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작성자 정보

  • 월암7리 일로읍 다복동 작성
  • 다복동

  • 작성일

컨텐츠 정보

아카이브 정보

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130세대 인구는 350명 정도 산다.
자연마을 구성
다복동은 월암7리에 속하는 마을로 1970년대 후반에 일로초등학교를 기준으로 4구인 월암 마을에서 분리되었다.
지명유래
분구되기 전에는 작은 마을로 불려졌으며 따박골이라 불렀던 마을이다. 지금은 개발이 되어서 예전의 모습은 볼수 없지만 이곳은 깊숙한 골짜기였다. 이러한 골짜기에 사람들이 정착하면서 따박골이 음운의 변화를 일으켜 다복동이 된 것이다. 따박골의 의미는 따박따박 쟁여놓는 골짜기라는 뜻이라고 한다. 다복동의 유래도 무안군에서 발행한 마을유래지에는 ‘가난한 부부가 늦게 아들을 낳은 후부터 살림이 늘자 아들 이름을 다복이라 짓고 이곳에 집을 짓고 살면 부자가 된다고 하여마을 이름을 다복동이라 하였다’고 한 것처럼 복을 많이 받는 마을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비슷한 이야기이지만 주민들은 ‘예전에 다복솔이 많은 이 골 안이 잘사는 동리로 되었으면 하는 소원을 담아 다복동이라 하였다’고 말한다.
마을형성(입향조)
입향조는 1920년대에 들어온 광산김씨 김영두(자-재백, 1897-1961)이다. 공이 이 마을에 자리를 잡을 때 세 가구가 있었으나 현재 두 가구의 후손은 살고 있지 않다. 또한 광복 당시에도 이 마을에 7가구 정도 살았으나 한국전쟁 이후에서야 많은주 민들이 들어와 살게 되었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마을의 지형을 보면 풍수적으로 쇠스랑 형국이다. 월암리는 일로읍사무소 뒤 여내기산을 축으로 세 개의 고랑으로 이루어졌다. 첫 번째 고랑은 여내기잔등이라 일컫는 일로초등학교로 가는 줄기이고, 두 번째 고랑은 일로제일교회로 가는 고랑이며 세 번째 고랑은 소전원을 포함한 강남산으로 뻗어 있는 고랑이다. 이 마을은 여내기잔등 아래에 자리잡고 있어 아늑한 분지형의 골짜기를 이루고 있다.
마을성씨
미기재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1789년의 문헌인 호구총수나 1912년 1917년의 자료에는 나오지 않고 1987년이 되어서야 나온다.
행정구역 변경
미기재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마을엔 자랑거리도 많다. 주민들이 성실하고 온순해 외지에서 이사 온 사람은 다른 곳으로 이사 가기를 꺼려 할 정도로 인정이 깊은 마을이다. 또한 65세 이상의 노인이 70명이 넘을 정도로 많아 장수 마을로 알려졌으며 주민 중 제일 고령은 92세이다. 마을에 뛰어난 소리꾼이 있었다. 소리 할 때는 사람을 울리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였던 사람으로 방송국에서 특별 취재를 할 정도로 알려진 사람이었다.
주요시설
일로 노인회관 앞에 일로공회당이 있었다. 일로공회당은 품바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1981년 12월 김시라와 서선진 박성안 정규수를 비롯한 인의예술회가 중심이 되어 품바를 이곳에서 처음으로 공연했던 자리이기 때문이다. 이후 품바는 무안과 광주 공연을 거쳐 서울로 올라가 공연을 거듭하면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문화 상품이 되었다. 주민들은 의산리에 있는 품바 발상지라는 표지석이 공회당 터에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지금은 당시의 건물을 철거해 빈터만 남아있는데 주민들에게는 추억의 장소이다. 그 아래로 커다란 정미소가 있었으나 그 또한 지금은 없다. 정미소가 있던 자리에 현재 하나로마트가 지어졌다. 1922년에 개교한 일로초등학교와 일로파출소 그리고 일로우체국이 있으며 일로초등학교 뒤를 초분골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정치인 배기선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주요건물로는 광성아파트 승원팰리츠 우체국 파출소 노인회 일로분회 하나로마트 등이 들어서 있다. 새로 신축된 노인회 일로분회 사무실 옆에는 1971년에 세운 ‘대한영노회기념비’와 1984년에 세운 ‘도의원임경규공적비’가 서있다
마을변화
전체적으로 이 마을의 지형이 낮아 답답한 느낌을 준다. 특히 마을 옆으로 주거환경개선 사업의 일환으로 길이 나는데 마을 쪽에서 보면 6미터가 넘는 높이의 옹벽이 들어서게 된다. 이를 보고 주민들은 마을을 감옥으로 만들고 있다고 불만이 많다. 또한 지대가 낮기 때문에 예전에는 비가 조금만 많이 오면 마을 일부가 침수를 당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하수도 공사 때 수로를 넓혀 그 이후부터는 침수 사태가 없었다고 한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미기재
공동이용시설
미기재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일로에는 유명한 샘이 있었다. 큰샘 참샘이라고도 불리는 이 샘은 월암8리 중앙동에 위치하고 있는데 지금은 메꿔져 연립주택이 들어 서 있다. 이 샘물은 일로 주민 전체와 당시 무안중학교의 학생들이 먹을 정도로 수량이 많았으며 아무리 퍼내도 바닥을 볼 수 없었다고 한다. 또한 물을 사용하지 않으면 넘치는 것이 아니라 늘 일정한 수위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동/식물
예전에는 마을 주위로 탱자 울타리가 둘러져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학교 안에 팽나무를 베어서 행사때 마다 비가 온다고 한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마을 동계때는 주민들이 모여서 음식을 해 먹는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일로초등학교 뒤에는 거대한 바위가 있다. 주민들이 달바위라고 부르는 입석이다. 지형상으로 봤을 때 상당히 높은 둔덕에 위치하고 있어 개발이 되기 전에는 일로 주변의 마을에서 모두 바라보았을 선돌이다. 크기도 길이가 4미터 50에 하단의 너비는 3미터가 될 정도로 크다. 월암리라는 里名이 이 바위에서 비롯되었다.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이 바위는 월출산에서 달이 뜰 때 달을 정면으로 받아들여 여러 가지 모습을 보여준다고 한다. 이런 모습에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였던 지역이 장항포 들 너머에 있는 삼향면 용포 마을이다. 용포 마을에서는 이 돌이 마치 불끈 솟은 남성으로 보여 마을 여자들이 바람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바위를 자세히 보면 조그마한 구멍이 뚫어져 있다. 이것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영화농장의 둑을 쌓으면서 돌이 필요해 이 돌을 가져가려고 뚫어놓은 남포 구멍이다. 하지만 주민들의 거센 반발에 의해서 가져가지 못하고 당시에 뚫었던 흔적만 남아있는 것이다. 주민들은 이 바위 아래서 세 개의 항아리가 나왔으며 그 속에서 동전들이 많이 나왔다고 한다. 가지고 있는 주민도 있다고 하나 확인할 수 없었다. 예전에는 주민들이 이 돌 앞에다 상을 차려놓고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달바위 주변에 대나무가 있던 것을 학교에서 대나무를 파서 옮기면서 항아리가 나왔다. 원래 임상수씨 집터에 있던 월암바위는 학교에 편입되었다고 한다. 마을 주민 중에는 먼 길을 갈 때 술 한잔 부어놓고 바위에 인사하고 가기도 하였다고 한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미기재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미기재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미기재
기타사항
미기재

본문

메모

관련자료