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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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암1리 일로읍 황소안 작성
  • 황소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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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220세대의 복합형 시골마을로 가장 많은 세대주와 인구가 살았다.
자연마을 구성
황소안 마을
지명유래
황소안 마을은 월암1리에 속한다. 구 일로역 앞에서 남쪽 방향으로 장항포 들까지 남양홍씨 문중 산이 있었는데 지형적인 모습이 마치 황소가 누워있는 것과 같다고도 하고 막 일어서려는 모습과도 같은 형국을 지녔다고 했다. 황소안이란 지명은 마을이 그 산을 안고 형성되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다시 말하면 황소 형국을 한 산의 안쪽에 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홍씨 문중에서는 오래 전에 그 산 일부를 매각하였는데 현재는 황소머리 부분만 남아있다.
마을형성(입향조)
입향조는 남양 홍씨와 김해 김씨인데 김해 김씨가 먼저 들어왔다고 한다. 그러나 언제 들어왔는지는 확인 할 수가 없다. 무안군에서 발행한 마을유래지를 보면 마을에 역과 역을 연결해주는 황우원(黃牛院)이 있었다고 하는데 주민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또한 기록이나 자료에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그렇지만 마을의 지리적인 위치가 장항포가 막히기 전까지는 바다와 면해 있어 교통상의 요충지였다고 할수도 있다. 또한 조선시대 중기 이후 무안에서 장시가 형성되었다는 기록을 볼 때 院이 있었을 개연성은 충분해 보인다.
풍수지리(마을형국)
황소안 마을은 월암1리에 속한다. 구 일로역 앞에서 남쪽 방향으로 장항포 들까지 남양홍씨 문중 산이 있었는데 지형적인 모습이 마치 황소가 누워있는 것과 같다고도 하고 막 일어서려는 모습과도 같은 형국을 지녔다고 했다. 황소안이란 지명은 마을이 그 산을 안고 형성되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다시 말하면 황소 형국을 한 산의 안쪽에 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홍씨 문중에서는 오래 전에 그 산 일부를 매각하였는데 현재는 황소머리 부분만 남아있다. 주민들은 마을이 가난하고 예기치 않은 불상사가 많이 일어나는 것은 마을의 버팀목이 되었던 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보고 있다. 즉 새로 산을 구입한 소유주가 개발하기 위해서 산을 깎아버려 마치 황소의 잔등을 파버린 형국이 되어 마을에 우환이 많이 일어났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산을 확인 하는 도중 커다란 바위가 있어 고인돌인 줄 알았으나 토석을 채취하면서 나타난 바위라고 한다. 현재 그바위는 없다
마을성씨
남양홍씨가 주로 살았으나 현재는 혼합성씨가 살고 있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문헌으로 살펴 본 지명의 변화는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월암리 라는 지명은 나오지 않는다. 1914년 일본에 의해서 행정구역이 개편될 때 비로소 월암리 등이 나온다. 일로역이 생기고 월암1리를 황우동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행정구역 변경
월암 1리에서 2구와 8구가 분구되었다. 월암2구가 큰동네로 큰 샘이 있었고 큰동네 아래쪽이 1구가 되었다. 즉 월암1리를 사업지구랑 분리하여 마을을 나누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월암리를 포함한 오늘날의 일로읍 소재지는 일본이 진출하기 전에는 매우 한적한 농촌 취락지였다. 1915년 지적원도를 보면 역전통 부근에서 대지는 3개 지번밖에 없었고 일로초등학교 근방에는 조그만 마을이 있었을 뿐이다. 일제가 철도역과면소재지를 월암리에 설치하면서 신흥중심취락으로서 기능을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장항포 농장과 영화농장의 조성에 이어 동양척식주식회사(현재 일로 천주교성당자리)과금융조합의 설치, 그리고 1922년 일로보통학교, 1937년 무안농업실습학교가 개교하자 일로면이 실질적으로 군내에서 가장 많은 인구수를 갖게 되었다. 참고로 일로역의 이름이 1913년에는 삼향역이었다. 당시에는 일로보다는 나주의 영내 삼향의 위상이 훨씬 높았던 것이다. 1924년이 되어서야 일로역으로 개칭했다. 마을의 주 소득원은 벼농사인데 다른 마을과는 상대적으로 주민들이 어렵게 산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영산강 간척으로 영산강에 접해 있던 다른 마을들은 농지를 싼 값으로 불하 받았으나 이 마을만은 지리적인 영향 때문에 받지 못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철둑 밑에 주민들에게는 분양권을 준다고 했으나 의산리까지만 오고 월암리 주민들은 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마을에 영세농가가 세대수에 비해 상당히 많다. 한때 265세대가 살았는데 그중 영세 농가가 50여세대에 이를 정도였다. 현재는 무안군에서 아파트 단지를 제외하고 자연마을로는 가장 많은 넓이와 세대수 그리고 인구를 자랑하고 있다. 농사짓기에는 땅값이 비싸다. 세대원의 3분의 1이 벼농사를 짓고 있다.
주요시설
중앙교회(1955~1960) 체육중고등학교
마을변화
장항포 농장과 영화농장의 조성에 이어 동양척식주식회사(현재 일로 천주교성당자리)과 금융조합의 설치, 그리고 1922년 일로보통학교, 1937년 무안농업실습학교가 개교하자 일로면이 실질적으로 군내에서 가장 많은 인구수를 갖게 되었다. 참고로 일로역의 이름이 1913년에는 삼향역이었다. 당시에는 일로보다는 나주의 영내 삼향의 위상이 훨씬 높았던 것이다. 1924년이 되어서야 일로역으로 개칭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부녀회, 노인회, 청년회가 있다.
공동이용시설
마을 바로 옆에는 일로장이 있다. 일로장은 우(牛)시장을 포함한 장으로 처음 당월촌에서 시작하여 지장리 송태(삼향장)로 이전했다가 천주교 성당 부근으로 옮겨현재의 장소에 이른 것이다. 일로장은 영산강이 막히기 전에는 영암군 미암과 삼호에서도 일로 주롱나루를 건너서 장 보러 오고 나주 동강, 몽탄과 청계 그리고 목포등에서도 사람들이 모였으니 일로 장날이 되면 일로에는 사람들로 넘쳐났다고 한다. 그때는 품바타령과 함께 막걸리도 많이 나가고 국밥집도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무안군의 오일장은 무안장, 일로장, 해제장, 망운장이 있다. 기존의 몽탄장, 청계장이 사라지고 현재 해제장이 사라질 위기에 처해있다. 모든 것은 도로가 만들어지면서 교통이 편리하다 보니 일어나는 현상이다. 공공기관으로 전남체육중고등학교와 중앙교회가 있다. 중앙교회는 30여년 전에 무전산 밑에서 시작하였다가 현재의자리로 옮긴 것이다. 체육중고등학교는 원래 무안중학교가 있었던 자리인데 2000년도에 특수목적교인 체육중고등학교가 들어선 것이다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장항포들을 막기 전에는 바닷물이 들어오고, 뻘이 있어 어업을 하는 인구가 많았다. 체육중학교 후문 앞쪽에 샘이 있었다.
동/식물
장항포들을 막기 전에는 뻘이 부드러워서 서른기, 맛 등을 잡아서 팔았다. 짱뚱어, 운저리,보리새우 등을 잡았고 어족자원이 풍부하여 황금의 보고였다. 어르신들의 말씀을 빌면 범바위앞 수채 넘어서는 운저리가 많이 잡혔다고 한다. 낙지는 안동 앞에 많았는데 낙지구멍 입구를 막았다가 낙지가 숨이 막혀 나오면 잡는 방식으로 낙지를 잡았다고 한다. 도막강은 동강을 내 놓아서 도막강이라 불렀고 큰강을 의미하며 운저리가 많이 잡혔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청호리 방면의 체육중학교 담장을 끼고 장항포들 쪽으로 가는 길을 옥가마(또는옥가메) 길이라고 한다. 옥가마라고 부르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옥가마[玉鼎]는 옥으로 만든 솥을 말하는데 그 부근의 지형이 마치 옥으로 만든 솥의형국으로 명당의 혈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옥가마 길 옆에는 공동묘지가 조성되어 있다. 두 번째는 일제강점기 때 오까마라는 일본인이 살았던 곳을 말한다. 실지로 오까마 주변에 일본인 주택들이 많이 들어서 있었다. 왜냐하면 영화농장과 무룡동신사 등 일본인과 관련된 시설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오까마로 들어가는 입구에 오바잔등이라 부르는 곳이 있다. 그곳에는 두 개의크고 작은 바위들이 있어 주민들의 놀이터가 되었는데 오래 전 누군가가 가져가 버렸다. 주민들은 두 개의 바위 중 큰 바위에 한자로 글씨가 많이 새겨져 있었는데 글씨가 부식되어 읽어보기 힘들었다고 한다. 이 마을에서 일본인들이 간척지 조성에 사용했던 대나무 조각들의 묶음을 말하는 특이한 용어를 확인할 수 있었다(장항포 간척지를 경작하고 있는 삼향면의 이동,용포 마을에서도 확인 된다). 이른바 ‘쑤기를 박다(묻는다)’라는 용어다. 쑤기란 간척지 논에서 염분을 제거하기 위해 묻는 대나무 다발을 말한다. 정확히 말하면 쪼개진 대 조각을 한 필지의 논에 두 개 세 개의 구덩이를 차례로 파서 논 깊숙이 묻고 그 위에 흙을 덮어 농사를 짓는 것이다. 일제강점기 장항포를 막아서 형성된 마을 앞 간척지에 일본인들이 측량을 하여 600 - 900평씩의 농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 농지에 두세 개의 깊숙한 개웅을 만들어 이 쑤기를 박은 것이다. 이후 세 개의 개웅이 만나는 곳에 조그마한 둠벙을 만들었다. 그러면 논 속의 염분이 대 조각을 따라 흘러서 이 둠벙에 모이게 되는데 나중에 이것을 퍼내어 염분을 제거하였던 것이다. 또한 그 자리에 황토를 뿌려서 갯벌 성분을 중화시켜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일로장의 각설이타령, 막걸리, 국밥이 유명하다.
유물, 유적
미기재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각설이들의 장타령은 봄·가을로 동네를 돌아다니며 다른 거지들이 못 오게 막아줬다.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자근이는 키가 작았다. 일로 장에서 막걸리를 한 잔 하고 장타령을 불렀고 얻어먹기만 하지 않고 나눔의 행사를 하였다. 자근이 사위가 들에서 망운에서 땅꾼으로 뱀을 잡아 팔았었다.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미기재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미기재
기타사항
일로장의 소시장 이야기로 제주도에서 소를 배로 실어오면 목포에 내리는데 6마리를 앞쪽에 6마리를 뒤쪽에 세워 12마리를 묶어서 소가 마음대로 못 움직이도록 하여 일로장까지 데려왔다. 장이 서기 전날 깔을 비어서 제주소가 넘어오면 배불리게 먹게 하여 다음날 장에서 소값을 잘 받도록 하였다. 제주에서 온 소는 쟁기질을 못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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