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안군에서 발행한 마을유래지와 마을회관의 표지석에는 연화동이란 지명유래를 ‘마을이형성될 당시 마을 어귀에 조그만 연못이 있었는데 그 연못의 꽃이 아름다워 연화동이라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지명은 마을의 지형이 풍수지리의 영향을 받아서 지어진 이름으로 보인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은 인동 마을 뒤 복개산의 맥을 이은 공동산에서 두 개의 맥이 영화농장쪽으로 뻗어내려 이루어졌다. 주민들이 황룡등 청룡등으로 말하는 두 개의 둔덕이다. 해서 바닷물이 들어올 때는 마을의 지형이 마치 물 위에 뜬 것처럼 보여 연화부수의 형국이 아니었을까 추정된다. 현재 이 두 개의 둔덕 사이로 나주 혁신도시에서 남악 도청으로 지나가는 4차선 도로 공사를 하고 있다. 주민들은 소음공해로고생하는 것보다 마을이 두 개로 나뉘어지는 것을 못내 아쉬워하고 있었다. 또한교통사고의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서 지하터널을 내줄 것을 요구하고 있으나 주민들의 뜻대로 되지 않고 있다. 마을 앞으로는 일제 강점기 때 형성되었던 영화농장이 자리하고 있으며 오른쪽으로는 일로의 주산인 인의산이 병풍처럼 서있다. 이 마을의 입향조는 평산 신씨다.마을유래지에 ‘이 마을은 영화농장의 넓은 간척지를 중심으로 하여 마을을 이루었는데 입향조는 평산신씨 신유채로 1880년경 경상도 평산에서 이주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실지로 주민들도 신씨들이 처음 마을에 들어왔다는 것을 확인해주고 있다.다만 평산 신씨의 족보를 통해 확인할 수 없어 아쉬웠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바닷물이 들어올 때는 마을의 지형이 마치 물 위에 뜬 것처럼 보여 연화부수의 형국이 아니었을까 추정된다.
마을성씨
미기재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마을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일제강점기에도 나오지 않다가 1980년대의 자료에 비로소 연화동이라 나온다. 하지만 1912년의 자료를 보면 일로면 公水洞이 나오며 1917년의 자료에도 일로면 용산리 公水洞으로 나온다. 이렇게 봤을 때 이 마을과 농장마을은 원래 공수동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공수동이란 조선시대 공수전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인데 공수전이란 관아의 접대비나 驛의 경비를 충당하게 하기 위하여 지급하던 토지를 말한다
행정구역 변경
미기재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일로읍의 영산강 주변 마을이 그렇듯이 이 마을도 예전에는 대단히 어렵게 살았다. 일제강점기에 간척지가 들어섰어도 물길이 닿지 않아 하늘만 바라봐야 하는 논들이었다. 주민들은 영산강이 막히기 전까지는 하얀 이밥을 먹는 것이 소원일 정도로 먹고사는 것에 허덕여야 했다. 주민들 말대로 ‘메뚜기 이마빡’의 마을이었다. 그러다 영산강이 막히면서 비로소 내 소유의 농지를 소유할 수 있었고 논에 모를 심을 수 있었다. 도로망이 확충되기 전 이 마을은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살 수 없다’고 하는 말을 자주 사용했다. 농장이 간척지이기 때문에 비만 오면 질컥거려 다니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황토땅으로 무릎까지 빼졌다.
간척 초기에는 물길이 닿지 않아 논에 뽕나무를 심기도 했다. 또한 세발 나물을 뜯어 먹기도 했다. 주민들은 자신들의 마을을 ‘녹두밭 윗머리’, ‘메뚜기 이마빡’였다고 말한다. 그만큼 처절하게 가난했음을 자조적으로 하는 말이다. 논은 소금밭으로 농사를 지을 수없고 당호저수지와 감돈 저수지에서 내려오는 물은 마을 앞까지는 오지 않아 그야말로 천수답이었다. 밭이라야 손바닥만 하고 씨를 뿌릴만한 언덕이 없었다. 해서 개바라질과 병집만들기 우렁잡이 가마니짜기 등이 주된 업이 되었다. 특히 겨울철 한웅큼의 보리쌀을 빌려서 먹으면 다음해 봄에는 하루 종일 밭일을 해서 보리쌀값을대신해야 했다. 지금의 가치로 보면 말도 안 된다. 현재는 하루 벌면 20㎏의 하얀쌀 두 푸대 이상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주민들은 용감했다. 하늘만 탓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운명을 개척할 줄 알았다. 이 마을 아녀자들의 우렁잡이는 얼마나 씩씩했던지 1960년대 맹호부대를 연상케 할 정도로 장했다고 한다. 그만큼 위험한 곳을 가리지 않고 맹렬한우렁잡이를 하였던 것이다. 부인들은 봄부터 가을까지 신안군 비금면에서 나주 동강면까지 우렁이 있을 만한 곳은 가리지 않고 찾아 헤맸다. 마을에서 십리길이 되는 기차역까지 걸어서 가 기차를 타고 버스를 타고 다시 배를 타고 우렁잡이를 나섰다. 또 우렁을 잡으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씻어서 삶아 가지고 다시 머리에 이고 목포로 가야했다. 팔기 위해서였다.
현재는 벼농사를 짓는다.
주요시설
미기재
마을변화
주민들은 그때의 모습을 방죽에서 먹이 찾아 헤매는 오리로 비유했다. 남들이 볼 때는 우아하고 한가롭게 보일지 모르지만 수면 아래에서는 처절한 생존의 몸부림이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얻은 이득은 당시의 품삯보다 훨씬 많은 소득을 올릴 수 있었다. 이 돈으로 주민들은 자녀들을 가르치고 집안을 지켜냈다. 또 겨울에는 목포에 들어선 산정 농공단지로 나가 돈벌이를 해야 했다. 이제는 자녀들이전부 장성해서 각기 제몫을 해내 주민들은 편안한 일상들을 보내고 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노인회와 청년회 부녀회가 있고 동계를 지낸다.
공동이용시설
미기재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미기재
동/식물
당산나무는 없고 제를 지내는 풍습이 없다고 한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미기재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미기재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미기재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미기재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미기재
기타사항
주민들은 불만이 많다. 마을에 들어오는 길이 좁아 불안한 것은말할 것도 없다. 더구나 마을을 두 개로 나눠버리는 4차선 도로의 횡포(?)를 보고있어만 하는 것도 고역이다. 특히 얼마 전까지는 생존의 기본적인 요소인 물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마음 쓰기도 했다. 마을 앞으로 버젓이 커다란 상수관이 지나가고 있는데 이 마을만이 수질이 좋지 않은 지하수 물을 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 더 불만인 것은 작년까지 겨울에 가마니 짜기로 가용을 벌어서 사용했는데 지금은 겨우내 꼬았던 새끼가 무용지물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마을 주민들에게겨울철 가마니 짜기와 병집 만들기는 추운 겨울철 훌륭한 돈벌이였다. 하지만 금년에 들어서는 겨울철 언손을 불어가며 꼬아놓았던 새끼들이 사용처를 찾지 못해 썩어가고 있는 것을 보아야만 하는 실정이다. 농협이나 읍사무소에 하소연을 해도 대책이 없어 매우 안타까워 하고 있다.
영산강이 막히기 전 칠게(설렁기, 서른기 라고도 함)를 많이 잡았는데 서리올때가 제일 맛있다고 한다. 바다에서는 맛과 게, 짱뚱어, 대가이를주 로 잡았느데 숭어는 잡히지 않았다고 한다.
일로에서 잡힌 게가 제일 맛있었다고 한다.
칠게는 고추와 보리밥을 넣어 갈아서 비벼먹었다.
칠게는 생으로도 무쳐먹었는데 고추와 참기름, 소금을 넣어 요리하였다.
석박지는 무와 씀바귀에 게를 넣어 담그면 국물이 맛있었고 생쌀을 갈아 넣어 만들었으며 가을과 겨울 음식이었다.
옷을 두벌씩 가지고 밥을 싸서 다녔는데 차를 타고 사창서 내려서 기동까지 가서 잡았다. 우렁은 토삼이라고 하여 비쌋는데 신김치에 싸서 된장을 넣고 무쳐먹었다. 경지정리 전에 많이 잡혔다. 우렁은 나주동강, 저수지, 함평, 학다리에서 잡았다.
1950년대부터 1965년 까지 병집만들기를 했는데 짚으로 엮어서 삼학양조장과 보해양조장에 500개씩 머리에 이고 찻길을 걸어서 말구루마로 가지고 가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