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산은 월암3리에 속하는 마을로 회인동 연동 덕산으로 이루어졌다. 이중 回寅洞의 지명유래는 십간십이지 중에서 寅을 품었다 하는 말이 있으나 더 이상의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이 마을에는 30년 전에 세워진 다복2차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連洞은 마을이 이어져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나 다른 주민은 솔개 鳶을 써서 鳶洞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실지로 마을 뒤 대절로 가는 고개를 솔갯재라 부르며 뒷마을인 대절 마을에는 매봉이 있어 이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지명유래
마을회관 앞에 있는 표지석은 2006년 12월에 세운 것인데 마을의 유래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 마을은 일로읍 소재지에서 동북쪽으로 1㎞ 지점에 위치하여 덕산 회인동 연동 세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동으로는 용산리 북으로는 지장리와 접해 있고 예로부터 회인동으로 불러왔다.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이 덕이 있다 하여 덕산이라 하였다.
마을주민들은 풍수를 하시는 분이 덕산으로 하면 좋다고 하여 덕산으로 부른다고도 하였다. 회인동은 해가 뜨면 잘 비친다고 한다.
마을형성(입향조)
함평이씨 족보에 이 마을 입향조로 추정되는 분의 묘가 德浦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마을에서는 덕포에 대한 기록이나 자료가 없어 어디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예전에 회인동 앞까지 물이 들어왔다는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덕포는 회인동을 말하지 않을까 여겨진다. 또한 일제강점기 대의 자료인 조선면리동 일람에 德岩이란 지명이 나오는데 이 지명도 회인동에 있었던 3기의 고인돌을 지칭하여 부르는것으로 보인다.
풍수지리(마을형국)
德山은 산이 덕이 있게 보인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마을의 지형을 자세히 살펴 보면 뒷산이 마을을 감싸고 있는 와우형이다. 소가 누워있는 지형으로 일명 소쿠리 명당으로 불려지는 마을이다. 대체로 소는 덕이 있는 짐승으로 완만한능선의 와우형 지형이면 지명에 德자가 많이 들어간다.
마을성씨
약 459년 전에 함평이씨 이건직이 나주에서 이거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이 마을의 입향조는 함평이씨 夢聖(자-성보, 호-해옹. 1740-1801)이다. 나주에서 남악으로 건너와 거주하다가 18세기 말엽에 이 마을로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표지석의 기록에는 함평이씨 이건직이 나주에서 곧 바로 이 마을로 들어온 것으로 되어있으나 주민들은 자세히 모르고 있으며 확인할 수도 없었다. 월암3리를 구성하고 있는 세 마을 다 함평이씨 집성촌이었으나 근래에 들어서 여러 성씨들이 들어와 살게 되었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월암리는 일로읍 소재지가 자리한 곳이며 예전에는 영산강과 호남선을 비롯하여 각 지역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1980년대 까지만 해도 황우동, 신흥, 덕산, 월암, 회인동, 강남산, 부흥정, 다복동 등 모두 8개 자연 마을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거주 주민이 늘어나면서 분구가 시작되어 현재는 황소안, 신흥, 덕산, 월암, 강남산, 부흥동, 다복동, 중앙동, 연소동, 읍동, 취락촌 등 11개의 마을로 이루어졌다.
행정구역 변경
문헌으로 지명의 변화를 보면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무안현 노촌면에 왕산리와 덕림리가 나온다. 1912년의 자료에는 일로면 회인동과 덕암리로 나온다. 1917년의 자료에도 일로면 월암리 회인동 덕암리로 나온다. 1987년의 자료에는 일로읍 월암리 덕산이란 한 지명만 나온다.
문헌으로 살펴 본 지명의 변화는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월암리 라는 지명은 나오지 않는다. 1914년 일본에 의해서 행정구역이 개편될 때 비로소 월암리 등이 나온다. 1912년의 자료에 일로면 연소동 황우동 월암리가 나오며 1917년의 자료에는 일로면 월암리 월암 동현리 덕암리 부흥정 회인동으로 표기된다. 1987년의 자료에는 일로읍 월암리 황우동 신흥 덕산 월암 강남산 부흥정 다복동 등 7개 마을이 나온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마을은 왕산을 주산으로 하고 일로의 주산인 인의산을 바라보며 자리하고 있다. 주산인 왕산은 대부분의 주민들이 왕산으로 부르지 않고 삼호 뒷산, 대절 앞산 등으로 부르고 있다. 하지만 함평이씨 제각인 왕산재의 터가 왕산의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고 함평이씨 족보에 기록되어 있으며 제각의 기록에도 이 산을 왕산으로 기록하고 있다.
마을의 주 소득원은 벼농사 외에 시금치와 고추농사를 하고 있다. 주민들 모두 근면하고 부지런해 대부분 여유 있는 생활을 하고 있다.
주요시설
미기재
마을변화
현재 다복2차 아파트가 들어서 있는 자리가 포구였다. 예전에는 그곳까지 물이 들어와 배가 드나들었으며 배를 매었던 바위들이 있었는데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3기의 고인돌이 있었다. 그러다 20여 년 전에 아파트를 지으면서 돌을 깨거나 가져가 버려 3기의 고인돌은 주민들의 의식 속에만 남아있다.
고인돌 3기는 큰 것 2개와 작은 것 1개가 있었고 현재 목포대학교 교정으로 옮겨져 있다고 한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노인회, 부녀회. 예전에는 동계를 했으나 지금은 하지않고 있다.
공동이용시설
독샘 – 들 논 가운데 있다.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덕산 마을 앞에 낚시명당이란 터가 있다. 낚시는 한번 걸리면 빠져나갈 수 없는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곳이 바로 그러한 터라고 말한다. 해서 덕산 마을 사람들은 주변 마을보다 더 유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연애기라는 지명과 젓공장이 있었던 젓동산과 각종 과일나무가 심어있는 꽃동산이란 지명도 있다.
연애기터는 젓공장 뒤쪽이고, 젓공장은 현재도 있고 목포사람이 저장고로 사용하고 있다.
꽃동산은 목포 태화고무 황사장님이 만평을 조성하여 관리하였는데 돌아가신 후 흙을 팔아버려 현재는 없다.
지장리 넘어가는 뒷산을 솔갯재로 부른다.
매봉은 매의 모양으로 천국의 계단 가기 전 오른쪽 봉우리이다. 왕산에는 연동 이씨 제각과 선산이 있다.
잔등 넘어가는 지장리를 삼호마을이라 부른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마을에 상이 있을 때는 팥죽을 끓여 드셨다.
유물, 유적
연동 마을에 ‘일류선생이계희영모비’가 세워져 있다. 연동 마을에서 서당을 크게 일어 주변사람들을 가르친 분으로 문생들이 세운 비다.
연동 마을 왼쪽으로 충정골이라 부르는 곳의 서당이 있었던 자리에 함평이씨 제각이 있다. 왕산재인데 내부에는 6개의 현판이 있으며 팔작지붕에 정면 4칸 측면1,5칸의 구조를 갖고 있다. 삼문은 없으나 제각 앞에는 표지석과 함평이씨삼강비(충, 효, 열부)가세워져 있다.
왕산재의 제사는 3월 마지막주 일요일에 지낸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이계희선생님은 한학자로 서당을 열어 사람들을 가르쳤다.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집성촌이었으면서도 한국전쟁 때는 주민들 간 갈등이 좀 있었다. 다른 마을과는 달리 3명의 희생자가 있었고 부상자는 더 많았다. 6.25때 마을의 피해는 이일오 어르신의 할아버지가 산림계 직원이었고 둘째 작은아버지는 소방서에서 근무하셨는데 돌아가셨다. 양정오씨 동생은 경찰인데 형이 돌아가셨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