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이름은 나주 정씨의 문중산인 江南山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강남산 마을이 되었다. 영산강의 남쪽에 있다 해서 강남산으로 붙여진 이 이름은 더 이상의 자세한 유래는 알 수없다. 마을은 이 강남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또한 강남산 맞은편 농지개량조합아래에 교꾼산(?)이 있었다. 일로역 철도 노동자들이 머물며 일하는 곳인데 이 산이 개발되면서 강남산 마을이 넓어졌다.
마을형성(입향조)
산정리에 살던 나주 정씨들이 100여년 전에 문중 산이 있는 이곳으로 이주하여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마을의 지형을 보면 풍수적으로 쇠스랑 형국의 골짜기이다. 월암리는 대체로 일로읍사무소 뒤 여내기산을 축으로 세 개의 고랑으로 이루어졌다. 첫 번째 고랑은 일로초등학교로 가는 줄기이고, 두 번째 고랑은 일로교회로 가는 고랑이며 세 번째 고랑은 소전원을 포함한 강남산으로 뻗어 있는 고랑이다. 이 마을은 세 번째 고랑에 해당된다. 또 다른 사람은 그물 형국이라고도 한다. 해서 이 마을에서는 돈을 벌고 명예를 가꿀 수도 있지만 마을을 벗어나면 모든 복들이 넘쳐버리기 때문에 대부분 실패한다고 한다.
정순녀어르신의 말씀으로는 국수봉(인의산)에서 보면 쇠스랑형국이 잘 보인다고 하고 마을 읍사무소 뒤 산이 쇠스랑 머리에 해당한다고 한다. 암고랑은 읍동, 따박골은 월암10리, 강남산 골목으로 세 고랑으로 나뉘었다고 한다.
이 형국은 들어온 사람이 돈을 긁어서 많이 번다고 이야기가 전해진다고 한다.
마을성씨
미기재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미기재
행정구역 변경
1789년에 나온 호구총수나 1912년에 발간된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도 강남산이란 지명이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면 일제 강점기에 형성된 마을로 보인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벼농사 위주이고 밭은 없다.
주요시설
일로성당은 1953년 월암리에 공소가 설립되어 사목활동을 시작하였다. 이후 1956년 5월 10일 목포 산정동 본당에서 분리되어 본당으로 설립되었다.
천주교회 아래에 일제강점기 때 사용했던 쌀 창고가 있었다. 한국전쟁이 한창일 무렵 그 창고에는 나락이 많이 저장되어 있었다. 그런데 인민군들이 후퇴하면서 나락을 가져갈 수 없으니까 창고에 불을 질러버렸다. 주민들은 그때의 일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창고에서 타고 남은 쌀숯을 가져다가 연료로 사용했던 일을 인상 깊어 했다.
마을에는 구장터 자리가 있다. 원래 일로장은 지장리 송태(삼향장이라고도 함)에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에 일로역이 개설되면서 일로역 후문과 연결되는 이곳에 장터가 형성된 것이다. 장날이 되면 근방의 걸인패들이 판을 치고 다니며 각설이 소리도 많이 하고 시끌벅적하게 흥청거렸던 곳이다. 이곳은 영산강이 막히기 전에는 영암군 미암과 삼호에서 주룡나루를 통해 장 보러 오고 나주 동강, 무안과 목포 등 4개 지역 사람들이 모였으니 장날은 큰 만남의 장이 되기도 하였다.
1960년(1956년이란 설도 있음)도에 현재의 일로장으로 옮겼다. 지금도 마을에는 주조장이 있으며 정미소가 세 군데나 있다.
마을에 있는 사회복지기관인 소전원은 이 마을 주민들에게 많은 애증을 갖게 하는 시설이다. 소전원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전쟁고아를 수용하기 위해 당시 이 지역 자유당 국회의원이었던 나판수씨가 설립, 지금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을 결손 가정 아동들의 보금자리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실지로 이 마을 주민들이 회고하건데 소전원 아이들을 부러워했던 시절이 있었다. 어려웠던 시절 마을 아이들은 초등학교만 나와도 다행이었는데 소전원 아이들은 공부만 잘 하면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교까지 갈 수 있으니 오히려 소전원에 들어가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기도 했다. 소전원 출신으로 해군 소장을 포함한 경제계 학계 등 각계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소전(蘇田)원의 설립 취지는 ‘蘇田’이란 한자 풀이에서 보듯이 ‘곡식이 잘 가꾸어진 들녘’이라는 뜻으로 원생들을 잘 보살피고 바르게 교육시켜 사회에 진출시킨다는 설립 이념이 담겨있다. 하지만 다른 의견도 있다. 즉 설립자인 나판수씨가 젊었을 때 素全 손재형 선생에게 글씨를 배우러 다녔는데 1951년 고아원을 세우면서 평소 존경하던 스승 소전 선생의 아호를 따 音만 빌려 쓰고 한자는 다르게 했다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마을변화
예전에는 일로읍의 중심지로서 대부분의 기관이 이 마을에 있었으나 1990년도에 10리 읍동으로 分里가 되면서 남아있는 기관으로는 농지개량조합 사무실과 천주교회, 그리고 사회복지기관인 소전원이 남아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노인회와 부녀회가 있다.
공동이용시설
미기재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미기재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미기재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복달임행사로 초복날 삼계탕을 어르신들께 대접한다. 대보름에는 성당 마당에서 강강술래를 했었다. 풍물놀이와 집집마다 지신밟기 놀이를 했었다.
유물, 유적
나주 정씨 門中山인 강남산 기슭에는 산정리에서 옮겨 온 ‘충절문’이 있다. 시멘트 구조물로 이루어졌는데 안에는 세 개의 단비가 있다. 중앙에 충절공정완첨정지단 오른쪽에 효자정처인(정집중 정창일)지단 왼쪽에 동계처사정공낙섭지단이라는비가 있다. 또한 충절문이란 현판 뒤에 오륜사라는 글씨가 각이 되어 있다. 충절문옆에 ‘충절공정완기적비1962’ 가 있다. 그 외에도 나주정씨삼강비1980 다산정선생유적비1969 문도공다산정선생추모단1983이 있다.
충절공 정완은 선조 병자년에 무안군 청계면 송현리에서 태어나서 16세에 무과에 급제하고 1년 후인 17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 장군 막하에 편입되어 당포싸움, 한산도싸움, 진도싸움 등 여러 전투에 참여하여 혁혁한 공을 세워 임진왜란 공신으로 선무훈록에 기록된 사람이다. 그 후 영조 임금이 忠節이라는 시호를내리고 忠良祠에 배향하였다. 후손들은 충절공의 德業을 오래 기리고자 공이 만년에 기거하던 일로읍 산정리에 忠節祠를 지어 문중에서 제사를 받들며 후세의 귀감으로 삼게 했다. 그곳에서 조금 내려가 길 아래에는 효자각이 있다. 그곳에는 ‘효자초산정공지단’이라는 단비가 각 안에 있다. 각 옆에는 ‘효자초산정재연지비1980’이라 쓰여진 비석이 있다. 효자각 아래에는 1932년에 지은 나주 정씨 재각인 경모재가 있으며 정면3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으로 안에 현판이 하나 걸려 있다. 또한 강남산 밑에는1989에 세운 ‘나주정씨일로입향조유허비’가 있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미기재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읍동과 분리되기 전까지만 해도 일로읍에서 제일 가는 부자 마을이었다. 뿐만 아니라 인심도 좋아 ‘강남산에 가면 굶지는 않는다’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주민들이 넉넉한 심성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다 단결심도 좋아 주민 중에 어려운 일을 당한 이웃이 있으면 추렴을 해서라도 도움을 주기도 했다.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미기재
기타사항
예전 장이 있을 때는 방앗간 아래가 장터자리이다. 그 앞에 식육점도 있고 옷장시, 여러 장시가 있었다. 몽탄서 옹기장시가 올 때 고무신에 황토가 많이 묻었다. 예전에는 배(고기배, 황시리 배)가 닿았다. 논두렁에 조개껍질이 많이 있다.
1900년경 포구가 없어졌다고 한다.
일로 장터는 하꼬짝(상자)에 물건을 놓고 팔거나 보자기를 펴고 장사하였다. 땅이 질어서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산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였다.
예전에는 물동이를 이고, 밀지게를 지고 물을 길어다 먹었고 보리쌀을 학독에 물하고 섞어서 갈아 밥을 해먹었다.
강남산 옆 고꾼산은 철도노동조합 일꾼들이 살았으며 주로 철로관리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