도 했다. 仁義山은 높이 154.6m의 낮은 산이다. 병풍산으로도 불리는 이 산은 간척지인 영화농장과 소포들 자방포들에 둘러싸여 있다. 해서 비가 오지 않을 때는 무재봉에서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 넓은 평야지대 한 가운데 우뚝 솟아 있어 정상에서 보는 전망이 좋다. 산 능선에는 1.5km 길이의 등산로가 나있으며 산 동쪽으로 영산강이흐르고 있고, 북쪽으로는 탁 트인 농토가 넓게 펼쳐져 있다.우리 지역의 역사자료인 면성지에서는 인의산이란 이름에 대해서 ‘산자루가 북두처럼 左로 비키었고, 오룡산 무수장막은 右로 둘렀으니 만천가지 승상이 일산의정신을 불러 일으켜 추연히 빼내고 엄연히 섰으니 완연히 인의군자가 중립하여 기울어지지 아니한 기상과 같으므로 인의산이라 이름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동/식물
마을 회관 뒤 큰 소나무 두그루가 있는데 묘 근처에 심어져 있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미기재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미기재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이 마을에 장구의 달인이라 부르는 사람이 있었다. 이미 고인이 된 김남용(김토수라고도 함)옹인데 이 마을 농악의 기초를 놓았던 분이다. 지금은 계승자가 없어 농악이 전래되지 않지만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이 마을의 농악은 무안뿐 아니라 전라남도에서는 알아주던 솜씨였다. 해서 행사 때마다 초청을 받아 일로 농악을 과시하였다. 그 모든 시초가 김남용 옹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농악을 하였는데 면 행사에도 참여하였고 고흥에도 가서 시합을 하였다고 한다. 고깔을 쓰고 장구와 소고 등을 쳤는데 상쇄가 없어서 하지 않았다고 한다. 농사일을 할 때 장구를 치며 일을 했었고 풀맬 때 김매기 노래가 있었다고 한다.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이 마을은 일로읍에서 가장 모범적인 마을이다. 주민들이 서로를 위할 줄 알고협조하며 다투는 소리가 대문을 넘어가지 않는다. 예전에는 울타리가 없어도 불편함이 없었다. 또한 아픔을 나눌 줄 알고 기쁨은 함께 하는 마을이다. 뿐만 아니라 요즈음에는 이 마을 출신들이 사법고시 출신자를 포함하여 관계 학계 경제계 등의 진출도 활발하다. 마을의 단결심이 좋았다. 농업이 주업이어서 품앗이를 많이 하므로 뭉치는 맛이 있었다고 한다. 겨울에는 새끼를 꼬고 병집을 만들었고 이후에는 가마니도 짯다고 한다.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미기재
기타사항
30여년전 기릉동댁 김씨어르신 열녀비를 만들었다고 한다. 50년대 말에서 집 언덕에서 낚시를 했다고 한다. 양두에 중선배가 닿으면 황서리를 짊어지고 와서 썪혀서 비료로 주었다고 한다. 영산강을 막기 전 맛과 기를 잡으러 다니셨는데 목포에서 원둑에서 상인이 와서 사갔다고 한다.

본문

메모

관련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